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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시인론·시평

관계 복원을 위한 길 찾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5. 26. 00:52
 

      관계 복원을 위한 길 찾기


                                                              나호열

문학은 살아 있다

 

‘문학의 위기’란 말이 이제는 ‘문학의 몰락’ 으로 우리 앞에 당도한 문제라고 해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대형 서점에서의 문학 코너는 구석에서 구석으로 쫓겨가는 형국이고 가뭄에 콩 나듯 해도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베스트셀러들이 요즘 들어 아예 나타나지 않는 현상은 우리를 더 이상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최근에 발표된 연구 결과를 보면 2007년도의 우리나라의 엥겔지수는 11.0으로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여 있으나 여가활동 중에서 문학에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들은 4/100에 불과하고, 50%가 넘는 사람들은 영화로 소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문학의 미래가 암담함을 한탄할 수밖에 없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조차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기보다는 시나리오, 스토리텔링 작가 아니면 기자를 택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이야기나 졸업할 때까지 소설 한 권 읽지 않는 학생이 부지기수라는 말이 전혀 새롭지 않은 것은 우리 삶의 환경이 변하고 그에 따라 의식구조 자체가 대격변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시인, 작가들이 글을 쓰고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독자들이  외면하는 시와 소설을 왜 그들은 쉬임없이 생산하고 있는 것일까?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신춘문예’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등단이라는 신기루를 향해 돌진하는 신인들은 왜 그렇게 많은가?


 세속적인 관점에서 명예를 얻기 위해서이건, 부를 걸머지기 위해서이건 아니면 구도자의 절박함으로 세계와 인간의 근원을 물으며, 생명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건 궁극적인 질문, 즉 대자적 존재로서의 ‘나’의 의미를 확인하려는 의지는 시인이나 작가를 꿈꾸며 그 길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우하지 않을 수 없는 숙명일 수 밖에 없다. 한 마디로 축약하면 ‘세계 내에서의 존재 확인’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자신을 이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이를테면 대통령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수도 있고, 억만 장자가 되어 호화의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자신을 위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보다 낮은 곳에 투신함으로써 희생하는 존재, 봉사하는 존재의 뿌듯함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째든 인간은 겉으로 자신을 드러냄 -表現 representation- 으로써 자신을 확인하고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 소리와 색, 몸, 구조물 등등은 그것들이 현현하는 순간에 추상화되면서 단절되는데 비해 언어는 추상화되면서 동시에 의미의 전달이라는 관계성을 발화시킴으로써 매우 매력적인 사고의 도구가 된다. 문학은 바로 이 지점에서 희망을 얻고 절망에 좌초한다.


  시인과 작가는 선가 禪家에서 말하는 말의 그물 앞-言詮- 에서 끊임없이 망설이는 존재이다. 소위 불립문자 不立文字는 인간이 언어를 포기함으로써 세계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선언이다. 이러한 內省의 통로는 시인이나 작가가 자신을 드러내는데 매혹적이지만 그만큼 유쾌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은 방법이다. 이에 반해서 언어행위는 자신의 드러냄을 확인하는데 유효한 적중이지만 동시에 독자라는 타자가 개입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문재가 ‘글쓰기는 말 걸기이다’라고 단언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시인이나 작가가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는데, 실상 독자들은 보다 즉물적이고 확실한 즐거움을 보장해주는 영상매체에 눈을 돌리고 있다면 앞 서 던진 ‘독자들이 외면하는 시와 소설을 왜 그들은 여전히 생산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으로 다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 질문에 답할 유일한 통로는 시인이나 작가에게 주어져 있다. 김수영이 ‘문학의 대중성’에 빠짐을 두려워하고 배격했다는 사실에서 가장 초보적이고 진부한 ‘작가 자신이 최초의 독자이다’라고 하는 명제를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 작고한 소설가 박경리의 유고를 되새겨보자.'(물질의 위험한 힘'계간 '아시아'(발행인 이대환) 여름호, 동아일보 2008년 5월24일자 재인용)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상업적인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간혹 상업적인 사고를 가진 문학인들을 볼 수 있는데, 진정한 문학은 결코 상업이 될 수 없습니다. 문학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컵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정신의 산물을 가지고 어떻게 상업적인 계산을 한단 말입니까. 나는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말도 우습게 생각합니다. 독자를 위해서 글을 쓴다면 종놈 신세 아닙니까. 독자들 입맛에 맞게 반찬 만들고 상차림을 해야 하니 영락없는 종놈 신세지 뭡니까. 문학은 오로지 정신의 산물인데, 그렇게 하면 올바른 문학이 탄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출판사에서 저자 사인회를 하는 것도 탐탁지 않게 생각합니다. 방송국에서 가끔씩 출연 섭외가 들어오기도 하는데,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이야기해야 하는 이중성 같은 게 느껴져서 거의 거절하고 맙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이중성을 볼 때처럼 기분 나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대신에 나는 내 영혼이 자유로운 시간을 더 얻는 기쁨을 누립니다.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따른 명예나 돈 같은 것은 별것 아닙니다.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최고입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문학의 추상성과 독자의 눈치를 살피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한 시인과 작가의 천형 天刑을 본다. 아무리 극소수라고 해도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은 업보를 자신의 임무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그들이야말로 이 세계의 본원에 대해, 다시 굴러내릴 돌을 산정으로 높이 올리는 시지프스이다.

