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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일기장’(김영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2. 6. 15:47

팩트만 나열한 '청년 다산'의 일기…

훗날 사용할 알리바이 증명이었다

정민 한양대 교수 '다산의 일기장' 출간

입력 2024.12.04. 00:38
 
 
 
 
                                        3일 간담회에서 저서 ‘다산의 일기장’을 설명하는 정민 한양대 교수. /뉴스1

 

‘지엄한 교지를 받고 금정찰방에 제수되었다. 오후 3시쯤 출발해서, 가는 길에 우상 채제공에게 들러 절을 올렸다. 청파에 이르러 이 판서(이가환)와 만나 작별하였다. 20리를 가서 승방점에서 묵었다.’ 다산 정약용이 기록한 ‘금정일록’의 1795년 7월 26일 내용이다.

고전학자 정민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주석을 붙여 완역한 ‘다산의 일기장’(김영사)을 출간했다. 1795년(정조 19년) 천주교 탄압이 심해진 상황에서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조정이 체포하려다 놓친 사건(을묘박해)에 다산이 연루되면서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던 시기를 다룬 ‘금정일록’, 1796년 금정에서 겨우 상경한 뒤 실직 상태에 있던 명례방 시절의 ‘죽란일기’, 같은 해 규영부 교서관으로 복귀했을 당시를 담은 ‘규영일기’, 이듬해인 1797년 외직인 황해도 곡산부사로 밀려나기 직전까지 썼던 ‘함주일록’ 등 다산의 4종 일기를 담았다.

정 교수는 총 4426자 분량의 일기를 ‘다산시문집’과 비교·대조하며 행간에 깃든 속내를 파헤치면서 임금과 천주교 사이에서 고뇌하던 다산의 모습을 비췄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서학과 맞닿아있을 때 어떤 파장을 일으켰는지 다산만큼 중요한 사례는 없습니다. 학계 일부에서는 다산이 실학자로서의 정체성을 천주교가 훼손한다 하고, 천주교계에서는 그를 배교자로 보고 있는데 양측에서 배척하는 그 중간에 진실이 있다 생각했죠.”

1974년 존재가 처음 알려진 4종의 일기는 그동안 번역은 물론 논문 하나 없었다. 다산의 일기는 육하원칙을 기계적으로 지킨 ‘팩트’의 나열로 적혀있다. 1795년 8월 17일 금정일록에 ‘김복성을 잡아다가 초사하여 다짐을 받았다’, 8월 30일 ‘김복성이 또 네 사람을 이끌고서 왔기에 함께 다짐을 받았다’고 적혀있다. 충청도 천주교 지도자인 김복성은 당시 충청도관찰사도 못 잡은 인물이었는데, 내려온지 보름도 안된 금정찰방이 김복성은 물론 같이 활동하던 넷을 잡은 것이다. 정 교수는 “일찍이 다산이 전국의 천주교 조직과 연결이 있었고, 김복성과 밀거래를 통해 자신은 공을 세우고, 잡힌 이들은 금방 풀려나 면죄부를 받았다”며 “천주교 지도자를 잡아 자수케했다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배교 활동을 입증한 셈”이라고 했다. 다산은 일기를 ‘알리바이’로서 증거를 남기는 방식으로 전략적으로 일기를 썼다는 것이다.

 

정조가 아끼던 다산을 충청도의 한직 ‘금정찰방’으로 좌천시킨 이유도 일기에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일기에 등장하는 편지를 보면, 정조가 내린 실제 임무는 천주교도 교화와 검거였다. 천주교를 배교했다는 입증을 하라는 무언의 교지인 셈. 남해나 함경도 오지가 아닌 충청도로 보낸 것 또한 일종의 여론 무마용이었던 것이다. 정 교수는 “탕평책을 펼치던 정조는 남인 채제공 그룹을 내세워 노론 벽파를 견제해야 했는데, 채제공 그룹 핵심 참모가 을묘박해에서 사학삼흉으로 지목당한 정약용, 이가환, 이승훈이었다”며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보내 여론을 잠재우고, 그에게 재기의 기회를 준 것”이라고 했다.

정 교수는 33~35세 다산이 쓴 일기에는 자신의 업적에 대해서 과대 포장을 하고 예민한 부분은 축소시켰다고 했다. 배교를 했다면서도 조정이 잡으려던 주문모 신부를 탈출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정조의 신임을 다시 얻고자 천주교도를 잡아들이는 척했던 모습이 나온다고 한다. 그동안 위인으로서의 다산과는 다른 자기 모순적인 인간 다산의 면모였다. “다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분노하고 싸우기도 했던 젊은 다산이 있어서 강진 시절 다산이 탄생한 것이죠. 다산의 시대에도 오늘날처럼 똑같이 치열한 시대였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