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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송자의 시 - 신체의 소멸과 혈연의 해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0. 25. 22:12

 

신체의 소멸과 혈연의 해체

 

나호열 (시인, 문화평론가)

 

 

1. 이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 존재에 대한 일반적인 성찰은 정신과 신체의 이분법적 구성으로 이루어진다. 이 이분법적 발상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을 규정하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인 이성은 그 근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상반된 철학적 견해, 즉 데카르트Descartes적 사고와 로크 Locke적 사고로 나뉘어진다. 의학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성은 신체의 생리적 매커니즘의 작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이성작용을 작동하게 하는 힘에 대한 불가사의한 의문에 봉착하고 만다. 그래서 인간 존재의 규명에 있어서 선천적 이성을 기획한 절대자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은 형이상학에 불가피하게 발을 내딛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임송자의 시를 읽기 전에 이런 전제를 붙이는 까닭은 임송자의 다섯 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일관된 주제가 신체의 소멸에 대응하는 정신의 각성 또는 아픈 흔들림에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라는 존재의 근거가 부모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혈연의식이라는 영역이 어느새 삶 그 자체에 엉겨붙는 양상으로 치닫는 까닭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의 해체가 임송자의 시편의 이면을 형성하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달리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미처 대비하기 전에 닥쳐온 고령화 사회의 문제와 가족의 해체가 임송자 시의 모티브가 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나타났던 ‘군중 속의 고독’은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면전에 다가온 괴물이라는 의식이 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2. 부권의 몰락과 정신의 해방

 

시 『관계』는 권위를 지닌 존재로서의 ‘아버지’가 위엄과 힘의 원천이라는 점에서는 타도해야할 대상이지만 약자弱者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버팀목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위안이 되기도 하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억압의 주체로서의 아버지와 보호자로서의 아버지가 갖는 중층 구조는 한 마디로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 단지 가족 간에 형성된 부자 父子간에 작동하는 모순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만큼 증오한다’는 역설에 대한 해답은 무엇일까? 시 속에서 아버지는 자식에게 한껏 부드럽게 말한다

 

(자, 일으켜보자 외롭지 않도록 네 포기씩 어울러/ 꼭꼭 묶어 주어라, 사알살 구슬러 가슴으로 안아 세워야 한다아)

 

그러나 인용문에 보이는 이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잠언과도 같은 부드러운 권유가 부드럽고 자애로운 교훈으로만 받아들여졌을까? 아마도 철이 안든 어린 자식에게는 노동의 강요일 수도 있을 것이다. 힘들여 지은 일 년 농사가 파탄지경에 이르렀을 때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는 일은 가족 모두의 업이 될 터이지만 그 권유를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네 포기씩 어울러....사알살 구슬러 가슴으로 안아 세워야 하는 일’이 즐거운 놀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의미가 가슴에 각인되기 위해서는 무수한 시간의 흐름과 힘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쇠락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쓰러진 나락을 일으키는 동안

얼마나 많이 나를 일으켰을까, 아버지

그래요, 나는

아버지 가슴에 몰래 집짓는 들쥐이거나

바람에 넘어진 벼 같은 것이였어요

- 시 「관계」 부분

 

임송자가 해독하고 있는 가족사와 거시적 현대사의 교묘한 얽힘은 짐짓 잊고 살았던 관계의 의미를 아프게 기억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되돌아 보면 우리가 염원했던 민주화와 자유의 획득은 권위를 무장해제 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빚어내는 한편 아버지로 상징되는 삶의 전범마저 소멸시키는 예상하지 못한 난국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역사의 필연적 발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겠지만 시간에 굴복하면서 힘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본다는 것은 정신적 성숙인 동시에 종속적 입장에서 서 있는 혈연의 슬픔이기도 할 것이다.

