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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향한 몽환의 프리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5. 20. 00:59

 

생명을 향한 몽환의 프리즘

나호열

1.

 

【광화문시인회】는 올해(2013년 3월) 봄에 무크지 『시 ․ 2013 POETRY』를 발간하면서 활동을 시작한 동인회 同人會이다. 『시 ․ 2013 POETRY』 서두에서 그들이 밝히기를, 추상적인 언어를 두려워하면서 시적 기교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시의 기교가 음악의 기교보다 더 단순하다고 단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인이라는 틀에 갇혀 시시각각 변화하는 문학 세태에 선별적 비판과 수용에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개별적인 개성 - 문학의 쓰임새에 대한 견해와 표현방식의 차이 - 을 통괄적으로 수렴하는 공통분모를 의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즉 그들은 ‘생명에 대한 외경 畏敬’을 개성이라는 씨앗으로 각기 다른 옷을 입혀 그들의 시적 토양에 심어놓았음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외경’이라는 공통분모는 어쩌면 전 인류적인 가치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지만, 그것을 실현하고 체득하는 과정은 개별적 삶의 여로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으므로 각기 다른 씨앗이라고 치환한 ‘개성’이라는 어휘는 어느 정도의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11명의 시인, 【광화문시인회】의 선언은 오늘날 우리의 현대시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논쟁의 길항 拮抗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외면할 수 없는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그 앞머리에 돌출되어 있는 문제는 난해시에 대한 논쟁이다. ‘언어’ 자체가 추상抽象인 까닭에 그 추상을 허물어뜨려 구상 具象의 세계로 재현해내는 것이 문학, 특히 시詩의 본령이라면 【광화문시인회】의 추상적 언어에 대한 두려움은 타당한 의견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곧바로 시적 기교에 매몰되지 않으리라는 언명과 음악의 기교보다 단순하다고 단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두 개의 판단은 그 진위를 판명하기 매우 어려운 딜레마이다. 창조의 문제와 결부해서 기교는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징표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추상에서 구상으로 환원되는 단순함은 마땅히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면에서 시적 기교의 발현이 진심 -盡心을 다하지 않는다면 작품의 생명력은 급격히 소진되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양자兩者 사이에 놓여진 난해 難解에 대한 각기 다른 관점은 21세기 탈이성적 脫理性的 사회에서의 상상력 想像力이라는 날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경로를 달리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광화문시인회】의 각 시인의 작품에서 그대로 노정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체험과 깨달음의 세계, 이른바 서정시가 추구하는 ‘자아의 세계화’에 치중하는 시와 시인들이 있는가 하면, 이성의 해체에 주목하면서 관능과 무의식의 저변을 탐색하는 일군의 시와 시인도 한 울타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 시적 기교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언명이 시의 본령을 진심 盡心을 다한 깨달음의 서정으로 방향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라면 음악의 기교보다 시의 기교(언어)가 단순하지 않다는 인식은 억압된 현실세계(몸)를 해체시키거나 해방시키므로서 상상 想像의 저 편으로 끌고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런 양극단의 거리감을 지닌 【광화문시인회】의 앞으로의 진로는 오늘날의 삶에 대한 관심과 진단의 차이, 그 진단과 처방에 따른 그들의 진지한 탐구와 각성 속에서 결정지어질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이번 【광화문시인회】의 신작들은 앞으로의 그들의 행로를 예측하고 오늘의 시의 조류를 되짚어볼 수 있는 조감도에 값하는 것으로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을 것이다.

 

2.

 

이번 신작들은 『시 ․ 2013 POETRY』의 연장선상에 놓고 볼 때 시인들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시 ․ 2013 POETRY』의 일독을 권한다.)다양한 그들의 목소리는 참으로 무겁기도 하고 한없이 따뜻하기도 해서, 시의 주제나 형식의 갈래로 나누어보거나, 시적 기교의 갈래로 진단해 보려는 시도는 11명의 시인들의 특성을 분별해내는 데 유용한 방법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삶’ 또는 ‘생명’이라는 내포 內包로 분류해 보면 그 외연 外延에 속하지 않는 시들이 저만큼 있고, 시를 형상화하는 방론으로 호명하면 전혀 이질적이었던 새로운 군집이 형성되기도 하는 것이 【광화문시인회】의 면모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시의 형식과 내용을 포괄적으로 운용하는 시적 기법까지 고려해서 한 두 개의 범주로 묶어 감상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인 안내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여, 전통적 서정시의 지향으로부터 시작하여 세계와 자아의 해체에 다다르는 경로를 짚어 보고자 한다.

