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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아직은 노란 가을 빛깔을 잃지 않은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 앞에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1. 4. 13:37

[나무편지] 아직은 노란 가을 빛깔을 잃지 않은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 앞에서

  ★ 1,258번째 《나무편지》 ★

   긴 여름 지나고 아침 기온 떨어지면서부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을을 맞이했습니다. ‘설렘’이 아니라 ‘조마조마’였습니다. 거리의 크고 작은 나무들에는 단풍 빛깔이 조금씩 올라왔지만, 비교적 몸피가 큰 나무의 단풍은 그보다 좀 늦습니다. 단풍 빛이 제대로 오르려면 제 몸 안에 든 물을 먼저 덜어내야 하는데, 워낙 많은 물을 덜어내야 하는 큰 나무들에는 시간이 더 필요한 때문이죠. 가까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의 단풍이 궁금했습니다. 짬 나는 대로 찾아보았지만, 아직 만족하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마음을 더 초조하게 한 건, ‘인천의 큰 나무’를 주제로 연재 중인 인천시의 어느 정기간행물에 출고해야 할 칼럼에 소개해야 할 나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의 올 가을 단풍 상태를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번 《나무편지》에서도 말씀 올렸듯이 지난 해의 ‘초록 낙엽’ 소동도 있었고, 올에는 아예 ‘초록 단풍’이라는 새로운 용어까지 미디어의 기사 제목에 등장할 정도이니까요. 예년같았으면, 이 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단풍을 보여준 얼마 전의 사진을 가지고 있으니, 그 사진을 첨부하며 “올 가을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단풍”이라고 쓰겠지만, 그리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즈음 우리 곁을 떠도는 ‘기후 붕괴’의 망령 때문입니다. 그 동안 대개의 경우, 나무 이야기를 칼럼으로 쓸 때에는 지면에 반영되는 시간을 감안해서 출간 시기보다 이르게 원고를 마감하면서, 지난 해 혹은 지지난 해의 사진을 첨부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럴 수 없게 됐습니다. 단풍은 제대로 들지, 그냥 초록낙엽을 하고 말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의 올 가을 단풍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나무의 올 가을 사정을 이야기할 수 없어, 하루하루 나무를 찾아다니며 조마조마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최종 마감일이었던 어제 다시 나무를 찾아갔습니다. 예전의 가장 화려했던 순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노란 빛깔이 오르긴 했습니다. 오늘 《나무편지》에 담은 사진이 바로 어제의 사진입니다. 사진으로 보니,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예전 사진과 비교하면 형광 빛이 덜 올라온 상태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전체 나뭇잎 가운데에 30퍼센트 정도는 여전히 초록 잎을 달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노란 빛깔이 우세하다보니, 사진에서는 노란 색에 묻혔지만, 실상은 여전히 초록 빛깔인 잎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지난 계절에 비해 무수한 잎 위로 노란 빛깔이 오른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꼼꼼히 돌아보면 여전히 초록 빛을 간직한 잎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가지고 있는 몇 해 전 가을에 이 나무가 보여준 형광빛 노란 색의 단풍에는 못 미친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이 나무가 보여주었던 최고의 단풍 상태는 아닌 게 분명합니다. 그래도 이만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습니다. 어제 저녁의 어느 신문에는 “주말을 맞아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의 단풍을 즐기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조금 과장한 표현의 기사까지 올라왔습니다. 다행히 이른 아침, 해 뜬 직후에 찾아갔을 때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번거로움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마감할 칼럼의 원고를 쓰면서 나무가 서 있는 인천 지역의 기온 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10월의 경우, 셋째 주까지 낮 기온이 20도 아래로 떨어진 날이 2일, 6일 18일, 단 사흘 밖에 없습니다. 20일이 지난 뒤에도 낮 기온은 19도 언저리에 머물렀고, 26일에는 다시 23.9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11월 들어서도 엊그제인 2일에는 23.5도까지 올라갔고, 일요일인 어제는 22.6도로 여전히 ‘완연한 가을’이라고 하기에는 이른 상태입니다. 나무 입장에서 보면 겨울 채비는 이르다고 판단할 겁니다. 당연히 조금이라도 더 광합성을 하려고 애쓰겠지요. 그런데 예보대로라면 내일 오전에 비 내리고 모레부터는 아침 기온이 5일은 4도, 6일과 7일은 3도까지 떨어집니다. 갑자기 3도까지 떨어진 아침 날씨에 나무는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0도가 되기 전, 즉 물이 얼 만큼 추워지기 전에 제 몸에 들어있는 물을 덜어내야 하거든요.

   사람이 조마조마하게 단풍을 기다리는 마음과 무관하게 나무는 시급히 물을 덜어내야 합니다. 물을 덜어내는 과정에서 단풍이 드러나기야 하겠지만, 서두르다보면 나무는 사람에게 화려한 단풍을 보여줄 시간을 최소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곧바로 낙엽을 하게 될 겁니다. 지난 해에 그토록 화제가 됐던 ‘초록 낙엽’ 현상이 다시 화제로 떠오를 가능성이 생기는 겁니다. 지금 예보로 보면 다시 목요일쯤부터 다시 기온이 10도 안팎으로 약간 오르게 돼 있지만, 일기예보를 확인할 슈퍼컴퓨터를 갖추지 못한 나무는 예년의 경험대로 3도로 떨어진 날씨에 맞춰 서둘러 겨울을 대비해야 합니다. 그건 그의 생명을 지키는 절박한 대책입니다.

   11월에 들어왔지만, 이제 겨우 단풍이 시작됐다는 한라산에는 바로 어제 200년에 한 번 내릴 만큼 큰 비가 내렸다는 뉴스도 있습니다. 한라산 진달래밭에는 무려 260밀리미터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비가 한꺼번에 내린 상태랍니다. 중국 남부 해안 지역을 거치는 바람에 ‘온대저기압’으로 약화한 태풍 콩레이가 몰고온 비구름의 영향이었습니다. 그나마 태풍의 세력이 약해진 바람에 우리나라에 큰 영향이 없었던 게 다행이랄 수 있습니다만, 하마터면 우리는 사상 최초로 11월의 태풍을 맞을 뻔했습니다. 갈수록 우리 곁의 기후 붕괴 현상은 놀랍기만 하고, 톺으면 톺을수록 아찔해집니다. 우리 곁의 단풍 빛깔이 갈수록 투미해지는 상황 또한 나무를 통해 지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신호입니다.

   긴 여름과 짧아진 겨울, 지겨울 만큼 길었던 지난 여름에 줄곧 해왔던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여름은 더 더워질 것이고, 겨울은 더 추워질 것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름에서 겨울로 가는 가을은 몸으로 느낄 겨를도 없이 빠르게 스쳐지날 것이고, 따라서 가을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하는 단풍을 즐길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 겁니다.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 이야기를 담은 칼럼을 마감하면서 “올 여름이 가장 시원한 여름일 겁니다”라고 이야기했던 어떤 기후학자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본따서 나는 칼럼에 “지금 우리가 보는 단풍이 아마도 앞으로의 어떤 단풍보다도 가장 화려한 단풍”이 될 것이라고 썼습니다.

   아직은 보는 사람들을 뿌듯하게 하는 가을의 〈인천 장수동 은행나무〉가 보여주는 단풍이 그래서 더 소중할 수밖에요.

   고맙습니다.

2024년 11월 4일 아침에 1,258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