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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자위 自爲와 자위自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11. 6. 11:31

 

  문학의 자위 自爲와 자위自慰


                                                                   나 호 열


문학의 위의

 

문학, 아니 예술이라 일컫는 모든 행위는 그 누구로부터도 강제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자위 自爲이며 자위 自爲의 핵심에 철저한 지기 위무 慰撫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위 自慰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예술의 자유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자위의 개념을 좋든 싫든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때 억압과 통제에 묶이고 마는 것이 예술의 숙명일지 모른다.

 

며칠 전 문우들과 함께 변산반도로 문학기행이란 이름을 내걸고 하루걸이를 했다. 말이 문학기행이지 남들이 한 번씩 거쳐가는 내소사며, 곰소며, 채석강, 수성당을 거쳐 이재 거의 완공에 다다른 새만금 방조제까지 휘휘 둘러보는 여정이 답답하고 허전해서 해가 지고 나서 부안읍내의 매창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주변이 신시가지로 조성되어 아파트로 둘러싸인 매창공원 안에 매창 묘소가 있고, 묘소를 빙 둘러서 매창의 시를 새긴 시비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어찌 보면 건조하고 막막한 그곳에서 문우들은 매창의 시를 받아 적고 어떤 이는 매창 묘에 엎드려 절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오 백 년 전의 한 많은 한 여인이 오늘도 여전히 살아서 함께 숨 쉬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넋두리로 들린다 해도 할 말이 없을 듯한 매창의 목소리가 그가 죽고 그의 시에 공감했던 독자들에 의해서 수집되고 책으로 만들어져 60 여 편에 이르는 단장 斷腸으로 우리를 애끓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매창의 시가 자신의 극적인 삶을 직핍하면서 내면의 소리를 가감없이 표현하였다는 체험의 극대화와 인간의 보편적 정서인 희노애락의 공감대를 형성하였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부연해서 말하면 매창은 자위의 두 가지 요소를 억업된 삶으로부터 자유의 공간으로 확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유추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의 이 땅의 문학과 문학의 터전에 살고 있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작품의 유통과 소비 형태를 비추어 볼 때 진정한 자위의 정신을 우리가 얼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보듬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가을 호 기획특집으로 게제된 고성만 시인의 「천혜의 은둔지, 변산반도」는 오늘의 우리의 문학을 이야기하는데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이 글에서 고성만은 매창을 비롯해서 박영근, 신석정 등 부안에 태를 묻은 세 사람의 시인을 소개하고 있는데 - 고성만 또한 부안사람이다 -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환경은 달랐다 하더라도 그들이 대면하고 생산했던 문학의 실체는 생각보다 무겁고 깊다.


박영근은 오십이 갓 넘은 나이에 최근에 병고로 세상을 떠난 불우한 시인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암울한 현실에 맞서지만 희망을 노래했고 부조리한 현실을 증언하면서도 시의 서정을 놓지 않았다. 안락에서 오는 배부름이 왜 노래가 되지 않는 지, 절박하지 않으면 들끓는 피가 왜 눈물이 되지 않는지 체험의 밑바탕 없이 상상의 날개를 휘저으며 끝없이 허공에서 허공으로 추락하는 현세의 시인들에게 그의 목소리를 들려줄 일이다. 그에 비해서 신석정은 세인의 평대로 원정 園丁의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꼽히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나「춘란」은 몽환적 서정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말을 뒤집어 본다면 신석정의 대척점에 박영근의 시가 가로막고 있는 셈인데 현실을 현실 그대로 투영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티가 가미된 해체시나 김춘수를 흉내낸 아류 무의미 시로 빠지지 않고, 현실을 후경 後景으로 배치하거나 혹은 생략하여 놓고 그것으로부터 정제된 정서를 추출하는 미학적 성취는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야 할 묵언이 아닌가 싶다.


좋은 작품의 조건


개략적으로 살펴본 이런 전제를 놓고 볼 때 좋은 작품이란 첫 째, 현실을 자아에 투사하되 정밀한 작가의 반성이 녹아들어야 한다는 것 둘 째, 자위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상상력은 충분한 논리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 세 째, 장르를 불문하고 문체의 미학적 성취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논의의 중심에 놓여진다고 본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고자 한 마디를 덧붙인다면 첫 번 째 기준으로 삼은 통렬한 자기 반성의 요의는, 알게 모르게 작품 속에 들어와 앉는 교훈적 메시지가 작가의 직접 체험이든 간접체험이든 간에 철저한 자기검열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을 강조하는 것이다. 작가 자신이 체득하지 않은 이미지를 픽션 fiction이라는 이유로, 상상의 영역이라는 이유로 슬며시 방치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획연재로 3번째 게제된 박강순의 「꽃에게 길을 묻다」는 딱히 어떤 장르라고 구분지어 말할 수 없다. 수필이라고 하기에는 원고량이 많으니 수상 隨想 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적당할까? 연꽃을 중심 테마로 자신의 체험과 그 체험으로 길어 올려진 깨달음이 안정된 문체와 어울려 평안함을 준다.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백수복의 「장애인의 전철 행복론」과 허봉조의 「네델란드의 사진사」는 우리에게 수필을 읽는 즐거움과 의미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이 두 편의 수필은 모두 필자의 경험, 즉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글들인데 사실적 상황의 전개에 치중하다보니 문체의 번득임이나 발랄한 발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나 경험된 사실의 내용이 충실하여 삶의 긍정적 엔돌핀을 생성하는데 넉넉하게

