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내가 쓴 시인론·시평

허금주 시집 『비자림에 가고 싶다』: 기억이 주는 통증과 치유의 기록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8. 20. 16:26

 

 

허금주 시집 『비자림에 가고 싶다』

미네르바시선 26 .2012

 

 

나호열(시인, 문화평론가)

 

오늘날 우리 의식의 내면에 무의식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인간의 위대한(?) 통찰을 꼽으라면 중세의 천동설에 반기를 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신의 섭리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다윈의 진화론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프로이트가 자신이 발견해낸 무의식이라고 주장한 이래, 인간의 행동 양상이 결정론적 경향을 띤 것 인지 아니면 자유의지론적 경향을 지닌 것인지의 형이상학적 논쟁은 더욱 더 정치 精緻한 문제로 파급 되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을 지닌 인간은 결코 자신의 의지(의식)으로 운명을 결정 지울 수 없다는 결정론으로 기울게 된다. 과학적 사유의 도구인 인과론은 원인 없는 결과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 또한 의식 너머에 존재하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무의식은 실체도 없고 사건도 아닌 까닭에 유령이거나 아니면 사이비 종교 같은 불순한 것으로 종종 폄훼되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어째든 이제 그 무의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라캉에 의해서 ‘무의식은 우리의 의식에 우선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됨으로서 급기야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는 명제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이런 무의식은 어떻게 생성되는 것일까? 이는 깊이 논구하지 않아도 생명활동이 직면하는 사건과 사건에 따라오는 기억의 퇴적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기억은 퇴적되기도 하고 영원히 사라져버리기도 할 것인데, 반복적인 일상의 행동은 습관으로 정형화되면서 의식에서 삭제되고 사라지는 반면에(작년 의 특정한 어느 날 저녁의 메뉴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퇴적되는 기억은 무언가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것으로서 그것은 의식으로 제어하거나 억지로 이끌어 낼 수 없는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퇴적되어 있던 기억은 기억의 촉수를 건드리는 사건이나 사건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상처 때문에 의식의 수면으로 뛰어 오르게 되는 것이다.

 

허금주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인 『비자림에 가고 싶다』는 이러한 무의식의 근거인 기억으로 되돌아가 다시금 오늘의 삶을 반추하는 고통스런 여정의 기록으로 읽힌다.

 

나로부터

나 아닌 대상을 향해가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떠오는 첫 문장으로 인사를 하고

세상 한 켠에서 첫 문장으로 이별을 하고

 

‘21인치에서 25인치 허리로 가는 동안’ 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짧은 시는 시집 『비자림에 가고 싶다』의 첫 출발지로 이해해도 무방할 듯 싶다. 허리 굵어짐이 의미하는 안락과 나태, 순진무구했던 ‘나’로부터 약삭빠른 처세에 길들어져가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당신이라 칭해지는 타자들과의 관계는 ‘얼지 않는 느린 의심’(「겨울 연가」 부분)으로 얼룩지고 ‘한 때 나에게 물을 준 이들은/ 내 옷을 수 천 갈래로 찢어 발기고/ 나에게 돌을 던지며 갔다’( 「검은 시간이 나를 잡다」첫 연)는 괴로움으로 전이되면서 상처와 통증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런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냉철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허금주 시인은 비루한 현실을 역행하여 과거로 잠입한다.

 

‘내 검은 혈육들의 기억을 향해/ 얼굴을 쳐든다( 「검은 시간이 나를 잡다」마지막 부분)’으로 퇴행해 들어간다. 그러나 이 퇴행은 단순히 도피가 아니다. ‘검은 혈육’이 의미하는 바 시인의 둥지였던 혈육은 따스하고 안전한 보금자리가 아닌 까닭이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가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 검은 혈육일까? 현실의 난관을 회피하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유년의 기억은 안온한 거처이면서 원초적 상처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는 전제를 허용한다면. 혈육은 애증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관계일 것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 가족은 굳건한 혈연의식과 희생이 내재된 사랑을 배우는 학교이다. 어릴 때 우리는 부모와 형제간의 수동적 유대를 통해 장차 사회인으로서 적극적으로 희생과 사랑을 구현하는 힘을 기르게 된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그 유년의 기억을 끊임없이 퇴적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사회적 유대를 일으키는 기제로 삼는다. 그러하기에 시집 『비자림에 가고 싶다』에 가득하게 자리 잡은 기억의 편린은 안온과 핍진한 삶이 혼재하는 날개이다. 구체적 정황은 배제되어 있지만 시인이 당면한 삶은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시집에 등장하는 ‘그’ 나 ‘남자’와 같은 타자들은 화자話者와 평온한 관계가 아니다. ‘맛좋은 계시의 안광을 띠었거나(「정전」)’,‘ 우수라는 거주지를 눈동자에 담은(「명사산」)’, 그들은 ‘불온한 초대’의 주인공들이다. 그런 주인공의 짝을 이루는 ‘나’는 ‘그 캄캄한 길이 생애의 유품으로 남겨질 때까지/ 사랑의 종신형은 흐르는 물살과 친해져/ 끝내 죽을 수 없는/그런 세상 속의 그녀 (「그녀」)’이다. 이렇듯 결코 해피엔딩이 되지 않는 불안과 초조의 삶이 일찍이 떠나온 유년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삶을 복기하는 이유는 뭘까?. 이 시집의 1부에 배치된 몇몇의 시편들은 유년의 제주도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바, 비자림, 안덕 계곡, 외돌괴, 산지천 등은 세파에 잊고 있었던 청정한 심성을 환기 시켜주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시인의 제주도 行은 현실에서의 도피가 아니다. 오늘날과 같이 낭만적이고 풍요로운 관광지로의 제주도가 아니라 핍진한 삶을 영위하는 가족과 더불어 존재했던 슬픔을 확인하는 여정인 것이다. 시집의 첫 머리 시인 「한 세상 흔들리고 싶다」는 이런 추정推定을 충분히 가능케 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저 서귀포 바다의 해변을 걷고 있다고 쓴다

