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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녹색 시를 위한 반성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8. 30. 21:30

녹색 시를 위한 반성 / 나호열

 


몇 달 전인가, 평론과 시를 쓰는 젊은 교수가 녹색 시에 대해서 한 마디 말을 거들었다. 요즈음 세태가 환경이니 생태니 하면서 많이들 떠들어대는데, 그게 영 실속이 없다는 요지였다. 녹색이 뭐냐? 그것 또한 인간의 오만한 주관에서 비롯된 것. 아니 어느 동물이, 심지어 제 몸에 돋아난 이파리 색깔이 녹색인지 아는 식물이 있기라도 한 것이냐? 정말 자연의 비의를 체득한 사람이라면 그 따위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이십 년 전쯤에는 대학에도 환경보호학과가 버젓이 신설 학과로 이름을 걸더니 어느 사이인가 간판을 슬그머니 다른 이름으로 바꿔치기 한 것을 보면 그 젊은 교수의 말에 독만 서려있는 것은 아닐 듯싶다.
 
우리가 알다시피 환경 또는 생태문학은 독일에서 태동되었다. 이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라인 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독일인들은 그들이 핍박한 자연이 어떻게 인간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인지를 체험한 최초의 인류인지 모른다. 그들은 공업지대에서 배출되는 각종 오염물질이 그들이 자랑하던 흑림을 어떻게 초토화하는지를 똑똑하게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인간이 자연의 혜택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들이 누렸던 안락함과 소비적 욕망을 축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급격한 산업화가 남긴 자연 파괴에 대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와 절연할 수 없는 딜레마에 깊이 빠져 있다. 우리에게도 환경과 생태에 대한 예지력과 비판의식을 지닌 시인, 작가들이 있다. 그들의 외침, 그들의 비명, 그들의 절규는 돌림병처럼 번져서 글 좀 쓴다 하는 사람들은 앞다퉈 자연을 찬미하거나 오늘날의 문명을 고발하는 글들을 토해내고 있는 중이다. 한 때를 풍미했던 민족의 통일과 평화를 외쳐대던 울림이 바람이 지나가자 공허한 매너리즘에 빠졌던 것처럼 우리의 화두인 생태와 환경 또한 빛바랜 유행으로 내몰릴 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렇다고 자연에 대한 환경론적 접근이나 생태학적 담론이 무용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자연이 갖고 있는 생명력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외경심이 어떻게 발현되고 어떻게 완성되어야 하는가 하는 과정을 보여주어야 하는 임무가 우리 시인, 작가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최근에 들어 우리 주변에서 아카시아 나무를 보기 힘들어졌다. 왕성한 번식력과 별로 우리에게 유용하지 않은 까닭에 미련없이 베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카시아 나무는 반세기 정도가 지나면 척박한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주고 제 자리를 참나무와 같은 다른 수종樹種에게 내어준다는 사실이 연구결과 밝혀졌다.
노자老子가 설파했던 무위無爲를 어떻게 자본주의가 판치는 이 세상에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체득 할 수는 없어도 자연이 내려주는 무언의 지혜를 배울 수는 있지 않을까?

아마도 현생에서는 그런 내공이 한갓 꿈일지도 모른다. 

  
  
<<시와 녹색>>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