 

관념적 서정의 세계

 

서정 抒情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문명이 점령해버린 세태에서 나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의 조응을 노래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서정으로 수렴하는 것은 눈물겹다. 따라서 시라고 칭해지는 그 모든 행위는 익명으로부터 자아를 구원하려는 몸짓이며 더 나아가 그 모두를 서정시라 불러도 마땅하다. 자연현상에 비추어보는 삶에 대한 반성과 낭만의 추구는 창조라는 새로움의 빛보다는 천진무구의 세계로의 회귀이다. 차영헌, 주병오, 정희수, 배상수의 시편들은 안정적인 톤으로 내성 內省으로 바라본 진심 盡心의 세계를 노래한다. 차영헌의 짧은 시 「가을하늘」을 필두로 주병오의 「호수의 아침」, 정희수의 「생머리 날리던 바람 따라」, 배상수의 「바람의 서곡」들이 바로 그러하다. 소멸로 향하여 가는 인생의 무상함, 갖지 못할 것에 대한 욕심의 허망함과 자유와 행복에의 열망은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은 추상의 세계인 까닭에 - ‘본다는 것은/시선의 집요한 애무다’(정희수의 「생머리 날리던 바람 따라」 부분)- 구체적 진술이 아닌 묘사가 필요할 것이다. 가을 하늘을 ‘세상을 비추는/양심의 거울’ (차영헌의 「가을 하늘」첫 연)로, 행복의 순간을 ‘깨이지 않은 고요 속으로/반사된 햇살에 눈이 시리다’(주병오의 「호수의 아침」 1연 부분)로 감각화하는 능력은 삶의 본질을 바람으로 물질화하여 ‘부딪혀 보지 않은 자 멀리 가지 못한다 (배상수의 「바람의 서곡」 1연 1행)’ 과 같은 잠언의 형태로 극대화 될 때 아름다움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시인)를 둘러싸고 있는 대상과 자아를 관조의 힘으로 묶으려 할 때 드러나는 난점은 구체적 현실(사건)의 부재이다. 그런 면에서 억압된 공간인 비행기 안에서 무한한 밖을 내다보며 인간의 자유와 자연의 섭리를 체감한 주병오의 「자유 가두기」와 정희수의 「도요새를 날리지 마세요」에서 드러난 인간에 의한 자연훼손과 간섭을 노래하는, 보다 분명한 문제의식을 통한 관념의 탈피는 진술과 묘사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지속적으로 시도해볼만한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부언하면 보다 구체적 사실을 기반으로 시를 구성해낼 때 공감의 영역이 넓어지고 그만큼 독자를 이끌고 가는 추동력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구체적 사실에서 삶의 진경을 추출하는 시

 

장갑생의 「그대 머무는 곳에」, 조경옥의 「해망동처럼」, 김양숙의 「깅이잡이」는 굳이 연상聯想작업을 끌어내지 않아도 쉽게 다가서고 시의 진경을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물론 이 때 필요한 것은 팩트(사실)의 전달이나 진술이 아니라 느낌(시의 애매성에 근거한)의 스며듬이다.

 

사지 없는 청년 닉 부이치치

곁으로 다가오자

내게 있는 것이..많구나

「그대 머무는 곳에」 중 일부분

 

해망동은 커다란 귀다

천 리길을 넘게 달려온 금강이 쏟아놓은 얘기,

...(중략)

 

귀 크고

입이 걸진 해망동에서는

느리게 걸어야 한다.‘

그리고 이따금 멈춤이 필요하다.

