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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파격 破格의 맛과 멋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5. 23. 00:50

 

 

 

파격 破格의 맛과 멋

 

나호열

 

독한 세상이다. 죽기 위해 싸우는 검투사의 신음과 그 죽음을 감상하는 관중들의 비열한 아우성이 가득한 세상이다. 언제부터인가 단 한 사람의 생존을 기다리는 살벌한 서바이벌 게임이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제 은밀한 관음 觀淫이 아니라 대놓고 피 튀기는 싸움을 게임 game 이라고 바꿔치기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다. 반전 反轉과 전복 顚覆은 더 이상 극적인 삶의 증명이 아니라 공기와 같이 무의식으로 섭취하는 캡슐 종합비타민과 같다. 입 안을 개운하게 하기 위하여 씹는 검 gum에게는 발언권이 없다. 우리는 서로를 이렇게 버리고 잊는다. 그래서 해체는 허무를 물어뜯고 허무는 해체를 해체한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에 반응하고 응전하는 시인이란 존재는 검투사인가? 아니면 원형 경기장을 가득 메운 비열한 관중인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검 gum의 공손한 자세로 독자에게 온 몸을 맡겨야 하는 존재인가? 이런 우문에 현답이 있을 수도 없겠지만 굳이 오답이라도 우물거릴 요량이라면 시인은 검투사도, 관중도 아닌 검 gum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어진다. 이렇게 스스로 자초한 열세에 놓인 시인은 그의 분신인 시가 공고한 정형에서 멀어질수록 어쩌면 매저키즘 masochism 의 희열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에 빠질지도 모른다. 반어와 역설은 이런 유혹을 한껏 드러내고 그만큼 감추는데 유용한 심리작용이다. 우리의 삶은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쾌락과 고통 등의 이분법적 게임법칙을 심리의 배설을 보다 용이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뒤틀어버렸다. 더 이상 강상윤리는 우리를 제어하지 못한다.

 

김지유는 「즐거운 랄라!」 , 「살 찌는 반찬값」(『시와 산문』 2011년 봄호)을 통해서 허위와 무위가 뒤엉켜버린 삶과 그 가치에 대해서 되묻고 있다. ‘랄라’는 소설 『닥터 지바고』 에 등장하는, 무참히 순결성을 잃게 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던가? 그런 랄라는 고상한 시인의 정형을 버리고 외제차를 타고 거짓말을 몰고 다니는 선배 시인의 애정행각에 동참하면서 스스로 희화화되는 과정을 과감하게 발언하고 있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시인과 거짓말 몰고 다니는 시인에게 진정성이란 무엇일까 잠깐 고민한 후배는 감히 문학상 대신 거위 모양의 모텔을 짓는 것으로 꿈을 바꿉니다 황금알을 낳는 장사는 현금 장사가 최고라며, 즐거운 랄라! 시와 시인은 달라도 된다고, 훌쩍이며 랄라! 우는 밤입니다

 

                                                                                                                - 「즐거운 랄라!」마지막 부분

 

시는 시일 뿐이므로 혈압을 올리는 것은 점잖치 한 행동일 터, 시와 시인은 달라도 된다고 하는 발언에 우리는 무엇이든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우울한 그림자를 보게되는 것은 실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살찌는 반찬값」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앞산을 남편이다 주문 걸어 밟고 오르는 것이 취미였다가 네팔의 히말라야 등정이 다음 생의 꿈이 되어버린 앞집 아주머니’가 ‘한 달 반찬값으로 팔십일만원짜리 네파 점퍼를 사는’ 여성존중시대를 넘어 바야흐로 여성상위시대로 진입해 들어가는 요즘의 세태를 희화하는 파격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김지유가 감행하는 파격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동의해 왔던 시에서의 리듬, 압축, 형상화마저 거부할 수 밖에 없는 함정이 놓여 있음은 분명하다. 그 함정은 시의 ‘이야기성’에 있을 것인데 이야기 자체가 파격일 경우에는 함정을 피해갈 수 없는 방도가 없음은 두고두고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와 같은 문제는 그 이야기 자체가 진정성을 담고 있는 까닭에 생략과 압축의 기법을 도저히 사용할 수 밖에 없을 때 야기되는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나문석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술」( 『시에』 2011년 봄호) 은 이야기에 충실한 시이지만 김지유의 시와는 달리 정형적 연 구분을 하고 있다. 시의 전문을 읽어보면 시인이 의도하는 바의 세상의 부조리가 확연하게 드러나면서 동병상련의 아픔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훌륭한 코메디언은 우스개소리로 관중을 울리는 사람인 법!

 

인쇄공 이씨는

한 방울의 술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인데

지난밤 음주단속으로 한바탕

고역을 치렀단다

 

인쇄를 하는데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공업용 알콜인데

하루종일 일하다 보면 코로만 들이킨

알콜지수가 소주 반 병이 넘게 된단다

 

제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걸 알아주지 않는 경찰관이

에프엠 같은 음주측정기에만 믿음을 걸고

끝끝내 술 마시고 오리발 내미는

못된 놈으로까지 치부를 하더란다

 

피를 토하듯이 억울한 사연 꺼내놓고

분을 삭이지 못한 그가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세상이 온통 어질어질 빙빙 돈다며

코를 박고 쓰러졌다

세상에나 어쩌면 이렇게 슬픈 술

 

                                              - 「세상에서 가장 슬픈 술」 전문

 

이렇게 가치가 전도되는 세상의 근저에는 허상(이미지)의 무한복사가 가능한 우리의 뇌기능과 끝간데 모르게 확장되는 욕망의 교묘한 야합이 있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CCTV가 이제는 우리의 행동을 감시하는 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과 같이,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경계를 애매하게 허물어뜨리는 자본주의에 단맛에 우리 스스로 중독되어 버리는 것과 같이, 과학의 힘을 믿으면서 나의 오늘을 내일의 운세에 맡겨버리는 그 당당함과 같이 자아의 실종에 대해 우리는 다만 다음과 같은 행동으로 대변할 뿐이다.

