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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지금 단풍 빛깔은 어떤까요? 열매와 씨앗은 잘 영글었나요?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0. 22. 11:32

[나무편지] 지금 단풍 빛깔은 어떤까요? 열매와 씨앗은 잘 영글었나요?

  ★ 1,256번째 《나무편지》 ★

   도심을 흐르는 강변을 걸으며 올 가을 단풍을 생각했습니다. 시민의 힘으로 지어낸 ‘부천 시민의 강’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이맘 때쯤이면 언제나 마음 설레며 기다리는 게 단풍입니다. 기상청의 예보대로라면 설악산의 단풍 절정기는 10월 20일, 어제이고 북한산의 절정기는 다음 주인 28일이며, 단풍의 최대 명소인 정읍 내장산의 절정기가 가장 늦어서 그 다음 주인 11월 5일입니다. 치악산과 지리산이 23일로 예고된 것까지 살펴보면 이번 주는 한반도 전체가 단풍으로 울긋불긋해지는 시기입니다. 마음 설레야 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에 비해 올 가을의 단풍을 향한 설렘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단풍 소식을 알리는 미디어의 뉴스도 예년에 비해 적은 편입니다. 몇몇 단풍 뉴스에 첨부된 사진도 지금 이 시간의 사진이 아니라, 몇 해 지난 사진이 대부분이기도 하네요.

   지난 해 이즈음을 기억하시나요? ‘초록 낙엽’이라는 말이 온갖 미디어에 떠올랐던 지난 해 가을 말입니다. 단풍 빛깔이 채 드러나지 않은 초록 빛 잎사귀가 서둘러 추락하는 상황을 이야기한 겁니다. 단풍 들기 전에 낙엽부터 하는 일이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만, 지난 해에는 유난스레 초록 낙엽이 많았기 때문에 화제가 되었던 거죠. 단풍 빛깔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떠오르는 게 아니라 기온의 변화를 나무가 알아채면서 차츰 겨울을 채비하며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여기에서 기온 변화는 단지 하루의 한 순간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하루의 평균기온을 보아야 합니다. 기후학자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방식대로 이야기하자면 하루 최고기온과 최저기온의 평균기온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어떠셨나요? 한낮에 혹시 에어컨을 켜신 분은 없으신가요? 널찍한 실내에서라면 몰라도 좁다란 자동차 안에서라면 아마도 지난 주초에 에어컨을 켜신 분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월요일 화요일 이틀 내내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하루 평균기온만으로 봐서는 아직 나무가 겨울 채비를 서두르지 않을 상황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다가 주말에 비 내리고 서늘해진 날씨! 나무들은 지금 당황하고 있을 겁니다. 아직 겨울 채비를 채 하지 못했는데, 하루 평균 기온이 갑자기 떨어졌으니 겨울 채비를 위한 시간이 모자라게 됐습니다. 겨울을 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단풍은 겨울 채비의 준비 단계입니다. 나무 안에 든 물이 낮은 기온에 얼지 않도록 미리 덜어내는 과정에서 초록빛 엽록소가 비활성화하면서 잎 안에 든 다른 빛깔들이 겉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거지요.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모자랍니다. 빛깔을 올리는 것보다 더 급한 게 줄기 표면 가까이에 있는 물관의 물을 덜어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서든 잎을 먼저 떨어뜨려야 합니다. 지난 해 가을의 ‘초록 낙엽’은 그랬던 겁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흘러가며 하늘은 나무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락할까요? 지독했던 지난 여름이 길었던 만큼 가을에서 겨울까지의 시간은 짧아졌습니다. 곧 겨울이 다가옵니다. 가을에서 겨울까지의 시간에서 짬을 찾지 못한다면 올 가을에도 나무들은 단풍보다 낙엽을 서둘러야 합니다. 몸 안에 든 물을 덜어내는 데에 가장 빠른 방법은 잎을 떨구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건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흐름은 점점 더 빨라진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러면 앞으로 그 동안 우리가 보았던 그 아름답던 단풍을 다시 보기 어렵다는 이야기 아닌가 싶은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미 우리는 여름이 길어지고 겨울은 짧아질 거라는 이야기를 줄곧 해왔잖아요. 그 사이에 든 가을 역시 짧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같은 신호를 우리에게 보내주었습니다. 따뜻한 남부지방에서만 자라던 이팝나무가 서울에서 가로수로 심어져 해마다 봄이면 환장할 만큼 아름답게 피어나는 상황도 분명 나무가 우리에게 보여준 기후 변화의 시그널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구가, 그리고 나무가 보내오는 그 신호들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냈다는 겁니다. 가장 심각한 건, 우리가 그 신호를 알아챌 때는 이미 돌이키기 힘들 만큼 너무 멀리 지나왔을 때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땅에서 벌어지는 ‘초록 낙엽’은 분명히 나무가 우리에게 보내온 암울한 신호였습니다. 돌이키기에는 늦은 게 분명합니다만 ‘늦어서 포기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길’을 찾아야 합니다.

   단풍 빛깔은 투미해졌지만, 나무는 그래도 자손 번식에 머뭇거리지 않고 씨앗을 맺었습니다. 진화생물학에서 이야기하는 ‘적합성’이라는 개념은 그래서 이 즈음에 다시 한번 꺼내 들어야 할 개념입니다. 나무는 암울한 이 땅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적합도’를 높여 이 땅에 살아갈 방도를 치밀하게 찾아나가는 중입니다. 사람도 더 늦기 전에 이 땅에 나무와 더불어 살기 위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시민의 강’ 곁에서 씨앗을 피워올린 나무들처럼 ‘적합도’를 높여야 합니다. 삭막한 도심 아파트 단지에 순전히 시민의 힘으로 지어낸 ‘시민의 강’ 곁을 걸으며, 나뭇가지에 조롱조롱 영글어가는 열매, 씨앗을 고맙게 바라본 까닭입니다.

   오늘 《나무편지》의 사진들은 잘 아시겠지만, 그래도 사진설명 덧붙이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맨 위의 사진은 부천 시민의 강 주변에 서 있는 산사나무 잎이고, 두 번째 사진은 강변에 서 있는 낙우송의 기근이며, 세 번째 사진은 낙우송의 열매이며,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사진은 좀작살나무의 보랏빛 열매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사진은 아직 채 익지 않은 산수유 열매입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10월 21일 아침에 1,256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