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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글쓰기와 여행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1. 15. 22:26

 

 

글쓰기와 여행

나호열

 

  둥근 레몬은 어디로 잘라내어도 균질의 맛과 향기를 드러낸다. 우리는 그런 사태나 인식에 대해 무감각하다. 아니, 그런 당연한 예감을 통해서 불안을 해소하거나 안정감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만일, 둥근 레몬을 이리저리 잘라 보았을 때 각기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당혹감과 동시에 파기된 예감으로 자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감각적 인식은 늘 그렇다. 인간, 도시, 농촌, 사랑 등등의 일체의 개념은 그 속에 동질성과 통합을 지시하는 욕망이 개입이 되어 있다. 이 욕망이 공동체라는 허상을 만들고 그 허상을 우상화한다. 공동체란 ‘얽힘’을 전제로 하는 것 일 텐데, 그 얽힘은 늘 해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도미노 현상처럼 하나가 무너지면 차례차례 무너지고 마는 것이므로 얽힘에는 개체간의 신뢰와 굳건한 약속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의 도시화는 그 이전의 농경사회보다 더 폭력적이고 더 불가항력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진보경의 소설 「러닝타임」은 타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공동체의 해체에 직면했을 때, 죽여도 죽여도 다시 살아나서 들러붙는 좀비를 경멸하면서도 자신이 좀비가 되어가는 모멸의 기록이다. “누나, 요즘 같은 시대에 미래를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아?” 주인공에 들러붙어 성희 性戱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주인공의 후배 동오는 ‘클라이맥스도 반전도 없이 러닝타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지루한 B급 영화 같은 것이 자신에게 남은 삶’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주인공은 자신을 부주의하게 임신시키고 하루하루를 소비해가며 사는 후배 동오를 내쫓아버리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자신이 다니는 영화회사는 지금 부도위기에 처해 있다. 사장은 잠적하고 남은 사원들은 각자 생존의 길을 모색한다. 주인공의 동료 혜린은 부도 직전 법인카드로 물건을 사고 그 물건을 되팔아 몫을 챙기자고 제안하는데 주인공은 끝내 그 제의를 수락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러나 혜린은 물건만 챙기고 약속한 몫도 주지 않은 채 사라지고 주인공은 낙태 수술대에 오른다. 이렇게 꿈의 불임과 낙태의 시대, 죄악에 대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이 소멸한 사회, 우리 모두는 각자 정해진 러닝타임 속에서 서로의 좀비가 되어 먹고 먹히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작가는 사원 모두의 생활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사장이 부도를 막지 않고 영영 사라져 버렸는지, 아니면 자금을 융통하여 마감 시간 전까지 은행으로 달려갔는지에 대해서는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이 일말의 희망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윤성택은 이렇게 말한다 ‘기다리는 편지는 결코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것 자체가 이미 편지이기 때문이다( 「응시」 부분, 『시와 산문』2011년 겨울호)’라고 주체적 삶으로의 갱신을 권유한다. 자신이 좀비가 되어버린 줄도 모르고 다른 좀비에게 넌덜머리를 내는 일은 불행하다. 그러나 자신이 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몸에서 자란 꿈의 생명을 낙태하려는 불온함을 지우려 할 때, 거기 ’일상을 열고 나가면 거기에 여행이 있다. 미지는 차창을 열고 부드러운 바람의 저편으로 이어지는 (윤성택, 「여행, 편지 그리고 카메라」 부분, 『시와 산문』2011년 겨울호) 또 다른 긍정에로 인도 引導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행은 모든 이에게 필요하다. 여행은 ‘낯 섬’과의 맞섬이고 ‘불신의 무장해제’ 이며, 정처 없는(계획되지 않은) 자신과의 조우이다. 이 ‘낯섬’과 ‘불신의 무장해제’와 ‘정처 없는 자신’의 행장을 꾸렸다고 하더라도 ‘여행’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1. 낯섬 속에 자아를 투입하기

 

젖은 손가락들이 헐거운 목장갑을 나와 노점 여자의 하루를 복기하고 있었다. 못 다 판 갈치들이 오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젓갈이 대세여서 여자의 지폐는 굶주린 참새처럼 가벼웠다. 창문 비닐이 마법양탄자처럼 날아가도 실비횟집 여주인의 가는 손가락은 쉴 새 없이 숭어의 살을 발라내고, 쓰레기 통 속의 하얀 척추들은 대가리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받치고 있었다. 갈매기는 중력을 빈 배나 모형 전투기 위에 잠시 내려놓고 쉬어갔다. 나는 선창가 엥카에 앉아 증기기관차처럼 덜컹거리며 지나가던 기억이 멈춰 설 때마다 멸치젓처럼 곰삭은 이 번 생을 향해 수도 없이 천일염을 뿌렸다. 뱃길은 점점 줄어들고 바다는 폐병 환자처럼 쿨럭쿨럭 연신 기침을 하고 있었다.