 

「해망동처럼」1연과 마지막 연

 

 

보릿대와 무명실, 밥풀 한 수저 그리고 한 되들이 양은 주전자 하나 뚜껑은 꼭 있어야 되는 깅이잡이 깅이를 잡을 땐 두 가지 방법을 쓴다 ... (중략)

내미는 떡고물에 달라붙은 칠남매가 포승줄에 묶인 아버지의 어깨를 짓눌렀다 아버지는 깅이였을까“아버지 주전자 뚜껑이 열려있어요 오늘이 4월 3일인가요”

「깅이잡이」 첫 연과 마지막 연

 

「그대 머무는 곳에」는 유에서 무로 급변하는 부재의 시간 속을 헤매며 절망하는 풍경을 그리고 있다. 영원히 내 것이 없는 것이 우리 생명인데 우리는 착각 속에서 영원한 향유가 당연한 듯 살고 있다. 느닷없이 다가온 불행 앞에 속수무책인 사람들. 어쩌면 화자 話者는 수술을 통해 신체의 일부분을 상실했을지 모른다. 그 절망 속에서 사지가 없는 청년 닉 부이치치는 없는 팔로 화자를 안아준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충분히 많은 것을 지니고 살면서도 없음을 한탄하고 사는 지를 깨닫게 해준다. 「해망동처럼」은 금강 하구의 풍경을 통해서 일제 수탈의 역사와 전쟁의 피난지의 절망을 밀도 있게 그려내 주고 있다. 조경옥은 구체적 현상에서 삶의 정답을 찾아내는 예리한 촉수를 지닌 시인으로 보이는데, 그 예리한 촉수가 단지 시적 기교로 보이지 않는 까닭은 놓여진 현상에 몸을 부비고 아파할 줄 아는 진심이 서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깅이잡이」는 이번 특집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시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제주 방언은 제주도내에서도 표준어 교육의 충실성(?)의 여파로 사용자가 급격히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 그런 제주 방언을 질펀하게 풀어놓으면서 그 안에 게의 속성을 이용한 게 잡이의 속알음과 그 게잡이를 통해 4.3 사건이라는 비극을 짬짬이 아로새기는 기법은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울분의 토로가 아닌 슬픔의 정화로 시를 어떻게 설득력있게 재현되어 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전범일 듯 하다.

 

몸과 욕망의 내면을 음각하는 시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에 부합되는, 의식의 세계 밑에 침잠되어 있는 무의식을 끄집어낸 사람은 프로이트다. 이 무의식은 마그마처럼 끊임없는 분출과 폭발을 꿈꾸고 있고 언제나 억압의 사슬을 풀어낼 틈을 찾아내고 있다. 리비도 libido를 품고 있는 인간의몸은 본능의 이름으로 쾌락으로 이끌려 가기도 하고 생명의 에너지로 승화되기도 한다. 화산으로 분출하기도 하고 깊은 상흔으로 의식의 내면 속에 얼음처럼 각인되기도 한다. 김영자, 이현애, 김양숙, 신경숙, 정승화의 시편들은 그 강도를 달리 하면서도 여성성, 억압된 관능의 해방과 일탈을 통한 생명에의 귀환 등을 그들의 의식으로 담고 있으며 단문형의 서술을 통해 의식을 절단하고 그 절단면을 파편으로 드러내는 작업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법들은 정통적인 시의 이미지화와는 거리가 있으며 논리적 구조를 애써 회피하므로서 시읽기의 괴로움(?)을 가중시키기도 한다).

 