 

여보 나왔어!

아내는 내가 올 때까지 잠들지 않는다 나보다 늦게 잠들고 나보다 일찍 일어나는 아내는 고운 화장차림이다 아내의 큰 눈엔 서슬푸른 악의 따윈 없다 늘 바쁜 나는 그녀와 놀아줄 시간이 없어 미안하지만 버릇 나빠질까봐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다 잘 웃고 잘 참는 아내가 아침밥을 차려놓고 나를 부른다 아이 러브 유, 아이 러브 유! 휴대폰과 차 키를 챙겨 주더니 앵무새처럼 목에 감긴다 이런 아내를 두고 현관문을 나설 때 나는 힘이 난다 이번 출장은 길어질지 모르는데..말을 하려다가 그냥 Esc를 눌러버린다

 

화면에서 사라진 아내, 목이 잠긴다

 

                                                           -  고경숙, 「사이버아내」 전문( 「다시올문학」 2011년 봄호)

 

‘사이버 아내’와 같은 과잉실재 hyper-reality에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삶의 연속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탄생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섬찟한 증언은, 그렇지만 고경숙의 증언이 얼만큼의 충격과 반성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설 수 있을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발명품이 인간을 노예화하고 한갓 동물로 전락 시킬 수 있다는 경고를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래서 니콜라스 카 Nicholas Carr가 말 한 바, 위대한 인간의 발명품인 인터넷이 인간의 사고방식과 뇌구조까지 바꿔놓고 있다는 주장에 조심스럽게 귀를 열 때가 되었다는 것!

 

김지유와 나문석과 고경숙의 비껴가는 시와 다른 파격을 보여주는 시로는 박상율의 「죽일년 살릴 년」 (『시에』2011년 봄호)를 들 수 있다. 박상율은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말놀음 fun으로 환치하여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 테면 송구영신을 ‘ 이년 가니 저 년 오는 세밑 저녁’으로 바꾸어 놓으므로서 중의 重義의 효과를 노리면서 시간의 무상과 대결하는 인간의 의지를 표명하는데 색다른 파격이 분출되는 것이다.

 

묵은 해니 새해니 따질 것도 없는 살림이지만

구년 가고 신년 오는 그 사이

죽일 년 살릴 년 운명을 가르는 나의 연례행사

 

                                                                - 「죽일년 살릴 년」마지막 연

 

정병근의 「구두닦이와 택시기사와」(『시와 시학』 2011년 봄호)는 파격을 역설로 풀어낸 시이다. 구두를 닦는다고, 택시를, 식당을 30년 한다고 - 서당개 3년 이면 풍월을 읊는다고는 하지만 - 반 점쟁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한 마디로 “ 각자가걷는 길을 달라 보여도 인생은 모두 한 길을 가는 것이다”. 넓게 말하면 존재의 평등을 에둘러 말하는 것으로 앞 세상을 예견하는 밝은 눈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30년 정도 하다 보면,

구두를 닦거나 택시를 몰거나

식당 주인도 반 점쟁이쯤은 된다

닳은 구두 굽만 보고도 몸 속의 옹이를 꿰뚫는다

표정만 봐도 어디로 갈지 뭘 먹을지

어렴풋이 살아 본 것 같은 전생 前生이 보인다

그냥, 척 보면 아는 것이다

과거를 들킨 어떤 사람은

얼굴 붉히며 마음 상할 일 없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헛살았다고

뒤늦게 후회할 필요는 없다

뿔뿔이 다른 길을 가는 것 같지만

부지런히 도달하다 보면 그게 한길인 것이다

끝장에는, 만나는 것이다

 

파격은 현실의 허위성과 자학, 일탈에서 빚어진다. 그렇지만 가치와 제도의 전복이 파격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넘어서고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줄 때 진정한 시의 미학, 파격의 완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윤의섭의 「굴뚝의 연기」 ( 『시와 정신』2011년 봄호)는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의 유한성과 죽음이라는 소재를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의지에 견강부회하지 않고 단지 생명 하나의 탄생과 죽음에 이 모든 우주가 관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화장장의 을씨년한 풍경이 허무하지만 괴롭지 않은 까닭은 시적 화자(시인)가 지나치리만큼 감정의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굴뚝의 연기

 

윤의섭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는 구름보다 희지만 구름은 아니다

바람에 휩쓸려 쉽게 흘러가도 바람이 되진 못한다

그러나 저렇게 잊히려면

갈곳 없이 잠시 떠나니다 사라지는 섬이 되려면

연기가 빠져나온 밑뿌리에선 강철이 녹아야 한다

석탄이 달궈지고 선삭시대가 지펴져야 한다

한 사람이 탄다

어두운 굴뚝을 헤집고 나와

너무나 가벼워진 기억에 슬플 겨를도 없이

초저녁에 뜬 달의 해변을 스쳐간다

두 번째 죽음은 광막한 하늘에 뿌려진 분골처럼 흩어지는 것이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영원보다 빠르게 흩어지는 하늘의 매장

 

 

한 편의 시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독자들이 씹다 버린 검의 단맛 빠지는 시간만큼일까? 마음 편하게 독자라는 굴뚝을 빠져나오는 연기가 사라지는 그 때쯤이라고 해두자.

 

                                                                         계간 <<시와 산문>> 2011년 여름호 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