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문해력, 아이보다 어른이 더 문제다
합리적 근거 위에 의견 세우고 다양한 생각 이해하는 첫걸음
한국은 OECD 평균 한참 아래… '요즘 애들' 학력 문제 아니다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무슨 뜻이냐는 아이에게 대답을 해주려다 잠시 망설였다. 그전에 부조리(不條理)가 뭐냐고 물었을 땐 아이들 보는 책에 그런 말도 나오나 싶었는데 이건 좀 헷갈렸다. 이목구비 역시 초등학교 3학년에겐 어려운 말일까. 아니면 그쯤은 이제 알아야 하는데 모르는 걸까. 스스로 사전을 펼치길 바라는 것은 부모의 욕심이다. 아이는 가르쳐준 적 없는 인터넷 검색은 자연스럽게 해도 두꺼운 종이 사전은 부담스러워한다. 뉴스에 오르내리는 문해력 저하 현상이 괜한 얘기가 아니라는 걸 이럴 때 느낀다. “아무리 영어가 세계 공용어여도 아시아권에선 한자를 모르면 문맹”이라던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 말씀도 떠오른다.
한국의 문해력 위기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10일 발표한 보고서에도 나타난다. 16~65세를 대상으로 문해력과 수리 능력,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한 이 보고서에서 한국 문해력은 249점으로 31국 중 22위였다. 한국이 평균(260점)에도 미치지 못한 반면 일본은 289점으로 2위였다. 최고 수준의 인터넷 환경과 스마트폰 보급률을 자랑하는 ‘디지털 코리아’ 한국과, 고유문자와 함께 한자를 상용하는 ‘아날로그의 나라’ 일본의 차이가 이렇게 나타나는지도 모른다.
점수보다 걱정스러운 건 하락세다. 한국 문해력 점수는 이전 조사(2013년)보다 23점 떨어졌다. 더 많이 떨어진 나라는 폴란드(31.2점)와 리투아니아(28.4점) 둘뿐인데, 폴란드의 경우 일부 조사원의 데이터 수집 규칙 위반과 비정상적인 답변의 패턴을 이유로 ‘결과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석이 붙었다. 한국인의 문해력이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의 수리 능력도 순위(23위)는 비슷하지만 점수 하락 폭(10점)이 문해력만큼 극적이지는 않다.
문해력 저하에 대한 이야기는 때로 요지경의 풍속도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학생들이 족보는 ‘족발 보쌈 세트’ 아니냐고 하고 시발점은 욕으로 알더라는 이야기(10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조사)는 희극인지 비극인지 아리송하다. 그러나 문해력은 ‘요즘 아이들’ 문제가 아니다. OECD 보고서의 제목은 ‘성인들에겐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기술(skills)이 있는가’였다. 문해력을 학력의 척도가 아니라 생존 기술로 본다는 의미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지면 주머니칼 하나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기술이 필요하겠지만 현대인은 일생 그럴 일이 없다. 대신 언어와 수(數)의 바다에서 필요한 정보를 정제(精製)하며 살아가야 한다.
문해력의 중요성을 특히 민주주의와 연관지어 설명하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민주주의가 효과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관련 정보를 적극적으로 찾고 그 질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능력이 없으면 사람들은 정책이 다루고자 하는 복잡한 문제에 대해 충분한 근거가 있는 의견을 형성할 수 없다.” 유용한 정보와 부정확한 정보, 의도적인 거짓 정보가 뒤섞인 채 넘쳐나는 세상에선 더욱 그럴 것이다.
문해력이 민주주의의 첫걸음이라면, 문해력의 뚜렷한 쇠퇴는 민주주의가 그만큼 뚜렷하게 취약해지고 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는 무너진 문해력을 회복하는 일도 포함돼야 한다. 말이 통해야 대화도 통한다. 대화와 타협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다. 지금 한국의 공론장에서 사라져버린 그 원리도 결국 자기 생각을 표현하고 남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인공지능(AI)이 요점도 정리해주고 글도 척척 써주는 시대라지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지까지 AI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다.