김영자는 「파이프라인은 어디에 있을까」 연작을 통해 생명의 인과 因果를 탐색한다. 이 세상에 격절된 존재는 없다는 인식은 ‘누군가 태어나는 일은 길을 잇는 일 (「파이프라인은 어디에 있을까 2」)’이라든가 ‘눈길을 주면 허공에도/ 길이 생기네 날개뼈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지상의 둥근 실체들이( 「파이프라인은 어디에 있을까 3」)’와 같은 표현에서 드러나는 생명의 관계성을 추적하므로서 궁극적인 모태의 숭고한 인과‘ 어머니의 끝에서 내가 피고 있었다/ 작은 잎사귀를 들고/ 피어나는 아침은 찬란했다( 「파이프라인은 어디에 있을까 2」)’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김영자의 시와는 달리 이현애의 시들은 낯설기 그지없다. 끊임없는 중얼거림은 이 세상 밖에서 세상 안으로 이방인이 던지는 불통의 메시지다. 『시 ․ 2013 POETRY』에 수록된 메모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 갑자기 낯설어진 일상이 나를 이방인으로 만든다. 내게 달려드는 대문 밖의 바람은 물론이고 그저 지나치던 여늬 사람들도, 나를 지나쳐 앞으로만 바쁜 이들도 내게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낯 선 곳에서 길을 잃은 것 같다.’ 오랜 시간을 견지하고 있는 삶과 생명에 대한 시인의 일관된 의식과 태도는 부조리하고 불안정한 삶의 위태로움을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상징으로, 시 한 편으로 읽게 만든다. 아마도 독해되지 않은 생명의 비의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시인의 책무인 것처럼.(그런 까닭에 한 편의 시를 읽고 난 후에 남는 잔상을 더듬을 줄 아는 사람은 이 시인의 애독자가 된다.)

 

여자에게 꽃길을 내고 다녀간

나비의 흔적이 화석처럼 남아있다

 

여자는 사내의 쇄골에서 연주되는 음악이다

 

벚꽃에 가만히 스며들면 나비 발목이 만져진다

 

ⓛ은 신경숙의 「문 밖을 서성이는」 ②는 김양숙의 시 「달을 연주하다」 ③은 정승화의 「키스」에서 눈에 짚이는 대로 뽑아본 구절들이다. 우리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전범처럼 들먹이는 여성의 위대함이나 사회적 구조에 기인한 억압에의 분노나 적으로서의 남성은 이들의 시에서는 강조되지 않는다. 오히려 앞서 김영자의 시에서 드러나는 생명을 잉태하는 긴밀한 관계로서의 몸의 부딪침을 몽환으로 부각시키고 있다.‘오래 전 부메랑으로 던져버린 물이 사막을 적시며 자라나다는 것을 몰랐다 우린 뜨거워진 서로의 물을 퍼먹으며 지나온 물의 연대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흰 꽃으로 피는 피의 순도를 나누어 가졌다 달 안에 감춰놓은 지느러미가 서서히 젖어 갔다’ (「달을 연주하다」 마지막 연)와 같이 서로에게 기대고 생명을 나누는 관계, ‘벚꽃과 나비 발목이 오래 한 몸으로 잠드는 걸/지켜보며 태몽을 꾼다’( 「키스」 부분),과 같은 교감의 평화, ‘아랫도리를 위로 세우고 설익은 씨방을 익히는/ 꽃들의 길은 단내를 풍긴다’(「문 밖을 서성이는」 중간 부분)와 같은 본능의 분출이 추하거나 역겹지 않은 것은 어떤 문화나 시대를 거슬러도 훼손될 수 없는 생의 엄숙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무의식과 해체된 관념의 재구성은 보다 논리적 구성이라는 요소를 시에 가미할 때 의미를 더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3.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시인들의 경향을 몇 갈래로 묶어본다는 것은 위험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주마간산 식으로 11분의 시, 22편을 훑어보기는 하였지만 【광화문시인회】의 신작들을 통해 우리 시단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단면을 새로이 조명할 수 있었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적 서정의 지향은 예술의 숙명적 숙제인 창조의 새로움을 방해하고, 탈이성적인 의식의 해체는 표현의 통로인 언어의 추상성을 지나치게 밀고 나감으로서 해독이 불가능한 의미의 폐쇄에 돌입하게 만든다. 【광화문시인회】의 신작 특집은 이러한 양극단의 거리감을 어떻게 조정하고 조화롭게 완성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시인들 자신에게, 시를 감상하는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기회가 될 것임을 믿는다.

 

* 이 글은 계간 시와 산문 2013년 여름호에 게제되는 원고임.

