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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는 새로운 것 혹은 혁명적``이물감·본능` 거침없이 대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7. 12. 14. 22:30
'시는 새로운 것 혹은 혁명적''이물감·본능' 거침없이 대화
김이듬 '현실은 결코 착하지 않아, 사기치기 싫어'

젊은 시인 셋이 만났다.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21세기 우리 시의 미래-젊은 시인 49인 자선 대표작'이 매개가 됐다. 등단한 지 10년이 채 안되면서 시집 한 권 이상 낸 촉망받는 한국의 젊은 시인들을 가려뽑았는데, 부산 경남에선 5명이 이름을 올렸다. 부산의 조말선(42·9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등단) 김언(34·98년 '시와 사상' 등단) 시인과 진주의 김이듬(38·2001년 '포에지'등단) 시인을 지난 9일 불렀다. 시 잘 쓴다는 시의 전위대들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았다. 젊은 시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살까? 자신의 시에 대해, 타인의 시에 대해 먼저 말을 꺼냈다.

·김이듬='지금은 자위 중이라 통화할 수 없습니다'라는 시는 오해를 사고 있어요. 포르노 사이트에서 나돌고 있는 걸 봤거든요. 겨울에도 남쪽으로 떠나지 못한 철새가 깃털 속에 머리를 파묻고 추위를 견디는 걸 그렸는데, 단어에 너무 집착을 하는 것 같아요. 혹은 시인과 시적 화자를 혼동하는 건 아닌가 생각도 들고요. 다른 한편에선 자기랑 노는 것, 자기랑 놀면서 위안을 받고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게 그리 나쁜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상처를 많이 받은 모양이다. 그가 쓴 '거리의 기타리스트'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착지가 서툰 빗줄기는 보도블록에 닿자마자 발목을 부러뜨렸다 비가 지하도를 기어간다 질질 끌려간다' 빗줄기가 시인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김언=김이듬 씨는 움직이고 있다고 할까요? 첫 시집을 내고 난 뒤엔 살이 빠지는데 점점 이미지가 풍성해져요.(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서로간의 시어법에 대해선 친근하다.)

조말선=금기의 파괴도 이젠 진부하긴 하지만 김이듬 씨의 파격은 시원해요. 자유분방하면서 예민한 부분이 좋아요. 이런 예민함이 시 전체를 촉촉하게 만들지요.(김이듬도 이 부분에서 용기가 나는 듯 했다.)

김이듬=김언 씨는 시와 소설, 현실과 허구의 경계 속에 끼어 있는 것 같아요. 파도가 일렁이는 것처럼 모래와 바다가 뒤엉켜 있는 접점에서 서걱거리는 미학이라고나 할까? 사진을 찍는다면 다중초점이겠죠.

김언=전 요즘 기존의 모형과 틀을 뒤집어서 생각하곤 해요. '사건들'이란 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를 실체로 보고 사람을 그물로 보고 쓴 거죠. 왜 뒤집었나고요? 인간의 실체는 자주 변해요. 변하는 것을 실체로 두니까 오류가 생기는거죠.

조말선='행렬'이란 시에서 제가 세계 질서에서 맨 끄트머리에 줄 서 있는 미미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싶었어요.

김언=조말선 누님(김언은 그렇게 불렀다)에게선 동병상련을 느껴요. 두 번째 시집으로 세계가 이미 완결됐다고 할까요? 벽일 수도 있고. 뭘 해도 재미가 없을 겁니다.(실제 둘은 그랬다. 조말선은 공부한다는 생각도 놓아둔 채 뭔가 차오를 때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김언도 요즘 책을 보면 볼수록 모래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두 권의 시집을 낸 두 시인은 그렇게 같이 앓고 있었다. 어쨌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흔히 좋은 시라고 일컫는 것들은 스포츠에 비유하면 '플레이 오브 더 게임'이나 농구의 '버저비트' 같은 거죠. 서점에도 '좋은 시'라는 별도의 코너가 있는데, 이건 아니라고 봐요. '잘 만들어진' 시가 반드시 좋은 시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럭비라는 경기가 탄생했을 때를 생각해 보죠. 발로만 공을 차야 한다는 금기를 깨고 손으로 공을 잡은 소년에 의해 럭비가 탄생했잖아요. 바로 럭비가 탄생하는 순간이 '시적'입니다. 틀을 깨는 게 시 아닌가요? 시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이런 혁명적인 시가 젊은 시 아닐까요?

조말선=시라는 장르는 새로움이란 메시지를 던져줘야 합니다. 실체는 모르지만 그 틀을 깨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지, 혹은 잘 깨고 있는지 시인 자신은 잘 알 겁니다.(혹 이들은 새로움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건 아닌지? 개그맨들이 매주 새로운 웃음거리를 위해 골머리를 싸매는 것과 달리 가수들은 히트곡 하나로 몇 년씩 먹고 사는데….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도 가수를 닮았다. 2집 3집이 나올 때마다 '더 웅숭깊다'라며 깊이에 점수를 주니 말이다.)