 

3. 생태론적 관점에서의 모성의 탐색

 

시 「은사시나무」는 많은 시인들이 노래하고 경탄과 비탄을 공식화했던 ‘어머니’를 주제로 하고 있다. 어머니를 소재로 한 시들이 보편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내용은 희생, 헌신, 효孝에 대한 아쉬움 등으로 쉽게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왠만한 공력이 아니고서는 시적 성취를 이뤄낼 수 없는 소재가 어머니이며 그 소재가 함유하고 있는 모성의 거룩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사시나무」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음에 그 의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농경사회에 있어서의 대가족제도는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핵가족화 되었고, 삼강오륜이니, 효친 사상은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 허접한 것이 되어 버렸다. 도시화된 우리의 일상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황급히 병원 응급실을 거쳐 영안실로 운구되는 이상한 의식에 물들게 되고, 경제적 이유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이산 離散의 가족들은 혈연의 의미를 곱씹어보기도 전에 갈등을 봉합하는 수순으로 병든 부모를 요양시설로 내보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령화 사회는 급증하는 치매와 같은 노인성 질병을 끌어안은 채 산업화 사회의 치명적인 가족 간의 갈등과 경제적 손실을 야기 시키고, 이산의 행태 또한 그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는 아무렇지도 않는 보편적 관습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움의 잎자루가 너무 길어서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 참다가

목자루가 턱없이 길어져서는

목도 못 가누시는 은사시나무

 

어머니

 

- 시 「은사시나무」 마지막 연

 

그런 까닭인지 「은사시나무」의 화자 話者의 태도는 냉정하다. 은사시나무로 비유된 어머니는 ‘봄봄 요양원’에서 자식들을 그리워한다. 이 그리워함의 응답이 시의 마지막에 응축되어 있는 바 마지막의 외마디 ‘어머니’에는 느낌표나 말없음표나 기타의 수식어가 붙어있지 않다. 독자들이여! 마지막 어머니를 어떻게 읽고 있는가? 한 마디로 이 마지막 행의 어머니는 판단유보의 상태, 울음을 꿀꺽 목적으로 집어 삼키고 내뱉는 자괴의 한 마디가 아닐지 모르겠다. 울울한 금강송 같기 바랐던 어머니는 간 데 없고 은사시 나무처럼 볼 품 없어진 어머니는 화자의 이성 속에서 ‘항상’이 아니라 ‘불현듯’ 생각나는 존재인 것이다. 이 ‘불현듯’이라는 단어 하나가, 숨기고 싶은 치부를 드러내어야 하는 부끄러움으로 읽히는 것은 다만 필자의 오독일 뿐일까?

 

아버지가 권위로 상징되는 줄기라면 어머니는 그 기둥이 서기 위한 땅 밑의 뿌리와도 같은 존재이다. 권위를 밀어내면서도 그 권위를 악착같이 물고 늘어진 뿌리와 같은 존재. 생명의 근원인 그 어머니도 시간의 흐름에 내 맡겨진 신체의 소멸을 거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적 계승자인 자식은 타자화된 부모의 신체로부터 자신의 운명을 감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모나드 monad의 운명

 

라이프니쯔 Leibniz는 예정조화설을 주장하면서 인간 존재를 ‘창 없는 모나드’로 정의했다. ‘창 없는 단자’인 개인은 신神의 계획에 따라 서로 부딪침 없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각각의 소명에 따라 생명을 영위하다가 소멸한다. 그러나 ‘~ 답다’라는 언명은 이성적 사유에 의한 논리와 수행의 결과라기보다는 본능적 행위에 영향을 받기가 쉬울 것이다. ‘~ 답다’의 전범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아버지를 추방하고 어머니를 망각했다. 우리의 정신을 억누르던 권위로부터 해방되면서 동시에 생명의 근원인 모성을 유기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휘황찬란한 현대문명은 아이로니컬하게 신체의 아픈 부딪침을 통해서 살아있음 -존재-를 각성하고자 하는 몸부림을 증언하고 있다. 굳건해야 할 이성은 간 곳 없고 흔들려야만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그 상태는 이성의 너머에 있는 불가해한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논리와 이성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우리는 급기야 이성의 해체, 다시 말해서 확정된 불변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암울한 현실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임송자의 시편 중에서 「모빌처럼」은 이성의 해체에서 파생되는, 불가피하다고 스스로 염력을 불어넣은 혈연과의 단절이 가져오는 고독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흔들리는 것이 내 삶의 전부입니다

