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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안교회'의 '새문'은 도대체 언제 생긴 문인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3. 7. 17:52

[유석재의 돌발史전]

'새문안교회'의 '새문'은 도대체 언제 생긴 문인가

알고보니 그 '新'자는 하나도 새롭지 않았다

입력 2025.03.07. 00:00업데이트 2025.03.0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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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철거하기 전 돈의문의 모습. 지금의 서울 종로구 정동 사거리에 있었다. 일제는 1915년 전차 궤도를 복선화하면서 이 문을 철거했다. 서울시는 2035년까지 돈의문을 복원할 계획이다. /서울시

 

서울에서 속칭 ‘광화문 네거리’라 부르는 곳은 광화문이 정면에 보이지만 사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세종로 사거리’입니다.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난 8차선 대로를 ‘신문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이름이 ‘이 근처에 신문사가 많아서’ 생겨난 것인 줄 아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습니다.

한자로 쓰면 신문로(新聞路)가 아니라 신문로(新門路)입니다. 여기서 ‘신문’은 ‘새문안교회’의 ‘새문’과 같은 개념입니다. 새로 지은 문 안쪽에 있기 때문에 세종로사거리와 서대문 사이 마을의 이름은 새문안.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듭니다.

도대체 언제 지은 문이기에 ‘새로 지은 문’이란 이름이 붙어 아직까지도 내려오고 있는 것일까.

저도 예전에 조선일보 ‘신문은 선생님’난에서 이 얘기를 추적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최근에 나온 이상태 한국고지도연구학회장의 저서 ‘여기가 서울 거기야’가 서울의 다른 지명과 함께 이것을 무척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얘깁니다.

개국공신 정도전은 서울 4대문의 명칭을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에 맞춰 지었습니다. 그래서 동대문은 흥仁문, 서대문은 돈義문, 남대문은 숭禮문이 됐습니다. 북쪽 숙정문이 이 원칙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원래는 ‘소智문’으로 하려고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조선이 개국한 지도 20년 넘게 지난 1413년(태종 13), 최양선이라는 풍수가가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서쪽 대문인 돈의문의 자리가 좋지 않습니다! 지맥을 끊고 있습니다.” 처음에 만든 돈의문은 동대문과 동서로 일직선상에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사직동 고개 근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을 새로 만들자면 통행할 수 있는 길도 같이 뚫어야 할 텐데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한 ‘새문 후보지’의 위치를 보고 깜짝 놀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도가 이숙번(1373~1440)이었습니다.

“아니 이거, 우리 집 앞이잖아?”

이숙번은 태종 이방원의 젊은 시절부터 그를 따랐던 왕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훗날 태종은 그런 이숙번조차 끝내 내쳐 귀양을 보낼 정도로 권력에 있어서 냉혹한 인물이었지만 아직은 이숙번이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세종 말 ‘용비어천가’를 지을 때 이미 죽은 태종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그를 유배에서 풀어주기까지 했겠습니까.

그런 이숙번은 자기 집 앞에 사람이 많이 지나다녀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했습니다. ‘어디 근처 한양 도성에 인접한 다른 곳이 좋을 텐데…’ 고민한 이숙번은 이런 주장을 내놨습니다.

“인덕궁(仁德宮) 앞이 좋을 듯합니다.”

인덕궁은 조선 2대 임금이자 태종의 형이었던 상왕 정종의 집이었습니다. 지금의 서울시교육청 근처, 경희궁 서쪽 언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 집 앞이 조용한 게 중요하지 상왕 집 앞이 시끄러운 게 무슨 대수냐는 얘기였죠. ‘태종실록’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조정에서 이숙번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대로 따랐다.”

권신의 위세가 상왕보다 높았던 셈입니다. 이상태 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태종이 이를 묵과했던 것은 이숙번의 능력과 공훈도 있지만,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면 정종의 권위를 낮춰야 하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덕궁 앞에 지어진 두 번째 서대문이 서전문(西箭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숙번이 실각한 뒤인 1422년(세종 4)에 서전문을 헐어버렸습니다. 아니 또 왜? 그것은 지금 서울시교육청에 출입하는 기자(예전에는 그 옆에 기상청이 있어서 서울시교육청과 기상청을 한 기자가 맡는 일이 많았습니다) 들이라면 모두가 잘 느끼고 있을 바로 그 이유였죠. “통행이 불편하다!”

그리고 언덕에서 훨씬 아래쪽, 지금의 강북삼성병원과 경향신문사가 있는 사거리 자리에 다시 옛날 이름과 같은 ‘돈의문’을 새웠으니, 이것이 ‘새문’, 즉 ‘신문(新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새문=신문=돈의문=서대문이었던 겁니다. 자그마치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세종대왕 때 지은 문을 아직도 ‘새문’이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미 110년 전인 1915년 ‘새문’은 전차 복선화를 명분으로 일제에 의해 철거됐는데도 그렇습니다. 참으로 한번 붙은 지명의 역사는 유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서울시가 증강현실로 재현한 돈의문(서대문). /서울시

새 신(新)자가 이제는 낡게 느껴지는 일이 어디 이것뿐일까요. 19세기에 일본에서 자리잡은 ‘신파극(新派劇)’은 서양식 연극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기서 ‘구파극’으로 지목된 것은 바로 가부키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파라고 하면 진부하고 억지스런 감동을 관객에게 강요하는 구식 드라마 기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분명 새롭다는 뜻의 신(新)인데 말이죠.

만약 탄핵이 인용되고 조기 대선이 치러진다면 결과야 어떻든 새로 들어설 정부는 분명 ‘신(新) 정부’ ‘새로운 정부’를 표방할 겁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그건 ‘신’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전혀 새롭기는커녕 누가 봐도 케케묵은 구시대적 정권일 가능성이 큰데 말입니다. 2025년에도 여전히 우국충정(憂國衷情) 같은 개도국형 정서에 빠지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