 

인용된 시들

 

 

가을 하늘/ 차영헌

 

세상을 비추는

양심의 큰 거울

 

그 앞에 선

내 영혼부끄러운 곳 드러나

 

눈물로 씻어 내는

서려 있던 분홍색 욕망

 

 

달을 연주하다 외 1편/ 김양숙

 

물컹거리는 동굴을 찾아 사내가 기어 다니던 길

어둠을 지나야 만져진다는 휘파람을

그 길에서 보았다

또르르 말린 혀끝으로

독수리의 날개를 불러낸 사내

뒤쪽을 파내어 낯선 발자국을 찍고

여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의 궤도를

쇄골 안쪽에 그렸다

 여자는 사내의 쇄골에서 연주되는 음악이다

불구의 등뼈를 가진 여자가 물고기의 울음소리를 냈다

치사량의 독이 말랑거렸다

여자의 쇄골은 어디쯤에서 접힐까

 

오래전 부메랑으로 던져버린 물이 사막을 적시며 자란다는 것을 몰랐다 우린 뜨거워진 서로의 물을 파먹으며 지나온 물의 연대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흰 꽃으로 피는 피의 순도를 나누어 가졌다 달 안에 감춰 놓은 지느러미가 서서히 젖어 갔다 ?

 

 

깅이* 잡이

                 -토벌대

 보릿대와 무명실, 밥풀 한 수저 그리고 한 되들이 양은 주전자 하나 뚜껑은 꼭 있어야 되는 깅이잡이 깅이를 잡을 땐 두 가지 방법을 쓴다

 

하나

 

바닷물이 빠져 나가면 시나머들* 아래 널브러진 돌멩이들을 치우며 섬 하나를 만들지 그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해안가에서 중산간마을까지 가는 동안 가장자리부터 공략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엉덕*이나 토굴을 찾아 샅샅이 들춰내야 한다는 것 대흘리*에서 엉덕* 아래 돌멩이 하나를 들춰내자 돌 틈에 납작 엎드렸던 열네 살 어머니가 고구마를 파먹다 걸어 나왔다 얼른 집어 주전자 속으로 밀어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때부터 어머닌 갇혀 살았다

 

 둘

보릿대에 무명실을 묶고 무명실에 밥풀을 매달아 바위틈에 던져 놓고 달까지 갔던 바다를 기다렸다 납작 엎드린 등 대신 바람이 일어섰다 미끼 가까이 왔던 깅이 한 마리가 눈치 빠르게 돌아간 뒤 한 놈 두 놈 세 놈 나는 너의 다리를 물고 너는 나의 팔을 잡고 줄줄이 기어 나와 깅이 범벅이 된다 주먹만큼 붙으면 살그머니 들어내어 주전자 안으로 털어 넣었다 잽싸게 물로 내빼는 놈은 포기해야 한다 내미는 떡고물에 달라붙은 칠남매가 포승줄에 묶인 아버지의 어깨를 짓눌렀다 아버지는 깅이였을까“아버지 주전자 뚜껑이 열려있어요 오늘이 4월 3일인가요”

 

 *깅이...게의 제주도 방언*시나머들... 제주시 조천리에 있는 지명 *대흘리.....제주시에 있는 지명*엉덕...바위굴을 이르는 제주 방언

 

파이프라인은 어디 있을까 2/김 영 자

 

                           ―탯줄과 실선實線

 

                                 탯줄은 물을 기억한다

                                기억한다는 일은

                                길을 잇는 위대한 시도

                                함부로 말하지 않고 온몸으로 꿈을 꾸는 일이다

 

 

어머니의 끝에서 내가 피고 있었다

작은 잎사귀를 들고 피어나는 아침은 찬란했다

 

혈 이었다 삼백예순 다섯 개의꽃밭에서 생겨난 창문들이 한꺼번에

열릴 때 모래폭풍이 일었다

 

파이프라인은 어디 있을까

이 생과 저 생을 이어주는

고비의 언덕에는 바람이 낳은

맑은 알들이 수북하고 첫 울음은 그치지 않는데

한 번 떠난 바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풀이 물을 기억하듯

탯줄이 물을 그리워 할 무렵

어린 낙타 울음소리 들리기 시작하면

고비에도 봄이 오는가

털 깎인 늙은 낙타의 등에서 기름이 녹는다

 

