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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에 관한 질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1. 21. 16:23
 

낙타를 보면 슬프다

사막을 건너가며

입 안 가득 피 흘리며

거친 풀을 먹는다는 것이

사막에서 태어나서

사막에서 죽는다는 것이

며칠이고 사막을 건너가며

제 몸 속에 무거운 물을 지고

목마름을 이기는 것이

낙타를 보면 못 생겨서 슬프고

등위로 솟은 혹을 보면 슬프다

낙타가 나를 본다

낙타가 이상한 낙타를 보고 웃는다

내장된 그리움으로

삶의 사막을 건너가는 것이

얼마나 기쁘냐

갈증을 견뎌내는

오아시스를 향한 눈빛이

얼마나 맑으냐


그래서 나는

낙타의 낙타가 되었다



‘낙타에 관한 질문’은 2004년 10월에 ‘리토피아’에서 출간된 시집 이름이면서 이 시집의 말미를 장식한 시이기도 하다. 한 권의 시집을 구성하는데(배열하는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겠지만 - 이를테면 창작시기를 기준으로 순차적으로 배열하거나 아니면 역순으로 배열하거나, 주제나 소재가 유사한 것끼리 묶을 수도 있겠고, 나름대로 작품의 우열을 가려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왜 이 시가 시집의 마지막에 놓여있게 되었는지 기억이 가물하다. 시집의 제목으로 삼은 것을 보아서는 나름대로 의미가 분명 있을 것인데 시집을 읽어준 독자들에게 후식 정도의 개운함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시집을 완성할 때에 혹은 다른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때에 우선적으로 눈길을 주는 것이 ‘자서’ 또는 ‘시인의 말’이다. 시집의 서두에 놓여있는 시인의 육성은 촌철살인의 시 정신을 압축하고 있다고 믿는 까닭에 나 역시 자서를 쓸때에는 무척 공을 들이는 편이다.


 

어째든 시는 정신의 배설활동임에 틀림이 없다. 오랜 망설임이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자기 위로를 핑게삼아 세상 밖으로 나의 분신을 내놓는다.

부디 오래 살아남아 향기를 뿜어낼 수 있기를!


시집 『낙타에 관한 질문』의 자서는 위와 같았다. 써놓고 보니 너무 상식적이고 사적인 토로인 것 같아서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자신을 위로하지 못하는,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자신과 대화하지 못하는 그런 시를 두려워한다.

의미 없는 生 일수록 언어의 휘발성을 경계하고,

언어의 허상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한 채 독주 한잔을 들이켜는 기분이다.


부디 오래 살아남아 노래가 될 수 있기를!



이렇게 쓰고 보니 나의 시론을 압축한 같아 한결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시는 시인의 정신활동에 있어서 배설물인 것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평단의 눈치를 살피고, 유행에 좇아가기 급급하며 입신의 열망에 들떠 있다면 결코 시인 자신의 진상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디고 해서 나르시즘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언어에 기대고 언어의 애매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시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시는 읽는 사람에 의해 노래가 되지 못한다면 시궁창에 던져버릴 일이다.


다행히 이 시집은 발간에 힘써주신 리토피아 발행인 장종권 시인과 꼼꼼하게 평설을 써준 김삼주 교수의 도움으로 그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그는(김삼주시인)내게 말한다. 아니 낙타에게 말한다

 

낙타는 시적 자아의 객관적 상관물로서 시인의 비극적 존재 인식과 삶의 의지가 투사되어 있다.

이 시에서 '나'는 "낙타를 보면 슬프다"라고 심경을 표백한다. 그 까닭은 낙타의 숙명에서 비롯된다. "사막에서 태어나서/사막에서 죽는다는 것"이 낙타의 숙명이다. 그러나 낙타는 자신의 숙명을 거역하지 않는다. "입안 가득 피 흘리며 거친 풀을 먹고" " 제 몸 속에 무거운 물을 지고 목마름을 이기면서" "사막을 건넌다." 이 고통스러운 삶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무릎 꿇는 일"('수행')이, 내면을 정화하는 일이, 평생을 멈추지 않듯 낙타의 고행 또한 평생 동안 지속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적 자아는 낙타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내장된 그리움으로 삶의 사막을 건너가는, 오아시스를 향한 눈빛으로 갈증을 견뎌내는" 낙타와 '나', 그래서 시적 자아는 "낙타의 낙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내장된 그리움" 또는 "오아시스를 향한 눈빛"은 힘을 지닌다. 삶의 사막을 건너는 힘, 오랜 갈증을 견디는 힘을 지닌다. 말하자면 그것은 생의 의지라 할 수 있다.



 뭇 시인들과 나도 별잔 다름이 없어서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평단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을 열망하지만, 문학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소비, 소통의 구조 속에 편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앞에서는 무력함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인터넷의 발전으로 많은 독자들이 나의 시를 읽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며칠 전 우연히 웹을 검색하다가 이 시집이 문화예술위원회인가 어딘가에서 선정하는 ‘ 이 달의 우수도서’인가 뭔가 하는데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기쁜 일이다. 아주 짤막하게 다음과 같은 서평이 실려 있었다. 


이 시집은 대상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돋보이며, 정제되고 순화된 언어 사용이 탁월하다. 특히 깊이 있는 성찰이 우리 삶의 현상을 두루 주목하고 있어서, 친밀하고 따스한 인간애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