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통과한 시간의 길을 가슴에 품다
- 『반듯한 슬픔』에 붙여
나호열 ( 시인, 경희대 사회교육원 교수)
심진숙은 담양 사람이다. 담양이 어떤 곳인가. 아름다운 山水를 머금어 수많은 시인묵객이 구름처럼 흘러갔던 고장이 아닌가. 고개 들면 무등, 추월산이 우뚝하고 마음을 내려놓으면 명경明鏡 같은 호수가 그윽하여 예로부터 선비의 절개가 푸르른 대숲을 거느려 가사문학의 산실인 누정 樓亭을 곳곳에 숨겨 놓았다. 1392년 독수정 獨守亭이 남면 연천리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누정만 해도 사십 여개를 헤아릴 뿐만 아니라 지금은 흔적이 없으나 기록에 남아 있는 누정 또한 사십 여개를 꼽을 수 있으니 담양의 풍광은 더 이상의 수식이 필요 없을 것이다. 심진숙이 보여주는 시인으로서의 재능과 재담을 담양이라는 역사적, 지리적 환경과 결부시키는 것이 견강부회 牽强附會의 억지스러움일지라도 그의 시가 보여주는 유장 悠長한 수사 修辭와 풍부한 이야기는 경기체가에서 산문으로 넘어가는 조선 중기의 歌辭文學의 일면을 짐작케 하는 바가 크다.
자서에서 밝힌 대로 나이 스물에 시에 뜻을 둔 이래 이십 여 년이 지난 후에 시인이 된 이가 심진숙 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민주화 사회로 이행되어가는 마루금이 그의 생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에게는 가난과, 대가족제도의 풍경이, 그리고 80년대의 아픔이 성장의 뼈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반듯한 슬픔』은 이와 같이 내재적인 품성과 외부적인 환경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인 개인사의 기록인 동시에 일반화된 우리네 삶의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심진숙의 첫 시집 『반듯한 슬픔』시편은 신인에게 기대하는 독창성과 도발적인 풍모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복고적인 서정의 답습도 아니고, 숙명적인 여성으로서의 달관도 아니며, 역사주의적 관점으로 시작되는 사회를 향한 외침으로도 해석하기 어려운 지점에 놓여 있다.
그러나 시집 『반듯한 슬픔』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시간을 반추하는 한 개인의 토로 吐露이다. 토로라고는 하나 그냥 날 것으로 내뱉는 말이 아니라 그의 시적 발언은 감상 感傷에 치우치지 않는 곰삭힌 존재의 증명에 가 닿아 있다.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하고 허공을 떠도는 공허한 말 장난이 아니라 감각의 고통으로부터 야기된 현실적 아픔이 시간의 발효를 거쳐 뚜렷한 슬픔으로 각인되는 과정이 일관된 길로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때 『반듯한 슬픔』을 읽는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나'로부터 출발하여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 친구들, 다시 가정을 이루어 아내가 되고, 어미가 되는 횡단면과 개인의 종심을 이루는 생과 사의 축 軸을 후경 後景으로 놓고 질긴 인연이기는 하나 끝내 내치지 못하는 이웃의 의미, 좀 더 부연한다면 '자아의 세계화'라는 서정의 본령을 체득하는 시간의 인내가『반듯한 슬픔』이 보여주고자 하는 풍경인 것이다. 이 호사스럽지 않은 휴머니즘은 시에 뜻을 둔 지 20년 만에 시인이 되는 과정과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투명한 자아의 인식을 얻고자 긴 시간을 인내하며 고군분투를 마다하지 않은 근성이 자리잡고 있음을 목도한 필자는 시류에 들뜨지 않고, 성급히 앞서 나아가려 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론으로 세상을 탐구하고 탐구된 세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몸짓을 지닌 시인을 신뢰하고 싶어진다.