기여하고 있다. 「장애인의 전철 행복론」은 타인의 부주의로 인하여 장애인이 된 필자가 전철의 신속한 실용성과 전철 이용시 장애인 우대권을 제공받음으로서 이동수단으로 이용하게된 전철 주변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펼쳐 놓는다. 자신을 장애인으로 만든 타자를 원망하지 않고 자신보다 낮은 곳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과 배려를 받고 따듯한 마음으로 되돌려주는 김밥 파는 할머니와의 만남과 헤어짐은 각박한 세상에서 살면서 버릇이 된 사나움과 노여움을  상쇄시켜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슬며시 내성의 거울을 내미는 듯도 하다.  「네델란드의 사진사」는 해외여행 중에 겪은 에피소드이다. 에누리에 익숙한 한국인이 네델란드의 사진사에게 창피를 당하는 이야기와 무작위로 찍힌 자신이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음을 발견하는 내용을 병치시키고 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타인 앞에서 엄숙해지고 긴장하고 딱딱해지는가? 그로 말미암아 나를 바라보는 타인은 또 긴장하고 엄숙해지고 딱딱해지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도 이제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전염시키기 위해, 마음에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틈 날 때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도록 맑은 표정을 연습해 보아야 하겠다.


작품을 마무리할 때 흔히 보이는 결단과 반성 작용이 다소 작위적으로 보일지라도 전개된 내용이 공소하지 않기 때문에 자가의 진정성이 확보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체험의 형상화 :관찰의 문제


시조와 시인당선작 5 편을 포함해서 총 32편의 시를 읽었다. 오독의 즐거움은 독자가 누리는 행복 중에 하나일 텐데 요즘의 심사는 그리 편하지 못하다. 시중에서 팔리고 있는 ‘좋은 시 묶음’이나 경쟁적으로 일간지에 게제되고 있는 ‘ 한 편의 시와 짧은 해설’ 이 문학인구의 저변 확대와 문학의 생활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가 큰 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는 다수의 시인들에게 던지는 안쓰러움 또한 크기 때문이다. 적어도 작품을 선정하는 주체들은 주체들의 선명성, 왜 그들이 그러한 작업을 행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작품 선정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선에 들지 못한 시인들이, 그들의 작품들이 다른 기준에서는 얼마든지 주목받을 수 있음을 여지로 남겨 두어야 한다. 그런 친절한 배려가 없기 때문에 시의 유통과 소비에 혼란이 생기고 벽이 높게 세워지는 것이다. 문학은 과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평가도구도 존재할 수 없고 정량화 할 수도 없다. 독자의 성향, 평자의 성향에 따라서 어느 작품은 별이 되고 어느 작품은 흘러가는 강물 속에 내려앉는 조약돌이 된다. 그러므로 오독과 오독으로부터 빚어지는 여러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관대해질 필요가 있고,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대체로 전통적 시관을 가진 시인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형상화 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필자가 편리하게 구분하여 쓰는 용어 가운데 경험과 체험이 있다. 둘 다 사전적 의미를 따져보면 변별성을 찾기 어려울 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경험은 지각되지만 반성과 투사가 이뤄지지 않는 습관적 행태로, 체험을 경험으로부터 분발되는 반성의 영역으로 구분지어 사용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시작 詩作에 적용되는 것은 체험의 영역이다. 다른 말로 해서 주제나 소재에 대한 숙고가 없으면, 즉 오브제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실행되지 않으면 시의 형상화가 지난해지고 공허한 말놀음으로 전락하기 쉬우며 그에 따라 신선한 비유의 활용도 제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시업에 오래 길들여지다 보면 부지부식간에 형식화된 발화가 이루어짐을 목격하게 된다.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받아들였던 수많은 정보들, 지식들, 균질화된 이념들이 시를 지나치게 사소한 서정이나 훈화로 이끌어간다. 다시 말해서 사고의 형식화는 반드시 시인이 피해야 할 늪과도 같은 것이다. 고승대덕의 말씀을 내려받은 성경을 복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가으내 이 산 저 산

다 뒤져 주워온 밤

젯상에  놓을 실 -한 밤 골라 놓고

밤잠 제쳐가며 얼리고 말리고

손질하는 어머니

오늘 장에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한 되 천 원씩 팝디다 했더니

산 밤하고 산밤하고 맛이 같냐며

눈 흘기신다


위의 시는 정순덕의 「산 밤하고 산밤은 다르다 」전문이다. 이 시를 놓고 비유를 따지고 형상화를 따지는 일은 무력하다. 그저 눈으로 읽고 마음으로 새기면 그만이다. 그러나 ‘ 산 밤’으로 표징 되는 자본경제의 징후와 ‘산밤’으로 제시된 건강한 노동의 생산은 큰 울림을 갖는다. 생략되거나 압축되어 있는 자연의 상실, 실용적 가치로 교환되는 노동의 의미는 아득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시에서의 새로움은 이렇듯 여러 통로를 통해서 발견되고 확대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하여 내놓아 보았다.


