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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낮 같은 세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7. 25. 10:51

밤이 낮 같은 세상

중앙일보
입력 2024.07.25 00:24

업데이트 2024.07.25 01:32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일생동안 조선이라는 나라를 요순시대의 세상이 되도록 국가를 개혁하고 변화시키려는 꿈을 안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17세 때 아버지의 임소였던 전라도 화순에 가서 살았다. 중형 정약전과 함께 화순 인근의 동림사에서 공부할 때부터 두 형제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요순시대를 만들자는 토론을 했노라고 기록을 남겼다. 소년 시절부터 둘은 나라를 만드는 꿈을 안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례’를 모범으로 한 ‘경세유표’
다산의 저서 500여 권은 따지고 보면 모두 좋은 나라 만들기를 위한 그의 정책을 논한 책이지만, 그중에서도 집중적으로 법과 제도를 개혁하여 요순시대를 구현하자는 책은 바로 『경세유표』라는 그의 대저였다. 요순시대의 법과 제도를 정리해 놓은 책은 다름 아닌 주공(周公)의 저작으로 알려진 ‘주례(周禮)’인데, 다산이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조선에 적용할 수 있는 법과 제도의 개혁안을 정리해낸 책이 『경세유표』였다.

법·제도 개혁안 정리 ‘경세유표’
털끝까지 썩은 조선 개혁 열망
“저절로 태평성대는 틀린 생각”
거짓·불의 없는 밝은 세상 꿈꿔


김지윤 기자

장문이자 명문인 『경세유표』의 서문을 읽어보면, 털끝 하나 썩지 않은 부분이 없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그대로 두면 반드시 망한다고 여기고 통째로 뜯어고치자는 주장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요즘 그 서문을 다시 정독하면서 그렇게 간절하게 나라를 개혁해야 한다는 뜻에 공감하고 있다. 오늘 우리 현실과 비교해보면서 『경세유표』의 가치를 더욱 실감할 수밖에 없다.

다산에게는 동포·형제요, 평생의 지기였던 중형(仲兄)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귀양 살고 있었다. 편지를 통해 요순시대를 만들자는 이론을 수없이 토론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요순의 정치는 순박하고 태평하여 천하가 저절로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치입니다”(上仲氏)라고 말했다. ‘무위이치(無爲而治)’라는 논어의 글을 잘못 해석하고, ‘희희호호(熙熙皥皥)’라는 공자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나라가 잘못됐다는 주장까지 폈다. 요순시대는 임금의 덕이 높아 다스리는 일 없이도 저절로 태평성대가 왔다는 잘못된 생각, 희희호호도 순박하고 태평스럽다고 해석해서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정치는 제대로 안 돼

‘하는 일 없이도 다스려졌다’는 요순은 실제로는 22명의 훌륭한 신하들에 일을 맡겨 제대로 통치하고, 그들을 독려하고 감시하는 물샐 틈 없는 정치를 했다. 이 때문에 하는 일 없이 보여도 제대로 천하가 다스려진 것이다. 이를 모르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정치가 제대로 되었다’고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여 온 세상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다산의 탄식이었다. ‘희희’란 밝다는 것이고 ‘호호’는 희다는 뜻이니, 희희호호는 만 가지 일이 잘 다스려져 밝고 환하여 털끝 하나 터럭 하나만큼의 악이나 더러움도 숨길 수 없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세상이 저절로 순박하고 태평스럽게 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우리는 희희호호했던 요순시대의 정치를 그리워한다. “요즘 세속에서 말하는 ‘밤이 낮 같은 세상(俗云夜如晝之世)’이 요순시대였다”라면서, 숨기고 감추고 거짓말을 일삼아 밤처럼 어두운 세상은 절대로 좋은 정치일 수 없음을 간절하게 말하였다. 밤이라도 낮처럼 밝아 어떤 거짓이나 불의한 일이 숨겨질 수 없는 세상이라야만 잘하는 정치임을 강조했다고 보인다.

지금의 세상은 어떤가. 국민이 신뢰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신하들이 적임의 임무를 맡아 제대로 하는 경우가 몇 곳이나 되는가. 감사원을 맡은 책임자들이 과연 제대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가. 방통위의 책임자가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여 국민의 신임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국민권익위원회를 맡은 책임자, KBS와 YTN을 맡은 책임자들, 부여된 임무들을 제대로 수행하여 그 정도면 됐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용인(用人)을 제대로 하여 임금은 가만히 앉아 있는 듯해도 통치가 제대로 되어 간다는 요순시대의 정치를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밤이 낮과 같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고대한다. 밤이 낮처럼 밝고 환하게 모든 의혹이 풀리기를 우리는 또 고대하고 바란다. 장막으로 가려져 진실을 알 수 없는 밤만 계속되는 오늘, 환하게 밝혀줄 수는 없단 말인가. 채 상병 의혹, 이태원 참사 의혹, 주가조작 의혹, 이 어두운 밤만 계속되는 현실, 어떻게 해야 밤이 낮과 같은 희희호호의 세상이 올 것인가. 어둠을 몰아내고 장막을 걷어치우자. 의심, 의혹으로만 계속 남아 있는 지금, 『경세유표』의 내용처럼 국가를 완전무결하게 개혁할 수는 없다 해도 어두운 밤에 새벽이라도 오게 해야 하지 않은가. 제발 진실을 밝혀 환한 낮의 세상이 오도록 하자.

박석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5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