심진숙이 보여주는 서정을 압축하여 말한다면 건강한 허무의 발현이다. 공자가 설파한 애이불상 哀而不傷의 경지는 말처럼 쉽지 않다. 허무는 개인적 심성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나 '슬픔'과 '시간'의 숙성 없는 허무는 사치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슬픔과 그 슬픔이 익는 시간은 심진숙의 시를 넓게 펼치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과도 같다. 아픔 없는 슬픔은 없지만 슬픔 없는 아픔은 있을 법하다. 손가락을 베이면 아픔을 느끼지만 곧바로 슬픔에 가닿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슬픔에는 아픔의 여과가 필요하고 시간의 경과가 필요하다. 슬픔은 개인적 통각이지만 세상과의 불화를 야기하면서 동시에 그 불화와의 화해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슬픔은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이면서 농밀한 시간의 침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완벽한 반듯함이 때로 완벽한 무능함이기도 했던 세상,/ 저렇게 곧게 버티다가 순간에 분절되고 마는 ...(중략) 곧은 대나무의 속처럼 텅 비어있는 허무를 감지한다
- 「반듯한 슬픔」부분
'반듯함'과 '슬픔'은 어울릴 수가 없다. 슬픔의 원인은 규명할 수 있으나 완성된 슬픔의 형태가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반듯한 슬픔'은 시인이 체득한 슬픔의 정의를 가늠할 척도가 되기는 한다. 반듯하기 때문에 슬픈 것이고 구부러지지 않기 위하여 속을 텅 비운 허무가 슬픈 것이다. 이상과 현실이 맞닿을 수 없는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살아가는 내내 어디에도 봉황이 사는 산 찾을 수 없었고 「봉산다리 위에서 부분」 '- 과 같이 술회하거나 - 운명의 한 복판에 뿌리가 박힌 나무 「손금」- 처럼 운명적이고, 수정 불가능한 삶을 느끼는 순간 - 슬픔은 사과상자 속에 사과가 들어있다는 내팽겨진 존재의 확인에서 발화한다.
나는 너를
상자 속에 담아 두었는데,
너는 태양을 뚫고 나온 햇살이었고,
너는 고생대에서 불어온 바람이었으며,
너는 빙벽을 부딪고 달려온 파도였는데,
나는 너를 그 때
상자 속에 고이 담아두었는데,
데굴거리던 청춘의 시큼한 맛을
상자 속에 가둔 지 오래,
사과 한 알 속에서
햇살과 바람과 파도가 서서히 마르고 있는데,
수분이 빠져 농밀해진 단맛을
제 속에 안고,
주글주글 작아지기 시작하는
안정 속의 불안,
나는 지금 사과상자 속에 들어 있는데……
시 -「나의 슬픔은 사과상자 속에 사과가 들어있다는 사실이다」전문
햇살, 바람, 파도와 같은 활력 있는 삶의 에너지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과라는 과실로 상자에 담기고 그 속에서 익어가고 썩어가거나 타인에게 먹히는 과정을 목격하는 무력감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와 같은 풍경은 시집 곳곳에서 불쑥불쑥 튀어 나온다. 하교 길에 느닷없이 소나기가 내리거나, 머리에 새똥이 떨어지거나 컴퓨터 전원이 갑자기 꺼지거나 돌연 아버지가 쓰러지는 「불규칙 동사」,누군가 펄떡거리던 내 몸뚱아리를/ 순식간에 얼려버리더니/ 착착 포를 뜨고/ 소금간을 하네 「명태전 」, 누군가를 자기 안에 들여 앉히고/ 또 비워내는 것이/ 살아온 날들이었다는 것「내 안의 의자」등에서 보이는, 타자성이 내재된 세계로부터의 소외에 시가 매달린다면 애이불상 哀而不傷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이러한 수동 受動의 자세는 가족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조금씩 슬픔을 능동의 전면으로 몰고 나간다.
「꽃은 재봉틀 소리로 피어난다」를 읽어 보기로 하자
찬비가 내려 가슴에 숭숭 구멍이 뚫리는 저녁이면
어머니는 쉬지 않고 재봉틀을 돌리셨다
얼룩덜룩 벽지에 꽃을 피우며 찬비가 다녀간 뒤엔
나의 이불에도 어머니가 밤새 피워낸
환한 꽃들이 아침을 열곤 했다
비에 젖어 휘청이던 일기장의 글씨들도
어머니의 반듯한 박음질에 다시
곧게 일어서곤 했었는데,
혼수 이불에까지 활짝 피어나던
어머니의 꽃들이 어느덧 시들고
구멍 난 양말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다가 문득
가슴에 박히는 빗소리,
세상의 모든 꽃들은 그렇게
찬비 맞으며 태어났느니
세상의 모든 가슴은 그렇게
따가운 박음질 소리로 깊어졌느니
비 오는 날이면
나를 꿰매오는 틀질 소리,
어디선가 또 꽃이 피고 있나 보다.