누군가 태어나는 일은 길을 잇는 일

온 몸으로 꿈을 꾸며 뺨을 마주대고

꽃으로 피어나는 일

무게를 나누는 일

 몸속에 살아있는

 파이프라인은 어디 있을까

 

뼈와 뼈 사이

살과 살 사이

껍질과 껍질 사이에 들어 있는

생生의 탯줄은 실선實線이었어 파이프라인

 

 

파이프라인은 어디 있을까 3

                          ―새들의 악보

 

                            무더기 무더기 날아가는

                           새들의 날개 뼈 사이로

                           스며드는 길

                            기울어도 기울어도 길이난다

 

길은 태어나기 전에도 길이었지만

새들은 태어나기 전에는 둥근 알

점령한 햇살을 품고 있는

 둥근 음악이었네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에

마지막 물기를 말리면서

한 움큼 고스란히 덜어 낸

새들의 눈물은 알과 알 사이로

쪼개어진 껍질은 껍질 사이로 흐르는

둥근 강 꽃나무 그늘 같은 둥근 강이었네

힘찬 날개를 펴고 함께 도약하는 순간

 

그 임계점臨界點의 황홀한 속도로

허공을 치고 나가는 파이프라인

수련 꽃잎 같은 길을 내며

때로는 꼬불꼬불 감기는때로는 둥근 눈물을 삼키며 휘어지는

뒷길을 돌아 막 태어 난 하늘로 가네

안과 밖이 함께 들어 있는 맨살의 하늘에서

눈길을 주면 허공에도

길이 생기네 날개 뼈 사이사이로 드러나는

지상의 둥근 실체들이

모두 둥근 것은 아니었지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방울방울 움직이는

야생의 봄 꽃망울 같은 악보

그 경이로움의 당부 말씀은

왈츠를 추는 날개를 뚫고 왕래를 시작하네

빈 몸과 빈 몸으로 관통하는 파이프라인 새들의 길

 

바람의 서곡 /배상수

 

부딪혀 보지 않는 자 멀리 가지 못한다

얼음송곳 파고 들듯 비명 없는 고통에 빠져본 적 있는가

거친 숨 몰아내는 일몰의 땅위로 바람을 날린다

누가 이 어둠 속에 바람을 파수꾼으로 보냈는지 알아보지 못한채

밤새 불면은 용기를 밀어낸다

 

해가 지는 길을 따라 마음을 내려 놓는다

이루지 못하여 신음하던 근심의 한나절이 어둠에 휩쓸리면

어느 손에 눌리어 내 숨은 막혀 가는가

 

나는 낯설지 않은 길목에서 울음 운다

비겁하지 않으려 했던 무거운 손을 감추며

그리운 생각에 빠져들면 나는 얼마나 떨며 지내야 하는지

시간 위의 바람을 밀어내며 흔들리는 한숨을 묻는다.

 

 

문 밖을 서성이는/ 신경숙

               --의송화

 

한낮의 뜨겁고 비린 정사

아랫도리를 위로 세우고 정분난 꽃들의

엉킨 시간을 씨주머니에 묶어

바알간 햇살의 가시를 발라 팔딱거리는 씨방을 찌른다

 

의송화를 버렸던 부전나비는

세울 수 없는 앞다리의 기억을 일으키며

여자의 간지러운 날개 뼈 주름 속에 웅크리고

닥지닥지 달린 진딧물의 유년을 나무의 수액처럼 빨고 있다

 

척추뼈를 누인 꽃들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새끼줄로 묶어

어지럼증의 아랫도리를 싸리 울타리에 세운다

사내의 허기가 부풀려지고 솟구친 분芬들이 유월의

뜨거운 구멍 속을 열어 실핏줄의 엷은 꽃잎을 달군다

데워진 햇살에 층층이 젖은 붉은 꽃잎을 말린다

 

안으로 데려 갈 수 없어 담장을 서성이는 여자처럼

보리강냉이 같이 부푼 엉덩이를 드러내며

넘을 수 없는 문설주에 도돌이표를 그리며

거짓말처럼 밥풀꽃 같은 눈물길을 내고 있다

 

아랫도리를 위로 세우고 설익은 씨방을 익히는

꽃들의 길은 단내를 풍긴다

문밖을 서성이는 의송화, 여자의

별 같이 초롱한 태아의 길은 그뭄밤처럼 음습하다

 

