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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순간을 포착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12. 23. 00:50

순간을 포착하다

                         나 호 열


12월호의 원고를 받아드니, 마침 김기택의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옵니다. 달포 전, 문학회 행사에서 그를 만나고 저녁을 함께 하고 이런저런 한 두 시간을 같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며칠 후 회기 역에서 우연히 또 한 번 그를 만났었는데, 지금 막 두메산골 어디메쯤에서 서울에 도착한 듯한 그런 어눌하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에서 시인의 풍경 한 토막을 떠올리게 됩니다. 반질반질하고 세련된, 그리고 달변으로 가득 찬 그런 풍경을 거느린 시인들은 왠지 서먹합니다. 왠지 세상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고, 수줍기도 하면서 그러면서도 세상에 대해서 깊은 호기심을 갖고 있는, 꾸역꾸역 이 세상의 풍문과 풍경들을 제 안에 집어넣고 누에가 실을 잣듯,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천천히 감정의 소화를 기다리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쓰기 위해 성급히 펜과 종이를 준비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글을 쓰겠다는 사나운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것이지요. 그 사나운 마음 속에 소용돌이치는 드러냄의 욕구와 호기심의 경련을 이겨내고 난 다음에야 글은 우리에게 찬란한 빛을 던져주는 것이 아닌지요.

 

시가 되었던 수필이 되었던 글을 쓴다는 것은 씨앗을 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말이지요. 비도 만나고, 바람도 만나고, 가뭄도 만나고 하다가 그 씨앗들은 꽃이 되기도 하고, 열매가 되기도 하고, 억새가 되기도 하고, 갈대가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글을 쓰는 즐거움이랄지, 행복이라는 것은 결코 한 손에 장악할 수 없는 자연의 전부를 글을 씀으로써 가질 수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완성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결코 완성되지 않는 것, 그래서 예술을 지고지순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좋은 글은 여운을 줍니다. 사나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후에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사유가 독자들에게 하나의 생각을 강요하고 핍박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우리의 정신 세계를 고양하는 높은 경지에 있는 성직자들을 향해서 글을 쓴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글을, 어떤 내용을 담으려고 해야 할까요? (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의 자유이므로 정답은 없습니다).

하여튼 좋은 글들은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유와 간격을 보여줍니다. 생각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思惟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지 사유의 결말을 보여주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는 아닐 것입니다.  

 


   

눈이 피곤하고 침침하여 두 손으로 잠시 얼굴을 가렸다

손으로 덮은 얼굴은 어두웠고 곧 어둠이 손에 배자

손바닥 가득 해골이 만져졌다

내 손은 신기한 것을 감지한 듯 그 뼈를 더듬었다

한꺼번에 만져버리면 무엇인가 놓쳐버릴 것 같아

아까워하며 조금씩 조금씩 더듬어 나갔다

차갑고 무뚝뚝하고 무엇에도 무관심한 그 물체를

내 얼굴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그 튼튼한 폐허를


해골의 껍데기에 붙어서

생글거리고 눈물 흘리고 찡그리며 표정을 만들던 얼굴이여

마음처럼 얇디얇은 얼굴이여

자는 일 없이 생각하는 일 없이 슬퍼하는 일 없이

내 해골은 늘 너를 보고 있네

잠시 동안만 피다 지는 얼굴을

얼굴 뒤로 뻗어 있는

얼굴의 기억이 지워진 뒤에도 한참이나 뻗어 있는 긴 시간

을 

선글라스만한 구멍 뚫린 커다란 눈으로 보고 있네


한참 뒤에 나는 해골을 더듬던 손을 풀었다

순식간에 햇빛은 살로 변하여 내 해골을 덮더니

곧 얼굴이 되었다

오랫동안 없어졌다가 갑자기 뒤집어쓴 얼굴이 어색하여

나는 한동안 눈을 깜박거렸다 겨우 눈동자를 되찾아

서둘러 서류 속의 숫자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위의 시는 김기택의 「얼굴」이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총 23행, 3연으로 구성된 시이지요. 대화체의 서술구조가 한 편으로는 편안함을 주지만 또 한 편으로는 지루한 불편함을 동반 합니다. 한 행 한 행 읽어나가도 쉽게 그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 구조와 ‘ 겨우 눈동자를 되찾아/ 서둘러 서류 속의 숫자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하는 결구는 시의 처음과 끝을 강렬하게 장식하라! 는 통념적인 시의 기법을 여지없이 깨뜨리기도 합니다.


이 시를 동영상으로 재구성하여 본다면 이렇게 될 것입니다. 사무실의 어떤 사무원(시인)이 일에 몰두하다가 책상 위에 턱을 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쌉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기도 하고 쳐보기도 하겠지요. 눈이 아프기도 하여 눈을 맛사지도 하면서...그러다가 다시 손을 내리고 일을 시작합니다. 잠깐이었지만 눈을 감고 손으로 누르고 있었던 까닭에 금새 앞에 펼쳐진 서류에 눈의 초점을 맞추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이런 행동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 잠깐동안의 행동 속에서 시인은 하나의 사유를 이끌어 냅니다. 겉과 속, 실상과 허상, 진실과 허위와, 순간과 영원 같은 우리 삶의 대립 項들에 대한 자각이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이지요. 더 이상의 시의 내용에 대한 언급은 시의 감상을 저해할 것이기에 그만 두기로 하겠지마는, 하나 덧붙이고 싶은 말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말 또한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이 시에서의 修辭는 화려하거나 능숙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시인의 의도일까요?)


어둠이 손에 배자, 그 튼튼한 폐허를. 마음처럼 얇디얇은 얼굴, 잠깐동안만 피다 지는 얼굴을, 한참이나 뻗어있는 긴 시간을, 선그라스만한 구멍 뚫린, 햇빛은 살로 변하여, 겨우 눈동자를 되찾아 .....


그저 눈에 띄는 대로 적어본 수사적(?)인 표현들입니다. 대부분이 산문적인 동작의 서술을 이루고 있으면서 간간이 무늬처럼 행간에 투입된 이런 표현들이 이 시의 골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보고 싶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세상의 본질적인 문제를 ‘만물은 流轉한다’는 명제에서 찾았습니다. 流轉, 즉 움직이는, 변화하는 것, 순간적인 현상 속에서는 사유가 발생하기 힘듭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파르메니데스적인 생각, 본질적인 것은 정지의 상태이고, 변화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공고히 해야 할 것입니다. 슬로비디오는 이미 지나가 버린 사건을 되돌려 보여 줍니다. 되돌려 보아 순간 속에서 본질을 캐내려는 집념이 우리를 좋은 글로 인도합니다.



  

    

   소요문학 월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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