오랜 습작기간을 거친 이들이 극복해야할 문제인 낯익은 정조 情調와 구도가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이 시는 『반듯한 슬픔』의 전모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퇴행적 슬픔은 시를 감상 感傷으로 이끌어가지만 타인의 슬픔을 공유화 하는 의식의 전환은 건강한 허무를 구축하는 중요한 기둥이 된다. 가족은 상처의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고 편향적인 옹호의 대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상처나 결핍에서 비롯된 증오나 편협한 가족주의에 함몰되기 쉬운 것이 다반사이므로 냉정하게 가족과의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꽃은 재봉틀 소리로 피어난다」는 가난과 어머니의 외로움을 수락하여 -아픔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 「아픔이 스며든다는 것은」이라는 깨달음을 보여주고 있다. 수행 없는 달관이 아니라 아픔을 통해 세상의 모든 꽃들은 그렇게 찬비 맞으며 태어났다는 진실을 체득함으로서 시인은 비로소 개인에서 가족으로, 가족에서 이 세상의 모든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다. 아픔을 통과하지 않는 사랑은 그리움을 가질 수 없다 시 「젖은 아침」에서 '그리움이란 언제나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란 뽑힐 수 없는 질긴 뿌리 하나쯤 제 안에 숨겨두고/ 끝없이 푸른 수액을 건져올리는 일 「그날 처럼」이기 때문이다. 회자정리 會者定離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들과 어울리고 미련없이 서로를 떠난다. 노마드 nomad의 현실 때문이기는 하지만 가족 공동체에서 이익사회로 발을 내딛기에 길은 너무도 위험하고 두렵다. 선뜻 타자에게로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타자로부터 상처받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건너가야 할 길이 육식성의 길이기 때문이다.
기나 긴 혀를 날름거리며 달려오는 저 길은 육식성이다.
첫새벽을 열던 화물차를, 조심조심 눈길 달려 통근하던 여교사를, 신혼여행 다녀오던 부부도, 수학여행 신나던 전세버스도,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로 잡아먹는다.
명절엔 길도 대목을 만나 일가족을 통째로 하루에도 몇 끼 씩 먹어치운다는 소식,
교차로에선 네 마리의 길들이 서로 먹이를 잡아먹겠다고 아우성 친 흔적, 저 흡혈의 길은 늘 피가 고프다.
길이 길을 잡아먹고 있다.
(중략 .... )
자동차에 잘 포장된 먹잇감을 키우기 위해, 늘 배가 고픈 육식성의 길이 저 순한 채식성의 길을 모조리 잡아먹고 있다.
납작하게 문드러진 들고양이 한 마리 아스팔트에 피를 뜯기고 있는 아침에
육식성의 길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적막한 창가에 앉아 꼭 다문 세상의 입술을 바라본다/ ..(중략) 내 안에는 너무나 많은 말이 쌓여 / 끝내 너에게로 가는 길이 막힌다 「첫눈 내리는 날의 적막 」에 유페된 채 시인은 끝내 이 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시인은 고압선에 가벼이 내려 앉은 참새떼를 보며 위험하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위선과 이익에 질주하는 세상을 향해 위험 하지만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려 한다. 다음과 같이 빛나는 시구가 이를 증명한다.