여자에게 꽃길을 내고 다녀간

나비의 흔적이 화석처럼 남아있다

 

몸을 열은 오래된 기억이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

 

그대 머무는 곳에/ 장갑생

 

퇴적층 사이 포개진 돌무덤 가운데

굽은 손으로 더듬는다

압박하듯 붕대에 감겨있다

칼로 도려낸 가슴에서 멎는다

내게 없는 것 투성이다

이렇게 꽂힐 때

혼魂의 고리 아귀모양 달려들었다

그래 네게 없는 것들 꼽아볼래?

몰려오는 벌떼 지칠 줄 모른다

헤어나올 수 없다

 

한잠 자고 한잠 자고 또 자고

공중 돌기하는 새 한 마리 보인다

그래도 내게 있는 것이 있구나

내려앉는 듯 앉을 듯 그러나 위로 치솟는 박새

눈길이 한참 머물 때

깜깜한 어둠에 몸 풀었던 하늘 한 귀퉁이

어슴푸레 밝아지고 있다

 

사지 없는 청년 닉 부이치치

곁으로 다가오자

내게 있는 것이.... 많구나

몸통에 붙은 단 한쪽 발

책을 넘기고 일어선다 없는 팔로 안아준다

희망을 퍼 나르는 그에게

경계선이 없다

 

어느 땅에 그대 머무려는가

 

키스 ­/정승화

      - 구스타프 클림트

 

벚꽃에 가만히 스며들면 나비 발목이 만져진다

그 종아리를 지날 때 입술자국이 흐릿하게

어지럼증을 일으킨다 어지럼증을 느끼다가

잠든 날, 종일 발바닥에 묻은 꽃가루에

눈을 다치고 발이 푹푹 빠졌다

 

푹푹 빠진 발을 묶어 두고 깊게 간섭한다

벚꽃과 나비 발목이 오래 한 몸으로 잠드는 걸

지켜보며 태몽을 꾼다 말랑한 눈동자끼리

 뒹굴자 풀섶 강물은 4분의 3박자로 흐르고

나비 발목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튼튼해졌다

 

로빈새 눈동자를 닮지 않은 분홍돌고래,

태몽은 아직 탯줄을 자르지 못하고 떠나온 땅,

그래서 아직 고래에 속한다 숱한 꽃의 배꼽을

통과한 나비의 말랑한 발자취, 훔쳤던 노래를

다시 태내에 돌려준다 노래를 부르다 발등을 밟고

일어선다 걷다가 뛰다가 조금씩 숨이 차 오르다

날았다 구겨진 꼬리를 다림질하는 잠의 바닥

 

저녁이 순식간에 덮치자 가만 가라앉은 별빛

이 강가를 떠돌았다 빛이 닿는 곳마다

 잠 부스러기가 떨어지다 제 몸의 무게로

 몰려다니며 체형을 바꾼다 체형을 바꾸는 일은

눈 안의 수분을 덜어낸다 분홍고래 지문, 그

지문에서 흘러나온 땅을 밟으며 마른 눈이

팽팽해진다 팽팽한 눈을 문지르자 피득 피득 입이

지워진다 시선을 빼앗긴 동공이라던가 동공을 핥고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읽는 봄밤,

 

생머리 날리던 바람 따라 외 1편 /정희수

 

본다는 것은

시선의 집요한 애무다

당신의 얼굴에서

당신의 속에서

오래 된 기억 끄집어 내

따가운 햇살 쏘아보라

미루나무 가로수 터널 사이

곧 다가 올 꽃들 향연

한 풍경으로 다른 풍경 이어

새로운 풍경 열면

맨손 쥐고 온 이곳에도 당신의 그림자는 무거워져

생머리 날리던 바람 따라

언젠가 왔던 길 따라 가던 것을

들리는 것 죄다 꺼내면

길 위 내 발자국도 단단하게 포장 될까

 

 

도요새를 날리지 마셔요

 

 

겨울로 가는 마지막

유부도에 가면

도요새들 만날 거여요

 