멈춰진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요

누군가 건드려주기만 한다면

내 목숨은 영원할 것이며

부딪혀 우는 울음 읽을 줄 아는

당신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 나는 알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 서너 정거장 좀 안 되는 거리쯤에

밤만 되면 휘황해지는 창문들이 있다, 즐비하다

거기, 모빌들이 살고 있다 -

 

- 시 「모빌처럼」 전문

 

모빌처럼 누가 흔들어주지 않으면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는 밤만 되면 휘황해지는 창문 안에서 아버지를 버린 남자와 어머니를 버린 여자로 은밀한 관계 - 타자를 통해 자신이 존재를 인식하는 - 의식을 치루고 있다. 누가 이들을 단죄할 것인가? 이성을 버린 대가로 우리가 얻은 post(벗어나기 脫, 넘어서기 beyond, ~후에 after)의 저주를 누가 풀 수 있을 것인가?

 

5. 융합, 새로운 관계의 지평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관계와 혈연의 해체가 우리 삶의 장밋빛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맥없이 더욱 쓸쓸해져서/ 어느 방면으로든 포개지고 싶었던거다(「가을 연지에 와서」 부분)”과 같은 의식에 도달한다. 도저히 인간은 ‘창 없는 모나드’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섞이고 제 몸을 던지면서, 타자의 거울을 통해서야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천형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못을 따라 둥글게 걸어보는 일”은 갇힘의 경계 그 외곽에서, 갇혀있는 이성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제의의식이다.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를 명석 판명한 주체로 삼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성을 해체하는, 대상으로서의 나를 의식하는 주체적인 자아를 소거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시인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상관없이 우리는 빛나는 성과 하나를 만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떠올렸던 권위와 생명과 식간과 이성의 해체가 빚어냈던 소멸의식이 새로운 인간의 삶의 양식으로 찬연히 떠오르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시 「젓갈」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함축하는 명편이라고 받아들이고 싶다. 시간 앞에 허물어지는 모든 몸들은 썩게 마련이지만 ‘짓무른 몸둥어리가/ 성자처럼 깊다’는 깨달음은 영원히 썩지 않는다. 천 개의 개울물은 각기 소리 내어 흐르며 타자화 되기 전의 자아를 움켜쥐려 하지만 거대한 강을 이룰 때 자아를 버리고 버린 만큼 깊어지며 말을 버린다. 그래서 ‘깊어진 것 들은 조용하다’는 시인의 깨달음은 자아와 타자의 단순한 융합이 아니라. 자아와 타자를 젓갈처럼 함께 삭아내리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 짧은 글에서 시인이 운용하고 있는 시적 기법을 살펴보지 못함이 아쉽기는 하지만 임송자의 시편들은 보편적 정서를 개별화 시키고 그 개별적 주제를 하나의 의식으로 묶어내는 능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한 마디로 서정과 현실의 간극을 유지하면서 감상 感傷에 빠지지 않는 냉정한 시각을 삼투시키는 묘한 매력을 충분히 발산하고 있다.

 