김이듬=젊은 건 전통과 맥이 닿아 있어요. 아이가 모태에서 나올 때 그 탯줄이 늙음과 공유하는 바로 그 지점처럼. 무덤과 탄생이 겹쳐진 지점에서 본질을 파내는 것. 이런 몸부림을 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시가 달라지는 거라고 봐요.

김언=특이한 것을 보면 "이게 뭐지"하고 골치 아파하는 그런 거죠. 정해진 규칙에 충실한 건 백일장이죠. 그 규칙을 바꾸는게 훌륭한 시 아닐까요?

김이듬=읽다가 딱 멈춰서 이물감을 갖게 하는 것, 이런 생각도 할 수 있구나 하는 것. 그게 바로 시라고 생각해요. 한편에선 본능에 충실한 시가 젊은 시라고 봐요. 저만해도 시집 한 권 내고 죽어야지 했는데….('죽음이 본능인가? 죽긴 왜 죽어요?'라는 기자의 의아스런 반응에 심각하게 자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 누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 세상을 향해 물어뜯는 것, 그게 시죠.

김언=시인은 허공을 물어 뜯는 거구요.

김이듬=보이지도 않고 피가 나지도 않는 걸 물고 있는 거죠.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이야기는 흘러가는 듯 보였지만 둘은 어찌됐던 잘 맞았다. 근데 이들은 '착한 시'와는 한참 거리가 있어 보였다. '따뜻한 시'에 대해선 거의 알레르기 반응이다. 그보다는 '불편한 시'가 그들의 정서엔 맞아 보였다. 계속 들어보자.)

조말선=상처를 긁어서 상처를 낫게 하는 것. 감싸는 게 아니라 그걸 뒤집어서 상처를 까발리는 게 시라고 봐요. 사이코 드라마처럼 직접 경험한 걸 그대로 발산하는 거죠.

김이듬=혹자는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가 포스트모던하다고 하는데 저는 리얼리즘에 가깝다고 봐요. 현실이 착하지 않은데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 치긴 싫어요. 시가 구원을 주는 건 아니잖아요. 시인이 남들보다 우월한 존재도 아닌데 누가 누구를 쓰다듬고 위로한단 말인가요? 그런 몸짓을 취하고 싶지 않아요.

▲ 왼쪽부터 조말선 김언 김이듬

김언=시가 따뜻할 수 있지만 한국에선 그게 지나치게 주류로 흐르고 있어요. 따뜻한 시를 쓰지 않는 소수에 대해서도 그걸 강요해선 안된다고 봐요.

김이듬=따뜻한 시를 못쓰는 게 아니라 안 쓰는 겁니다. 욕지거리와 더듬거리는 말투로 일관된 시를 학창시절에 읽은 적이 있어요. 그게 시의 위로보다 더 큰 감동을 주던데요.

김언=한국에선 시가 아직 예술보다는 도덕에 가까워 보여요. 시인에게 지나치게 지사적 기질을 강요하는 것 같아요.

김이듬=시가 다 소통할 수는 없어요. 신문 기사처럼 모든 사람이 다 시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폭력 같고.

조말선='젊은 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음탕하다' 이런 말을 하는 분들도 있어요.(시가 착해야 하고, 독자와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일각의 주문이 그들에겐 무거운 짐이었던 모양이다.)

김언=보들레르만 해도 당대에 시집 한 권 내기 어려웠어요. 그런데도 한국의 서정시인들까지 보들레르 이야길 하잖아요. 당대의 평가에는 연연하지 않습니다. '빤한 중견 시인'이 되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에요.(이런 시각에서 이들에게 씌워진 미래파라는 혐의도 불만이다.) 융단폭격식으로 미래파 논의가 꽃을 피웠지만 시인에겐 아무런 영양가도 없었어요.

김이듬=그렇게 한 묶음으로 뭉텅거려서 뭘 하겠다는 건지요?

김언=평론가들끼리 고공전을 벌이고 있는 거죠.

조말선=평론가들도 자기만의 독특한 걸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건 아닌지요?(잠깐 여기서 설명이 필요하지 싶다. 평론가 권혁웅이 파격적인 언어파괴 등의 어법을 구사하는 2000년대 이후의 젊은 시인들을 묶어 미래파라고 명명한 뒤 시단에서 미래파 논쟁이 불붙었다. 평론가들은 '바퀴벌레 시인들'이란 혐오감까지 동반하면서 소통 불가능하고 유희적이고 자폐적인 언어를 쓰는 철없는 시인이란 딱지를 붙이기도 했다.)

밤이 깊어졌다. 젊은 시인들과 소주를 들이켰다. 투명한 소주잔 속에 비친 얼굴들은 이랬다.

세상이 재미없어졌다 했다. 그렇다고 조급해 하진 않는다. 권태긴가. 조말선 이 여자.

말 할 때마다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수줍음. 암되다. 김언 이 남자.

마음에 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듯 싶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을 안고 사는 듯 불안하다. 김이듬 이 여자.

늦은 밤 버스를 타고 진주로 갔던 김이듬 시인이 편지를 보내왔다. "벚꽃이 폭설처럼 쏟아지는 새벽 가로등 아래에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각이 들었어요." 제길, 젊은 시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이상헌기자 ttong@busanilbo.com
출처 : 도봉시벗
글쓴이 : 잎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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