경주 건천 오봉산 산행을 한다

차마 눈 가려야 할 뻔 했다

한 여자가 발가벗고

수려한 병풍을 두르고 누워 있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고

등산화 끈을 조여 심장을 달랬다

남회귀선을 항해하듯

외음부를 헤집고 대음순을 지나

소음순을 발리니

음핵에는 꿀물이 질펀했다

잔솔이 우거진 두둑을 오른 후에야

친구는 첫 경험을 이야기 했다


아니야

그렇지 않다

조물주의 장인정신이 여근을 빚어

천 년 세월의 태교를 하고 계시는 어머니다

정수리에 앉을 자리에 풍혈도 준비해 두셨다

그 누구도 짓밟은 모정을 말하지 않았다

철없이 히히덕이며

유방을 더듬고 가르맛길을 걸었다

이놈들 천벌 받는다


싱겁게 여기지 말라

여근곡은 은밀한 곳이 아니다

너희의 고향이야

영원한 시발역이다.


유병옥의 시 「여근곡 女根谷 산행 」의 전문이다.  이 시 또한 「산 밤하고 산밤은 다르다 」와 마찬가지로 평이한 서술과 더불어 대담하게도 금기의 영역을 넘어서는 파격을 보이고 있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면 그만인 이 시에서 우리는 건강한 에로티시즘과 마지막 결구에서 보이는 페미니즘의 원형을 본다. 음란함이 음란함을 끝나지 않고 해학을 지향할 때 시는 새로운 페이소스를 발생시킨다. 평자에 따라서 인용한 두 편의 시는 논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앞에서 제시한 좋은 작품의 세 가지의 기준을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전략에 따라서 단 한 가지라도 충족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좋은 시의 반열에 기꺼이 동참시킬 수 있다. 적어도 위의 시들은 ‘현실을 자아에 투사하되 정밀한 작가의 반성이 녹아들어야 한다’는 첫 번 째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시고의 형식화’의 유혹으로부터 자유스러운 작품이 여기 또 하나 있다. 권채운의 소설 「저 언덕 너머」는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문체의 광휘를 보여주지 않는다. - 이런 상황이 일반화된 이 시대의 작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 이 소설의 포커스는 이산가족의 문제에 맞춰져 있다. 6.25의 폐해로부터 고통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 소설의 주인공도 전쟁터로 끌려간 아버지는 소식이 없고 어머니는 재혼하고, 주인공은 남의 집으로 양녀로 입양되는 불행과 고통을 겪는다. 이쯤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통일이라든지 평화라든지 하는 개념을 떠올리게 되고 전쟁을 고발하고 편 가르기 하는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고발하는 흐름을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작가는 소설의 중심을 주인공의 사적인 내면으로 끌고 간다. 즉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축 하나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결혼한 이력과 안온한 생활을 어머니와의 해후를 통해서 파기시키고 싶지 않은 축을 세워놓고 갈등하는 구도로 소설은 전개되는 것이다. 주인공은 결국 고향을 찾게 되고 고향 옛집을 지키며 살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게 되지만 끝내 그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고갯마루에 이르기까지 나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둘러선 산이 거무스름하게 변하면서 길을 좁히고 있었다. 고갯마루에 이르러서야 나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머니의 집 위에 높다랗게 외등이 켜져 있었다. 얼마나 촉수가 밝았던지 초가지붕은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하얗게 변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놓고 말았다.  


이 소설의 미덕은 독자들로 하여금 같은 상황에서 너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묻는데 있다. 이렇게 질문을 던질 때 독자는 비로소 자신을 둘러보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숙고할 시간을 갖게 된다.

주인공은 언제 다시 마음을 바꿔 어머니에게 자시의 정체를 밝히고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과거를 고백할지 모른다. 아니면 영원히 다시는 어머니를 만나지 않고 현재의 평온을 유지한 채 삶을 마감할지 모른다. 이 소설은 독자가 바라는 결말 -혹은 작가 자신이 원할지도 모르는- 행복한 해후를 배반하면서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가?’ , ‘단지 혈육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절된 수십 년의 이산의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독자와의 거리


자위의 문제는 언제나 독자 앞에서 무력해지곤 한다. 관객 없는 연극이 존재할 수 없듯이 작가들은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서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가는 , 예술은 자유로운 혼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진다. 자유로운 혼은 다른 말로 바꾸면 고독이다.

자신의 수행을 시험하기 위해서 절벽에서 백척간두 진일보를 실행한 어느 수도승이 생각난다. 변산반도 월명암 근처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계간 시와 산문 2008년 겨울호 계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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