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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훌쩍 다가온 겨울 초입까지 수굿이 머무른 가을의 흔적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1. 19. 15:29

[나무편지]

훌쩍 다가온 겨울 초입까지 수굿이 머무른 가을의 흔적들

  ★ 1,260번째 《나무편지》 ★

   ‘가을이 깊어졌다’고 쓰기에는 날짜가 좀 지났고, ‘겨울이 다가왔다’고 쓰기에는 날씨가 그리 춥지 않은 주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말 지나자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습니다. 이제 추워질 모양입니다. 주 중반에 들면 낮 기온이 조금 오른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지난 주처럼 20도까지 오르지는 않겠지요. 이제 달력을 봐도 십일월 하순에 접어드니 추워질 일만 남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여름이 견디기 힘들 만큼 무더웠던 만큼 이 겨울은 여느 겨울보다 추울 것이라고 하는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즈음의 날씨를 어느 하나도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지난 주말 붉게 물든 천리포 바닷가 숲의 나무들을 만났습니다. 상록성 나무가 훨씬 더 많은 천리포수목원 숲은 가을에 더 아름답습니다. 화려한 꽃들로 풍성해지는 봄과는 다른 아름다움입니다. 온통 붉게 물든 단풍나무 숲과 다르게 초록의 싱그러운 늘푸른나무들 사이에서 붉은 빛과 노란 빛으로 가을을 보내는 나무들의 대비는 여느 숲에서 볼 수 있는 풍경과 사뭇 다릅니다. 아마도 자연 상태의 숲이라면 이만큼 다양한 빛깔을 즐기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1만7천 종류의 풀과 나무들이 어우러지며 빚어내는 총천연색 가을 풍경입니다. 긴 세월 동안 사람의 손에 의해 정성껏 가꾼 인공(人工)의 숲인 까닭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의 가을 숲도 이 즈음 여느 곳을 파고드는 기후 붕괴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천천히 수목원 숲으로 난 길을 걸으며 풀과 나무들을 톺아보면 기후 붕괴의 영향은 또렷이 느낄 수 있습니다. 숲 바깥에서는 울긋불긋 물든 단풍의 아름다움으로 가을 정취가 깊게 느껴지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여름 지나며 피어나는 털머위, 가을 초입부터 화려하게 피어나는 개미취 종류의 꽃들은 꽃가루받이를 온전히 마쳤지만, 아직 꽃잎을 그대로 달고 있습니다. 그 곁에는 이른 겨울에 피어나는 애기동백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심지어 애기동백 꽃의 상당 부분은 낙화까지 마쳤습니다.

   붉은 단풍 그늘 아래에 늦여름부터 초겨울까지의 시간이 하나의 순간에 공존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름의 끝을 걷다가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초겨울 추위를 이겨내며 피어난 겨울 꽃을 만나게 되고, 다시 한 고개 넘으면 단풍 짙은 가을을 맞이하게 됩니다. 여름이 길어진 탓에 다른 계절들이 촘촘히 훑이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결과겠지요. 사계절을 대략 석 달씩 나누어 즐기던 우리 땅의 계절의 시간은 이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특히 여름과 겨울 사이에 끼어든 계절 가을의 풍경은 뭐라 이야기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흘러갑니다. 겨울 보낸 풀과 나무들이 꽃들을 피워올리는 봄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여름과 겨울 사이에 짧게 더 짧게 우리 곁을 스쳐지날 겁니다.