어떻게 알았을까
생의 중심을 관통해온 고압의 전류 위로
가장 순도 높은 이슬이 맺혀 있다는 것을
- 시 「위험」 부분
답청 踏靑이라 했던가! 꼭꼭 발로 누르고 디딘 자리에 푸르게 돋아오르는 보리처럼 심진숙의 시는 한걸음을 내딛어 이윽고 사람의 마을에 도달한다. 멀리 에둘러 온 길이지만 시인이 도달한 마을은 그가 사는 담양의 마을이다. 필자는 『반듯한 슬픔』의 진경진수는 시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5 부 '아름다운 숲에는 늙은 나무가 산다'에 숨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시인이 도달한 숲 - 마을-에는 젊음은 없고 추억을 가득 안은 늙은 나무들이 살고 있다. 필경 베어지고 말, 기어코 쓰러지고야 말 나무들은 어느새 현대에서 귀양된 소읍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그 옛날에도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담양은 유폐와 은거의 땅이다. 그 옛날의 사대부들이 권력에 몸을 기대거나 몸서리치며 시를 읊었다면 오늘의 시인은 삶의 쇠락을 증언하며 변방의 슬픔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형상이다.
하혈하는 암덩어리를 달거리로 부끄러워하던 할머니, 건망증이 심해진 나와 텅 빈 아파트를 지키는 어머니는 자율신경실종에 걸려 귀속에서 비행기 소리가 들리고, 수선가게 뚱보 아줌마는 야반도주하고, 한 번 닫히면 열릴 줄 모르는 점방들은 늘어가는데 물리치료 받으러 길게 늘어선 병원 앞의 할매들, 팔리지 않는 사과를 닦고 있는 월산댁 들은 그들로 인하여 -늙은 나무-아름다운 숲을 이룬다.
시인은 숲이 아름다운 이유를 늙어서 슬픔이 농익은 까닭이라고 인식한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서 주고 받는 이야기는 값 싼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말없이 무언으로 주고받는 눈물이라고 생각한다. 수 백 년 묵은 나무들은 이와 같이 보잘 것 없고 이름 없는 장심이사들의 합체 合體인 까닭에 변함없이 제 자리에서 제 할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나무들이 하는 일이란 무량한 그늘을 넓혀가는 일일 뿐이지만 이 세상이 그윽해지는 것은 무용 無用의 그늘이 깊기 때문이다.
소문난 마을 숲에 밀물처럼 관광객이 몰려들어도, 우리랑 무신 상관이 있나, 흙에 엎드려 씨를 뿌리는 촌로들의 굽은 등, 그늘이 깊다.
- 시 「아름다운 숲에는 늙은 나무가 산다」마지막 부분
『반듯한 슬픔』의 결어는 공식을 외어서 쓴 모범 답안이 아니다. 두꺼운 사상전집을 몇 장 읽거나 창백한 강의실에서 마지 못해 옮겨 쓴 풍화 風化되기 쉬운 기교의 전시가 아니다. 슬픔이 왜 반듯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맨발로 청춘을 보내며 정신의 렌즈를 갈고 닦은 인내의 결과이다. 지금껏 시인이 천착해 온 슬픔의 형이상학은 깊고도 맑다. 앞에서 '건강한 허무'로 『반듯한 슬픔』을 읽은 이유가 애이불상의 미학을 성취했기 때문이라고 말 한 바 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살펴본 것은 시인이 지향하는 세계에 대한 단편에 불과하다. 뼈가 부실하면 몸의 모양새가 어긋나듯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떠나는 길이 허망하듯이 수습하지 못한 정서의 파편은 마모되기 쉽다.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거푸집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내부의 장식에 힘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심진숙 시인의 시는 오래 묵은 장맛이 나고 질펀하게 깔리는 이야기 속에 가락이 숨어 있다. 이런 시심은 시를 건강하고 맛깔나게 하는 장점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장점이 곧 지양해야 할 숙제로 대두되기도 한다. 즉 시의 정수라고 말할 수 있는 여백의 미에 대해서 성찰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심진숙 시인의 시력은 자신의 의도를 능숙하게 끌고 갈 수 있는 필력 筆力을 충분히 발휘할 만 하지만 이제 첫 시집을 내면서 새로운 시법 詩法으로 세상을, 우리의 삶을, 인간을 노래해야 할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새로운 것을 손에 쥐려면 움켜쥐고 있는 그 무엇을 던져버려야 하는 법. 안주하지 않고, 자기 복제에 함몰되지 않고 창조의 두려움 앞에 우뚝 서는 것.
진심으로 『반듯한 슬픔』의 上梓를 축하드리려 하니 문득 이런 글귀가 귓가에 스치운다.
秋水文章 不染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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