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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만난 ‘연금술사’ 코엘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3. 9. 13:50

파리에서 만난 ‘연금술사’ 코엘료 “방랑벽은 나의 힘 다음엔 서울 갈 수도”




[중앙일보 이에스더] 지난달 교보문고가 2000년대 한국에서 사랑받은 스테디셀러 1만3000권의 목록을 발표했다. 그 정상에 오른 책이 파울로 코엘료(61)의 소설 『연금술사』(문학동네)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해외 작가로 코엘료가 인정받은 순간이다.

코엘료의 작품은 한국에서만 250만 부, 전 세계 160개 나라에서 66개 언어로 번역돼 1억 부가 넘게 팔려 나갔다. 그러나 그가 소설을 쓴 세월은 20년 남짓이다. 대기업 임원으로 안정된 삶을 살던 그는 1986년 갑작스레 회사를 그만두고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 프랑스 남부에서 스페인 북부에 이르는 시골길로 가톨릭 성인 야고보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걸었던 곳) 순례를 떠났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첫 소설 『순례자』를 썼다. 그의 나이 마흔 살 때였다.

코엘료를 어렵사리 만났다. 인터뷰 의사를 넣은 지 2년여 만이다. 20여 차례의 접촉 시도 끝에 모습을 드러낸 코엘료는 “고집 세고 지독한 한국 기자”라며 농 섞인 인사를 건넸다. 프랑스 파리 그의 집을 찾아갔다. “1년에 반은 여행으로 보낸다”는 그는 추상화가인 아내 크리스티나 위티시카(57)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널찍한 아파트는 수수했다. 거실 창문 너머로 센강과 에펠탑이 눈에 들어왔다.

코엘료는 “외신을 통해 숭례문 화재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아프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브라질에서도 군사정권 시절 문화재 방화 사건이 자주 일어나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상심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며 “물리적인 의미의 숭례문은 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한국의 혼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고 위로했다.

-한국 독자가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당신 작품은 기독교·라틴 문화를 반영한 것인데 한국의 문화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연금술사』는 이슬람 문화에 바탕한 것이고, 『11분』은 창녀의 인생을, 『포르토벨로의 마녀』는 이교도의 전통을 다뤘다. 나는 분명 기독교와 라틴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다. 하지만 내 작품은 특정 종교나 문화권에 구애받지 않는다. 나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내면의 갈등을 다룬다. 한국 독자도 내 소설에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공감했을 것이다.”

-불혹의 나이에 안정된 삶을 버리고 작가가 된 계기가 있나.

“행복하지 않았으니까. 당시에 나는 돈·명예….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걸 가졌지만, 괴로웠다. 내 꿈은 대기업 임원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내 꿈은 작가였다. 단지 모른 척 미뤄 왔을 뿐이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면 우주 전체가 그 꿈을 이루도록 돕는다. 하지만 먼저 위험을 감수하고 첫발을 내디뎌야 한다.”

-요즘 한국에선 당신을 따라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는 게 하나의 유행이 됐다. 그 길의 매력이 뭘까.

“그 여행은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것’을 걸고 자신과 벌이는 싸움이다. 누구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끔 하는 놀라운 경험이다. 800㎞에 달하는 그 길을 걸으면서 나는 나 혼자 세상에 버려진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평범한 직장인이 어느 날 갑자기 세계적인 작가가 되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 아닌가.

“글을 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솔직히 드러내 보이면 된다. 그래서 살면서 지나쳐 온 매 순간이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자산이다. 세상엔 두 종류의 작가가 있다. 타고난 글 솜씨와 상상력의 작가와, 재주는 일천하지만 부지런히 경험을 쌓아 이를 바탕으로 글을 쓰는 작가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내 작품 중에서 경험 없이 쓴 건 단 한 문장도 없다.”

-평범하지 않은 청년기를 보냈다고 들었다.

“열일곱 살 때 나는 부모의 손에 끌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때 난 체 게바라 같은 급진적인 혁명가에 심취해 있었다. 엄격한 부모는 그런 나를 미쳤다고 판단했다. 퇴원한 뒤 내 마음은 황량했다. 부모조차 사랑해 주지 않는 자식이라면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약에 손댔고, 자살을 시도했다. 네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을 경험했다. 이 정도면 평범한 것 아닌가(웃음)?”

-당신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인가.

“73년 만화잡지 ‘크링하(Kring-ha)’를 창간하면서 내가 그린 만화를 실었다. 개인의 다양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브라질 군사정권은 그 만화가 반체제적이라며 나를 세 번 감금하고 고문했다. 세 번째 체포됐을 때는 거의 납치되다시피 했다. 그들은 내 목에 총구를 겨눴다. 지금도 가끔 감옥의 냉기가 느껴진다. 내 인생 최악의 순간이었다. 내가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그는 2007년 유엔 평화사절로 임명됐고, 현재 국제 민간인권운동 단체 앰네스티의 회원이다.)

-불행했던 과거도 당신 문학의 소재로 쓰였나.

“물론이다. 내 작품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 과거에서 『연금술사』의 ‘산티아고’가, 『오 자히르』의 ‘미하일’이 떠오르지 않나? 그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기에 나는 내 젊은 날을 불행한 과거라 여기지 않는다.”

-98년 브라질에 ‘코엘료 재단(Coelho Institute)’이라는 자선단체를 세웠다.

“나 혼자서 나라 전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사는 거리 정도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리우의 내 집 옆에 사무실을 차리고 그 거리의 아이들부터 돕기로 했다. 의식주를 해결해 주고 교육받을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나에겐 아이가 없지만 내가 돌보는 아이들 모두가 ‘내 아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80명이었던 ‘내 아이들’은 이제 430명으로 늘었다.”

-2년 전 당신은 프랑스 생마르탱에서 살았고, 지난해엔 두바이에, 지금은 파리에 있다. 왜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떠도나.

“방랑벽은 나의 힘이다. 인생은 모험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새로운 경험을 쌓고 싶다. 리우데자네이루·파리·두바이·암스테르담·마드리드…, 다음 행선지는 서울이 될지도 모른다(웃음).”

세계적인 작가의 서재가 궁금해 구경을 청했다. 그는 “나는 미니멀리스트”라며 “무엇이든 최소한의 것만 소유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책꽂이는 텅 빈 채, 책 여남은 권만 꽂혀 있었다. 그중 한국어 책 두 권이 눈에 띄었다. 그는 그 두 권에 사인을 해 내밀었다. 한 권은 중앙일보 독자에게, 한 권은 기자에게 주는 선물이라 했다. 작별 인사를 나누기 전, 이번엔 그가 질문을 던졌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며 살아 왔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고 해도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당신은 어떤가?”

파리=이에스더 기자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1947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출생.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세계적인 음반사 ‘폴리그램(Polygram)’ 임원으로 있던 86년 어느 날, 불쑥 사표를 던지고 스페인 ‘산티아고의 길’로 순례를 떠난다. 이듬해 그 순례의 경험을 토대로 첫 작품 『순례자』를 냈다. 이후 『연금술사』『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11분』『오 자히르』 등 내놓는 작품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잔잔하고 사색적인 문체로 인간 본성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주로 다뤘다. 2006년 나온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비롯해 모두 11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99년 프랑스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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