 

  

관계의 복원과 새로움

 

 “평범한 것을 평범하지 않게 형상화해내는 방법” 을 찾는 것이 작가의 숙명( ‘무엇을 ’과 ‘어떻게’,  도전정신과 실험정신 유재용, 시와 산문 2008년 봄호)이라면 그에 수반되는 “주제와 소재, 수법에 대한 탐구”(상동)는 피할 수 없는 난제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고 필자는 굳게 믿고 있는데, 그 말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시인이나 작가는 이미 낯익은 주제나 소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탐구해야할 질문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전예숙의 소설 「비둘기 집으로 가는 길」은 주제에 있어서의 새로움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산 離散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이산이 발생하는 원인들도 전쟁이나, 자연재해, 또 다른 이유로 인한 가족의 와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간단히 정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난 아버지가 딴 살림을 차리고,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자 어머니는 정신을 놓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어머니는 더욱 아버지에 집착하고 주인공은 그런 부모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을 가지지 않는데, 어학연수에서 만난 입양아 리즈가 부모를 찾기 위해 고국을 방문하면서 자신을 버린 - 입양아 로 전락시킨- 부모를 용서하고 이해한다는 행동을 통해서 주인공은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일으킨다는 줄거리는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감추고 있는 문제는, 독자들에게 풀기를 요구하는 문제는 ‘비둘기 집’의 상징에 있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으나 실제로는 매우 투쟁적이고 잔인하기 조차한 조류라는 것, 또 비둘기는 귀소 歸巢능력이 뛰어난 새로서 각인되어 있다는 것, 최근에 들어서 그 비둘기들이 도시화되고 먹을 것이 풍부해지면서 귀소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에서 비유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 현대인이 당면하고 있는 관계의 단절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이다, 유재용이 2007년도 신춘문예 소설을 일별하면서 타인과의 소통과 대화가 막히고, 자기 내부에 유폐되어 몸부림치고 절규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분석했듯이 전예숙의「비둘기 집으로 가는 길」또한 관계가 단절된 현대인의 자아 유폐를 그리고 있음은 틀림없다. 도덕적 결단을 요구하지 않고 우리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단절의 유혹 - 여기서의 단절의 유혹은 앞서 박경리가 말한 자유를 향한 단독자로서의 굴절이다- 이 관계의 소통만큼이나 뼈아프다는 증언이 전예숙이 감추어놓은 해답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단편소설에서 서사 敍事를 기대할 수 없는 만큼 강력한 캐릭터를 구현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점을 또한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반해서 요즘의 시들은 “소설의 기법에서 나타난 구체적 묘사, 황당, 분방, 활달한 상상력, 속물화되는 야유, 넌센스의 나열 등이 나타나면서, 함축, 심상적 이미지는 생경한 언어로 밀리면서 묘사와 이야기를 곁들인다.” ( ‘다양한 언어표현의 홍수에 표류하는 현대시’, 조병무, 시와 산문 2008년 봄호)