은사시나무 /임송자

소광리 그 잘 생겼다는

금강송을 만나러 갔더랬지요

세월교洗越橋를 열두 번이나 건너야만 만날 수 있다는

그 숲 소나무, 삼삼한 몸매에 그만 눈이 맞아

접 붙고 싶은 마음 간절했더랬지요

언제부터인가 가슴께에 터 잡은 그리움의 얼룩같은 것

낡은 속옷처럼 부끄럽기도한데

배어 나온 그 얼룩 몰래 훔쳐내며 산기슭 오르는데

다른 나무들 다 묵묵한데

혼자서 파들파들 떨어대는 나무 한 그루, 아니 팔랑팔랑이던가

저기, 저, 사시나무 떨 듯 하는 저 나무, 이름이 뭐래요

- 사시나무 아니겄소, 은사시나무 -

엄살을 떠는건지 앙탈을 부리는건지

은사시나무를 한참이나 바라다보고 있었는데요

불현 듯, 합천 가야산 자락 아래 봄봄 요양원

거기, 누워있는 검버섯 송송 핀 하얀 수피를 가진

은사시나무 한 그루가 생각났더랬지요

내 눈을 만나러 올 때 파르르 떨고

내 손을 잡으러 올 때도 파르르 파륵

더디게 건너오는 웃음도 파르르 피익

그리움의 잎자루가 너무 길어서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말 참다가

목자루가 턱없이 길어져서는

목도 못 가누시는 은사시나무

어머니

관계

마을이 술렁인다

바람이 덮치고 간 벼논 앞에서 강간을 생각했다

당하는 것에도 질서가 있는걸까

반항의 흔적없이 일제히 드러누운 몸

그 사이

바람은 알을 슬었나

정자꼬리 같은 싹이 났다

과년한 딸 상한 맘 보듯

아버지 논둑을 서성이고

혼돈처럼 들쥐집이 들어섰다

(자, 일으켜보자 외롭지 않도록 네 포기씩 어울러

꼭꼭 묶어 주어라, 사알살 구슬러 가슴으로 안아 세워야 한다아)

내가 쓰러진 나락을 일으키는 동안

얼마나 많이 나를 일으켰을까, 아버지

그래요, 나는

아버지 가슴에 몰래 집짓는 들쥐이거나

바람에 넘어진 벼 같은 것이였어요

편육처럼 얇아진

농주사발 속에 폭 담긴 저 얼굴 아래로

고름처럼 떨어지는 나머지 세월

새. 참. 술.

젓갈

공허하고 비참한 것들끼리 몸을 비비는 소래포구

내 나이보다 오래 삭았을

짓무른 몸둥어리가

성자처럼 깊다

生은 육체라고 말했던가

삶의 바깥에서

삶의 안쪽에서

깜냥껏 짜게 살아

형식도 없이 짜부러진 존재들

깊어진 것들은 조용하다

가을 연지蓮池에 와서

맥없이 쓸쓸해져서

뭐 새로운 걸 덧대고 싶기도

볕바른 곳에 나가 헤진 꿈을 꿰메고 싶기도해서

못을 따라 둥글게 걸어보는 참이다

꼭 껴안고 흐르지 않는 물

흐를 수도 없는 물

그 속으로 계절이 다발로 부서지는데

고꾸라지기도 하는 것인데

나는, 맥없이 더욱 쓸쓸해져서

어느 방면으로든 포개지고 싶었던거다

실없이 턱을 괴고 앉아

그럴듯한 명분을 떠 오고 싶은거다

슬픔도 구부릴 줄 아는 사람 있다 했던가

저물어 가는 일이

시들어 가는 일이

저만하면 됐지, 뭐

그 날 저녁

서녘 노을도 한 잔 했다던가

모빌처럼

흔들리는 것이 내 삶의 전부입니다

멈춰진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요

누군가 건드려주기만 한다면

내 목숨은 영원할 것이며

부딪혀 우는 울음 읽을 줄 아는

당신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 나는 알고 있다 우리 동네에서 서너 정거장 좀 안 되는 거리쯤에

밤만 되면 휘황해지는 창문들이 있다, 즐비하다

거기, 모빌들이 살고 있다 -

임송자

월간 <문학공간>으로 등단. 작가회의 회원, 한국문인협회 인천지회 회원. <문화부평> 편집위원. 야생화신문 편집위원. 시집 『그날이 어제처럼 지나간 즈음』『이제 그 슬픔에 기대어』 외.

 

 

  * 이 글은 <<산림문학>> 2011년 가을호에 게제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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