 

                              - 오강석, 「곰소에서 」 전문, 『시와 산문』2011년 겨울호

 

  이제는 누구에게나 익숙해져버린 어항의 풍경을 묘사한 시 「곰소에서」는 마치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에서 삶의 활기를 찾는다는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진부한 도 道에 머물러 있지 않다. 시의 초점은 노점 여자의 대세를 놓친 잘못된 판단으로 말미암은 하루의 도로 徒勞와 인간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준 물고기들의 형편없는 죽음과 그런 풍경에 어떤 힘으로도 개입할 수 없는 화자 話者의 ‘이 번 생을 향해 수도 없이 천일염을 뿌리는’ 내면행위로 집약된다. 곰소에 가 보았다면 알 수 있으리라. 칠산 바다와 마주한 줄포 포구는 밀려드는 토사로 폐항이 된 지 오래고 곰소 또한 그런 운명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바다도, 노점여자도, 갈매기도, 여행자인 화자도 폐병환자처럼 쿨럭거릴 수밖에 없는 생生의 배후를 감춰 놓을 때 시인은 생의 배후(시의 여백)을 읽어 줄 독자들을 향해 고독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낯섬’과 동화 同化를 꿈꾸는 시법을 보여주는 시들도 있다. 김지훈의 「외달도」 ( 『시인시각』 2011년 가을호)와 같은 지면의 정순옥의 「사구 沙丘」는 대상의 의인화를 통해서 보다 친숙하게 대상에 몰입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보여 주고 있다. 이런 시의 기법은 대상과 자아의 동화를 통해서 삶의 예지나 교훈을 넌지시 암시하는 기능을 수반하기도 할 것이지만 그만큼 상투적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야 하는 고투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무너져 내리기만 할 거라던 고것들이/ 발끝까지 힘을 모아 서로 겯고 결으면/ 그 어깨 띠 그늘에서 또 얼마나 많은 / 새 생명들 품어낼 수 있을 지를( 「사구 沙丘」4연 부분)’이나 '외달도를 데려왔다/ 목포에서 여객선을 타고 들어가 담아 온/외달도를 데려와 집안에 풀어놓았다/ 집안이 온통 해초로 넘쳐났다( 「외달도」 첫 부분)'와 같은 빛나는 활달함이 시인의 내성 內省과 삼투되었을 때만이 시의 진정성이 강화될 수 있다는 기대를 덧붙여 두고 싶은 것이다.

 

2. 추억의 환기와 순정 純正에로의 회귀

 

‘낯섬’과의 대면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순정한 감정의 복구가 여행이라는 제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김현지의 「청보리 축제」(『계절문학』 2011년 가을호나 이영춘의 「가을, 철암역」(『계절문학』 2011년 가을호)등이 바로 그 예들이다. 「청보리 축제」는 가파도,「가을, 철암역」은 강원도 철암역의 현재의 풍경을 통하여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고향과 순정한 자의식의 회복을 노래한다. 철암은 저 80년대의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이전에는 석탄 산지로서 풍요를 누리던 곳이다. 그 영화 榮華 뒤에는 탄광매몰사고, 진폐증과 같은 공해에 희생된 광부들, 황폐에 빠진 자연 등이 도사리고 있다. 탄광에서 돌아오는 아버지가 타고 오는 기차도, 기다리는 열 세 살 소녀도 보이지 않는 철암역사의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통해서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투영한다. ‘지금은 돌아올 사람도 돌아갈 사람도 없는 저 텅 빈 역사,/ 망명정부 같은 조국의 한 변방에서/ 긴 목울음 울고 있는 검은 새 떼들, 빙빙 원 그리며/ 적막이 내리는 하늘을 지키고 있구나 ( 「가을, 철암역」마지막 연)와 같은 묘사는 오늘의 삶을 환기하는 에스프리를 들려주고 있다. 이와는 달리 김현지의 「청보리 축제」는 추억의 환기라는 측면에서는 이영춘과 같은 시법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영춘의 「가을, 철암역」이 사라짐의 복기에 기울어 있다면 추억의 재생에 힘이 실려 있다. ‘오월의 가파도에서/ 잃었던 고향을 보네 ...(중략)... 윤사월 기나긴 보릿고개 넘어/ 보리타작에 몸 겨웁던 타작마당이 달려온다/ 유월의 뜨거운 불볕아래 /익어 익어 서러운 허기 虛氣로 씹히던 꽁보리밥 한 덩이,/ 삐걱거리던 고향집 툇마루가 달려온다 ..(하략)’. 와 같이 과거와 현실의 일치를 환상한다. 이제 어디서 푸른 기차의 힘찬 울음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어디서 초록물결 넘실대는 청보리 밭을 볼 수 있을 것인가! ‘풋바심 같이 덜 여문 내 어린 시 詩’ ( 「청보리 축제」마지막 부분)‘누군가를 기다리듯 혹은 먼 이방의 한 쪽 문을 그리워하는’(「가을, 철암역』 2연 부분) 순정 純情을 지닌 사람을 우리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 것 인가? 이 시인들과 시대의 정서를 같이하는 독자들에게 이런 시들은 무량한 추억의 발걸음을 내딛게 할 것이다. 덧붙여 희망하건대 이와 같은 시들이 전 세대에 걸친 감동의 폭을 넓히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리드미컬하면서도 탐미적 아포리즘이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3. 정처 없는 자아의 각성