태풍을 끌어안은 비를 만년필에 가득 채워

그 해변을 말없이 돌아선다고 쓴다

마침내 나는 바다 바람의 손바닥에

슬프고 긴 머리카락을 묻고 부화되었지만

불시착한 내가 깨뜨린 것은 껍질 뿐이었다

단단한 껍질 밑에

투명한 어둠의 막이 또 있었다

 

사랑의 저 끝에는 무엇이 살기에

수심은 이리도 깊은 것인가

 

- 「한 세상 흔들리고 싶다」 전문

 

사방으로 제주도를 끌어안은 바다는 격절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을 잉태하는 자궁이다. 육지와 격절되어 있음으로 고단할 수밖에 없었던 삶의 현장인 제주도는 설문대 할망의 신화를 간직한 문명이 닿지 않는 신성한 땅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에는 결코 깨달을 수 없었던 자연의 위대한 섭리와 그 자연에 기대어 살았던 어른들의 따스한 품을 수심 깊은 바다를 통해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은 시인에게는 슬프면서도 다행한 축복일 것이다. 돌이켜보니 아름답고, 뒤돌아보니 아늑해 보이는 유년의 풍경은 실로 오늘의 삶이 없이는 확인할 수 없는 진경이다. ‘슬프고 긴 머리카락을 묻고 부화되었지만/ 불시착한 내가 깨뜨린 것은 껍질 뿐 이었다’ 는 현실의 자각은 통렬하지만 그만큼 과거의 기억은 순수함과 건강함으로 되살아난다. 「비자림에 가고 싶다」는 이 시집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경쾌함과 행복감을 선사해 주는 시이다. 24인치의 낭창한 허리를 가진 어머니는 어린 남매를 이끌고 노동의 현장으로 갔을 때 화자가 느낀 감정은 단순하고 직정적인 불안, 어머니의 부재였다 .

 

고아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처럼

그렇게 우리 영영 버림받을 것 같아

함께 울어버린 날이 있었네

 

- 「안덕계곡에서」 부분

 

어머니가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터뜨린 어린 울음은 오욕칠정을 겪고 난 후의 그 울음과는 농도가 다르지 않겠는가? 무시로 걸어 다녔던 비자림의 의미는 시인에게 열패감을 안겨주었던 북아현동(재내 죽은 뒤에 오는 청춘)을 지나 동굴( 떠나간 나날의 한숨이 수 천 년 지층 속으로 사라지는)을 지나온 후에야 비로소 해후하는, 서로가 서로의 뿌리를 얽어쥐고 체온을 나누는 비자림의 정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삶의 끝을 찾아가다보면

우리의 가슴에도 연리지처럼 사랑의 흔적이 내립니다

저만치 시퍼런 하늘을 품고서라도

화산송이 붉은 흙을 맨발로 밟으며

당신 꿈길에 피톤치드를 깔아드립니다

 

- 「비자림에 가고 싶다」 끝 부분

 

 

시집 『비자림에 가고 싶다』의 해설을 쓴 조창환 시인은 이 시집의 뼈대를 “격정과 상처로 변주하는 ‘지상의 빛’”이라고 요약 했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행복과 불행, 즐거움과 괴로움이 대립하여 있는 구조가 아니라 연속성을 지닌 채 상호 중첩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조망하고 끌어안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그들의 세계관을 한 쪽으로 몰고 가는 편리함을 택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허금주 시인은 『비자림에 가고 싶다』을 통해서 생의 환희와 절망을 오가는 허망함을 증언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지 않은가? 에로스가 풍요의 신인 아버지와 빈곤의 여신 페니아 사이를 오가는 중간자 中間者 이듯이 끊임없이 흔들리며 중심을 잡지 못하는 삶을 정직하게 토로한 이 시집의 중심은 ‘외로움’에 있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 줄 타자의 부재로 인하여 외로운 것이 아니라 외로운 타자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그날 밤 외로움의 조각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

외로움이 떠나간 빈자리에 사랑의 별이 들어와 박힌다

 

외롭다는 것은 공유되는 것이다

 

- 「외로움」 마지막 연

 

허금주 시인의 시편은 이와 같이 상처를 직시하고 그 상처를 복원하는 순례의 길을 부단히 오가는 삶을 환기한다. 의식(현실)의 심연(무의식)을 내려가 그만의 언어를 끄집어내는 고행을 보여준다. 그의 시들은 언어가 갖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맞닿은 지점에 별처럼 떠 있어 요사이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묘한 리듬감을 지니고 있다. 들릴 듯 말듯 읊조리면 노래가 되는 시. 시류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렇게 자신의 노래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의 무의식(내면)에 무섭고도 풍요로운 꿈을 간직한 바다를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미네르바』 2013년 가을호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