 

 분명히 최근의 주목할 만한 시들은 전형의 궤도를 한참 이탈해 있는 듯하다. 관념을 분할하여 분석하고 회화적 이미지로 재구성하기 보다는 분출하는 관념을 감각으로 돌출시킴으로써 의미 그 자체를 무화시키는 시들이 있는가하면, 서사적 얼개를 가지고 산문화하는 실험도 눈에 띄고, 시 속에 이야기를 구성하고 그 이야기를 비유로 장식하는 서정 지향의 시, 풍경의 즉물적 묘사로 서정 자체를 자아화하는 시에 이르기까지 전위적 실험에서부터 전통적 서정의 층위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음은 그만큼 시에서의 다양성이 이제는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시에서의 구조의 실험은 단지 형태상의 새로움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파편화되고, 분절된 의식의 드러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식의 무화 無化는 자칫하면 시를 희화시켜 한갓 놀이로 전락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계는 단지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소외시킨 각성되지 않은 자아와 각성된 자아의 관계까지도 포함한다. 이 말은 변증법적 논리를 어디까지 끌고 가서 멈추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도 결부된 문제이다. 시각이나 청각이 주는 쾌락을 언어는 따라갈 수 없지만 시가 그토록 멀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언어가 가진 애매성 때문에 오히려 사고의 여백을 키우고 여운을 오래 남기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김양숙의 「세 번째 거푸집」이나 박영봉의 「겨울, 동굴 벽화」 정순옥의 「손의 암각화」는 형태상의 실험과 의도적인 이미지의 해체를 통한 즉물적 감각의 표출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의식이 파편화되는 위험의 한계점까지 밀고 올라감으로써 새로움에 도전하려고 하는 패기와 언어의 실험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을 만하다. 이와는 다른 방면에서 심진숙의 시편들은 아슬아슬한 언어의 모험을 피해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서술해 나가는 필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펼쳐보이는 이야기들은 잔잔하면서도 설득력이 있고 안개 속에 들어가 있다가 문득 밝은 햇살 아래서 물기를 감각하는 삶의 이면을 경험하게 하는 힘이 있다. 감각과 서정은 일방적인 감정몰입과 거리조정에 실패하지 않는다면 좋은 시를 구성하는 사이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만, 압축과 생략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시의 운명 아래서는 군더더기가 될 수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독자에게 묻다


모든 글은 자위自慰이면서 독자를 향해 간다. 어떤 형태의 글이든 해독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시나 소설을 읽지 않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내뱉는 말은 요즘 시나 소설은 너무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가 없고, 그런 까닭에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머리 아픈 세상에 두통 하나를 더 얹을 여유가 어디 있느냐는 이야기다. 호기심을 끌만한, 눈길을 확 잡아당길 매력을 시나 소설에서 찾는다는 것은 애시당초 그르다는 선입견은 작가에게는 대중성이라는 유혹에 빠지게 만드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시인이나 작가로서의 입신은 누구나 꿈꾸는 일지만 섣부른 열망은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든다.

소설가 한승원은 말한다


천 명의 독자 중에 눈 밝은 단 한명의 독자, 그들의 눈은 날카롭고 늘 무서워요. 그 한 명의 독자를 생각하며 작품을 쓰는 것 이지요 (월간 조선 2008년 6월호)


그러므로 시인이나 작가는 자신의 표현 욕구와 싸우고, 그 욕구 너머에 있는 독자들과 싸우고 결국은 언어와 싸울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관계의 소통이란 이런 유기적 투쟁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에서 이루어지고 그 때 그들은 홀연히 제 모습을 감추어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승원은 글쓰기를 구도의 과정이라고 정의하면서 거문고 줄을 예로 든다. 거문고 줄은 명주실로 만들고 누에고치가 죽은 게 거문고 줄이다. 가는 줄에는 누에고치가 이 천 개 필요하고 굵은 줄에는 육 천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즉 거문고 소리는 죽은 누에고치의 소리이며,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은 고통을 비트는 일, 고통을 비틀어 빛을 내는 일이라고 말한다(월간 조선 2008년 6월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