 

  여행은 각질화된 일상에서의 탈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의 도피는 아니다. 그러 의미에서 여행은 ‘여기서 저기로’의 공간이동 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이곳으로’의 즉 자아의 탐색 또한 여행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방인」의 ‘뫼르쏘’처럼, 「구토」의 ‘로깡뎅’처럼 어느날 갑자기 낯 선 자기를 만날 때의 당혹감은 오늘날의 좀비의식과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이창수의 시 「보성」( 『시와 시학』 2011년 가을호)은 시에서의 필수항목인 메타포어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철저히 산문으로 읽어도 너끈할 만큼 쾌속감을 느낄 수도 있다. 산문형의 두 연으로 나뉘어진 이 시의 첫 연은 뛰어가다가, 지방에서 올라온다는 이유로 고속터미널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는 사연이 나열되어 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그렇다고 시의 화자 話者가 인상이 험상궂다거나 의심스런 행동을 한다거나 위험해 보이는 물건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불심검문을 당했으되 그 이유는 공무상 비밀이라는 이유로 밝혀주지 않는다. 햇빛을 가렸다는 이유로 권총을 발사하는 뫼르쏘나 갑자기 생경해진 자신에게 향해 구토를 하는 로깡뎅으로, 인상 좋은 형사들은 화자를 지목할 뿐이다. 소설 「러닝타임」의 좀비처럼 형사들에게는 범인 犯人이 될 가능성이 있으면 그 누구에게도 가해 加害하면 그 뿐인 것이다. 약속 시간이 늦어서 뛰어가는 일도, 지방에 수업 갔다가 고속버스를 타고 되돌아오는 일도 힘을 가진 자들의 자의적 해석에 의하면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 시의 2연을 몇 줄 읽어보기로 하자.

 

고향 보성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흉기를 들고 다닌다/ 올해 팔순인 아버지도/ 밖을 나가실 때면 삽 괭이 낫을 들고 다닌다/ 옆집 할머니도 부엌칼이나 낫으로 무장하고 들녘을 돌아다닌다 ...(중략)... 이렇게 중무장을 하고 다니는 우리 고향에서도 불심검문은 없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대량살상이 벌어지지도 않는다/ 강남에만 나가면 나는 불심검문을 받는다

 

                                             - 이창수의 시 「보성」( 『시와 시학』 2011년 가을호)

 

   엄밀히 말하면 이 시는 ‘여행’을 중심 주제로 놓은 이 글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삶은 통과나 경유만이 보장될 뿐 뿌리 깊은 정착은 애시당초 꿈꾸지도 않는다. 다시 말하면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의 삶은 낯설고 추억이 거세된 불모지대에 놓여있음으로 우리는 낭만적 여행의 도식에서 벗어난 유쾌하지 않고 불안한 불심검문이 횡행하는 퇴행의 여행을 하고 있다는 인식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필자의 견강부회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한 마디로 시 「보성」은 부의 상징인 ‘강남’과 상대적으로 그 강남을 경유해야 하는 가지지 못한 자의 불편함을 야유하는 시이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담은 높아지고 의심은 커진다. 그들의 불안한 눈은 그들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모두 흉기 凶器나 범죄자로 보이는 병에 걸려 있다는 빈정거림을 내뱉는다. 이와 대비되는 ‘보성’은 바다를 끼고 있는 농어촌이다. ‘보성’이라고 해서 부자가 없을 것이며, 범죄자가 없을 것인가? 그러나 ‘ 보성’은 우리가 잃어버린 농경사회의 원형이며, 인간됨의 전범이다. 이 시는 현대 자본사회의 패러디이며 한 편의 우화 寓話이다. 지겨운 노동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농경의 삶이 지니고 있는 마음의 씀씀이는 유목민으로 살고 있는 우리들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가치가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시 「보성」은 마음으로의 여행을 간절히 희망하는 외침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기계적 인식과 쳇바퀴 도는 삶의 모습이 광화문 흥국생명 앞에 있다. *“망치질 하는 저 철골의 사내”를 흘낏 지나치며 강철이 되기까지의 긴 시간과 여정을 잠시 생각하다 버린다.

 

 

* 조나단 브룹스키'의 조각품 「해머링 맨」 높이 22미터, 무게 50톤이다.

 

   이 글은 계간 『시와 산문』 2011년 겨울호 계간평으로 게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