어떤 새는 갯벌 뒤지며

먹이 찾기 바빠도

뿅~ 뿅~ 뿅~

맑은 소리로 노랠 불러요

 

몸이 작은 좀도요, 민물도요

 청다리 도요새들 종종걸음 치며

허기 채우기에 바쁜데

긴 부리 도요새는 느긋하게갯벌 속 게 잡아먹어요

 

어쩌다 새홀리기 나타나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다시 갯벌 속 스며 들어요

 

저 장관 사람의 욕심에

자꾸 줄어요

여정을 끝내기도 전

날개의 힘 빼게 하지 마셔요

벌써 수천 마리 도요새들 사라졌어요

 

제발 저 도요새를 날리지 마셔요

 

*유부도 - 금강 하구에 있는 삼각지로 된 무인도로 많은 철새들이 들려가는 중간 기착지이다.

 

끈 외 1편 /조경옥

 

끈이 유희가 된다.

 

서너 살배기 아이에게 끈을 쥐어주니

빙그르 돌리고 휘감으며 놀이가 된다.

그 애와 나 사이가

유쾌함으로 이어진다.

 

꽁꽁 묶고

길게 연결하며

단단하게 매듭짓는 끈

그로인해 파생되는 온갖 희로애락,

 

드러나게, 혹은 보이지 않게

이리저리 이어지고 묶여진 끈의 운명은

어쩜 탯줄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검을 묶는 끈을 끝으로 끈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을 보면

 

저 아이의 손에 쥐어준 끈은

머잖아 낡아지고 끊어질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게 이어진

저 아이와 나의 끈은

세월이 흐를수록 질겨지고 두터워질 것이니

유쾌함도 더해지기를…….

 

해망동처럼

 

해망동은 커다란 귀다

천 리길을 넘게 달려온 금강이 쏟아놓은 얘기,

서해바람에 실려 오는 소식

다 듣다가 귀만 커진다.

그렇다고 귀만 커진 게 아닌 것이

때때로꼬리를 문 물음처럼스멀스멀 피어나는 안개,

그 안개에 갇히는 날은입 또한 걸다는 걸 깨닫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터져 나오는

썩어문드러진 속사정처럼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 얘기는

멈추어 서서 들어야한다.

 

귀 크고

입이 걸진 해망동에서는

느리게 걸어야 한다.그

리고 이따금 멈춤이 필요하다.

 

 *해망동 : 군산시 내항에 있는 ‘바다를 바라보는 동네’라는 의미로 지어진 동(洞). 일제 강점기 쌀을 실어 나르던 항구며 한국전쟁 시 피난민의 집단거주지가 있었음.

 

 

자유 가두기 외 1편 /주병오

 

여명을 불사르고 떠오르던 야망

어부에게 금빛바다는 희망이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진 오늘

날마다 뜨고 지는 태양은 그저 일상일 뿐

아침 햇빛은 귀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구름 위를 나는 비행기에서

험난한 준령들 짙푸른 바다를 내려다 본다

이 얼마나 가슴 서늘한 자유인가

그러나 곧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유는 자유를 잠시 시공에 가두는 것

 

한 없는 우주에서 태양과 연緣을 맺어

신이 허락한 하나뿐인 생명의 행성

구도 진정 몸살을 앓고 있다

추위와 무더위 홍수와 쓰나미

인간의 방종에 부해가 나는가 보다

 

그러나 어김없이 봄은 오고

또 여름 가을 겨울 윤회의 길목에서

스스로 시공에 가두어 둔 자유가

꽃을 피우고 알알이 열매 맺어

또 하나의 밝은 세상을 만든다

 

호수의 아침

 

깨이지 않은 고요 속으로

반사된 햇살에 눈이 시리다

오리들에 봄의 왈츠

저 멀리 노 젓는 물소리

소년의 이상理想으로 클로즈 업

야릇한 향기되어 콧등이 시리다

 

한 줄기 주르르 눈물이 흐른다

호수 위를 스치는 바람

말라버린 갈대들의 향연

옷깃에 스며드는 고독

행복이란 무엇인가

아스라이 풍차의 바람을 타고

튤립의 향기가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