[르포 대한민국] 10년 동안 20점 추가 하락… 한국 성인 문해력은 OECD 평균에 미달한다
학생 문해력은 81국 중 아일랜드·일본 이어 3위로 최상위권 유지
OECD 평균보다 11점 낮고 갈수록 하락세인 성인 문해력이 진짜 문제
말보다 글의 가치가 낮게 평가된 탓…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협한다
얼마 전 학부모의 문해력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수학여행 가정통신문에 ‘중식 제공’이라는 글을 보고 중국 요리를 제공한다고 이해하거나, ‘우천시에 OO로 장소를 변경한다’고 하면 ‘우천시’라는 지역에 있는 OO로 장소를 변경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를 놓고 젊은 세대가 동영상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결과로 받아들이거나, 한자 교육을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학부모 입장에서 보자면 모두 틀린 분석이다. 학교에서 배부되는 가정통신문을 읽다보면 핵심을 이해하기 어렵거나 오해하기 쉽게 작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핵심을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고민하기보다는 작성자가 과거 양식만 따라 쓰기 때문이다. 그러니 장황하면서 핵심을 파악하기 어려운 가정통신문이 나오는 것이다. 학부모뿐만 아니라 교사의 의사 전달 능력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고령 세대의 경우 더욱 심각하다. 관공서나 병원에서 만나는 고령층 대다수는 각종 안내문을 읽고 이해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잘 보이도록 큰 글씨로 써놨지만 아예 볼 생각을 하지 않고 불친절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공무원과 간호사들이 최대한 큰 목소리로 설명을 해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또 다른 오해가 쌓이면서 피곤함은 더해진다. 글자는 읽을 수 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실질적 문맹이 사회에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낮은 문맹률은 우리의 자랑이었다. 해방 직후 78%에 이르렀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전쟁 중이던 1953년 ‘문맹 국민 완전 퇴치 계획’을 수립했다. 총력을 기울여 한글을 가르치면서 1958년 말 문맹률은 4.1%까지 낮아졌다. 놀라운 성취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글자를 아는 것과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무시했다. 성인들의 문해력에 대한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조사는 2014년이 되어서야 시작됐다. 2023년 실시된 제4차 성인문해능력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의 16.6%인 약 735만명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60세 이상으로 대상을 한정할 경우 그 비율은 41.7%까지 증가한다. 이 조사에서 일상생활에 충분한 문해력 수준을 중학교 수준으로 낮게 설정하고 있음을 고려해보면 실제 생활에서 문해력이 부족한 사람의 비율은 더 높아질 수 있다.
학생들의 문해력 저하에 대해 우려가 많지만 대한민국 학생 문해력은 세계적으로 높은 편이다. 2022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주관해 81국 69만명에 이르는 만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우리나라 학생들은 읽기 영역에서 515점을 기록해 아일랜드, 일본에 이어 3위였다. 2006년 556점과 비교하면 낮아졌지만 여전히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인터넷과 동영상에 푹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학생들은 세계적으로 우수한 수준의 문해력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성인들이다.
OECD는 만 16~65세 성인들에 대해서도 PISA와 유사하게 언어능력, 수리력 및 문제 해결 능력을 측정하는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를 실시하고 있다. PIAAC의 특징은 동일 집단에 대해 10년 간격으로 조사를 반복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2012년 조사에서 25~34세였던 집단이 2022년에는 35~44세가 되는데 이 집단의 역량이 10년 사이에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조사하는 방식이다. 조사 결과, 우리나라는 문해력의 경우 500점 만점에서 249점으로 OECD 평균 260점보다 11점 낮게 나타났다. 학생들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성인들은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10년 사이에 20점 이상 점수가 하락하면서 수준이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한 국가로 분류됐다.
PIAAC에서 드러난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모든 연령대에서 가장 가파른 문해력 하락세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해서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면 일정 시점까지 문해력은 상승해야 한다. 그리고 중년 및 고령층이 되면 육체 능력의 감퇴와 더불어 문해력이 감소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성인 문해력은 모든 연령대에서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여주며 특히 연령이 높아질수록 하락 폭은 더 커진다. 핀란드·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국가들의 경우 젊은 층에서는 문해력이 오히려 좋아지며, 연령이 높은 경우에도 비교적 완만한 감소세를 보여준다. 일본의 경우 젊은 층에서는 일정 부분 향상을 보이다가 이후 감소하지만 우리나라보다는 덜 극단적인 패턴을 보여준다.
이러한 차이는 대한민국 사회가 문해력과 관련한 구조적 문제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관계 기관과 전문가들의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우리 사회 거의 모든 곳에서 글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각종 규정과 절차는 무시되기 일쑤이고, 업무를 하면서 매뉴얼을 뒤적이는 사람은 눈치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말보다 글의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곳에서 문해력이 높아질 가능성은 없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인정하고 직시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낮은 성인 문해력은 우리 사회가 큰 문제를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낮은 문해력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협한다. 지식정보 사회에서 문해력이 핵심적인 역량임을 고려해보면 우리는 지난 20년간 문제를 방치해오면서 미래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해왔다. 그 결과, 가짜 정보와 소문에 휘둘리며 의사 결정권자가 엉뚱한 판단을 내리거나,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있다. 가장 빠른 고령화를 겪고 있는 우리로서는 남은 시간이 없다.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 방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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