   그래도 나무들은 제 할 일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아무리 날씨와 계절이 당황스러울 만큼 바뀐다 해도 이 땅에 살아남기 위한 원초적 본능에 따른 생존 전략은 치밀합니다. 짧아지면 짧아진 대로 서두르고, 길어지면 길어진 대로 천천히 살아갑니다. 지난 여름이 천천히 긴 꼬리를 보이던 즈음에 띄웠던 《나무편지》에서 ‘적합도’라는 진화생물학 개념을 들먹인 적 있는데요. 나무들은 힘에 겨울지라도 지금 이 땅에 살아남기 위한 적합도를 높이기 위해 애면글면 살아갑니다. 말없이 이 땅의 변화에 대해 치열하게 생존의 전략을 변화해나가는 나무의 살림살이가 고맙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오늘 《나무편지》에 담은 사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맨 위의 사진은 “천리포수목원 가을 풍경의 치명적 아름다움”이라고 늘 표현해 온 ‘팜파스그라스’입니다. 한창 때가 지났기에 빛깔은 조금 칙칙해졌지만, 여전히 하늘거리는 꽃이삭은 풍요롭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작은연못 한가운데에서 자라는 ‘낙우송 종류’입니다. 사진으로는 잘 구별되지 않습니다만, 나무가 서 있는 자리가 연못 한가운데입니다. 물 속에서도 오랫동안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나무입니다. 낙우송은 침엽수입니다만, 여느 침엽수와 달리 가을이면 붉게 단풍 들고, 단풍 든 잎은 곧 낙엽을 하는 특별한 나무입니다. 올 가을 낙엽송의 단풍은 유난히 아름답게 붉습니다.

   세 번째 사진은 ‘블루베리’입니다. 이 블루베리는 우리 수목원 설립자인 민병갈 님이 고향이 그리울 때에 생각했다는 나무입니다. 고향의 어머니가 지어준 음식 가운데에 가장 생각나는 게 ‘블루베리 잼’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그가 고향에서 가져와 심어 키우며, 늦여름이면 열매를 따서 잼을 만들어 먹던 나무입니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이미 이 땅을 떠났지만, 나무는 남아 그의 옛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면서 가을이면 이처럼 붉게 단풍 듭니다. 아, 참! 이 나무는 블루베리 가운데에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나무입니다.

   네 번째 사진은 ‘오구나무’입니다. 가끔은 ‘조구나무’라고 부르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그건 새를 뜻하는 한자 ‘조(鳥)’와 까마귀를 뜻하는 한자 ‘오(烏)’가 헷갈리는 때문입니다.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 정한 추천명은 ‘오구나무’입니다. 다섯 번째 사진은 이 가을 천리포수목원 단풍 종류 가운데에 가장 아름다운 단풍나무 종류인 ‘일본단풍’입니다. 여전히 붉은 단풍이 아름답습니다. 여섯 번째 사진은 뒤늦게 피어나 아직 시들지 않은 ‘석산 종류’의 꽃입니다. 곁에 있는 다른 개체들은 이미 꽃 지고 초록 잎이 무성하게 올라왔는데, 홀로 붉은 꽃을 매달고 있었습니다. 일곱 번째 사진은 조금 일찍 피어난 ‘애기동백 종류’의 꽃입니다. 애기동백도 종류가 여럿 있는데요. 그 대부분이 벌써 꽃을 피우고 지금 한창 낙화를 진행 중입니다.

   여덟 번째 사진은 이 즈음 어디에서나 붉은 핏빛 단풍으로 아름다운 ‘화살나무 종류’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의 울타리를 따라 줄지어 심은 이 화살나무는 ‘콤팍투스’라는 품종명을 가진 화살나무 품종입니다. 예전에는 수목원 경내의 초가집 근처 숲 그늘, 그리고 큰밭 근처에도 우리 화살나무가 있었는데, 오래 살기 어려운 그들은 이미 수명을 마쳤고요. 지금은 콤팍투스 화살나무 종류가 우리 수목원의 가을 풍경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바로 위의 아홉 번째 사진은 예전에 우리 수목원의 사무실로 이용했고, 지금은 ‘민병갈기념관’으로 불리는 건물 앞의 ‘미국풍나무’의 붉은 잎입니다.

   비 내리고 날 차가워진다더니, 정말 이른 아침의 날씨가 무척 차갑습니다. 건강 주의하시면서, 바짝 다가온 이 겨울 평안히 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11월 18일 아침에 1,260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