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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톨스토이, 디아스포라까지 … 문학의 계절에 바라본 큰 나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10. 14. 16:33

[나무편지] 노벨, 톨스토이, 디아스포라까지 … 문학의 계절에 바라본 큰 나무

  ★ 1,255번째 《나무편지》 ★

   기적처럼 특별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글문학이 세계문학계의 최고봉에 오른 한강 사건의 감흥은 오래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꼭 한 달 전에 띄운 《나무편지》에서 지난 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노르웨이의 거장,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을 이야기하면서 “원어의 리듬감과 번역된 한글 리듬감의 차이” 때문에 작품의 깊이를 온전히 느끼기 어려웠다고 했는데요. 이제 우리는 당당히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을 원어 그대로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는 말도 취소해야 하겠습니다. 그 동안의 수상자 면면을 보자면 “그들만의 잔치”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꺼낸 말이었는데, 이제 우리가 당당히 그 잔치의 중심이 되었으니까요. 더없이 자랑스럽고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한강의 소설은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루어진다는 게 인상적입니다. 한 단락 한 단락을 떼어놓고 행을 적당히 바꿔 적으면 그대로 ‘시’라 해도 될 정도입니다. 철학과 스토리는 둘째 치고 문장 하나만으로도 굉장합니다. 미처 다 보지 못한 그의 작품들도 차례대로 찾아 읽어야 하겠습니다. 한꺼번에 한강의 책을 구하려는 분들이 몰리는 바람에 지금은 ‘예약구매’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네요. 하긴 급하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이에 다른 읽을 것도 챙기면서 천천히 전 세계가 인정한 우리 문학의 탁월한 수준을 함께 즐기고 자랑스러워 해야 하겠습니다. 모두가 ‘한강’에 집중해 있는 동안, ‘김주혜’라는 또 하나의 우리 작가(한국계 미국인)가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톨스토이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수상작인 《작은 땅의 야수들》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땅에서 펼쳐진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자랑스러운 사건들입니다. 이 참에 우리의 독서 문화가 활짝 피어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강의 수상 소식이 알려지기 전에는 오늘의 《나무편지》에 〈괴산 각연사 보리자나무〉를 이야기하면서 덧붙여 아프가니스탄 작가의 묵직한 장편소설 두 권을 소개하려 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눈물 겨운 인생살이를 이어간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600페이지가 넘는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는 장편소설입니다. 하지만 하룻만에 삼십만 명 넘는 독자가 관심을 집중할 만큼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지금 다른 어떤 소설을 이야기하는 건 죄다 별무소용이지 싶네요. 우리 글로 쓰인 우리의 작품이 세계 최고의 작품으로 우뚝 선 상황에서 당분간은 한강, 그리고 우리 문학에 집중하고 손바닥이 닳도록 박수를 치는 게 마땅한 일이 될 겁니다.

   짧게 쓰기로 마음 먹은 오늘의 《나무편지》에 담은 사진의 나무는 〈괴산 각연사 보리자나무〉입니다. 피나무과(Tiliaceae)에 속하는 보리자나무 Tilia miqueliana Maxim. 를 우리나라에서는 절집에서 ‘보리수나무’라는 이름으로 많이 심어 키웁니다. 보리자나무 뿐 아니라, 피나무과의 다른 나무들도 ‘보리수나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석가모니부처의 열반 과정과 관련한 관습이지만, 실제로 석가모니부처는 우리나라에서는 자라지 않는 인도보리수 Ficus religiosa L. 나무그늘에서 해탈했다고 합니다. 보리자나무나 피나무 종류는 모두 석가모니부처의 열반과 관련이 없는 나무입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엄연히 ‘보리수나무 Elaeagnus umbellata Thunb.’라는 이름의 작은키나무가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절집에서는 여전히 ‘피나무 종류’의 나무들을 ‘보리수나무’라고 부릅니다.

   〈괴산 각연사 보리자나무〉도 ‘보리수나무’라고 불리는 나무입니다. 나무 앞에 세운 보호수 표지석에 분명히 ‘보리자나무’라고 했지만, 여전히 절집 사람들은 ‘보리수나무’라고 부릅니다. 2013년에 지정번호 ‘괴산 121호’의 산림청 보호수로 지정한 〈괴산 각연사 보리자나무〉는 각연사의 비로전 앞에 서 있는 나무나이 350년의 큰 나무입니다. 나무높이가 18미터이며, 뿌리 부분에서부터 둘로 나뉜 줄기는 제가끔 1.2m 정도의 굵기로 자랐습니다. 두 개의 줄기는 20도 정도로 벌어진 뒤에 각각 수직으로 높이 솟아올라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오래된 전각 ‘비로전’과 잘 어울립니다. 보리자나무 가운데에는 산림청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단 한 그루의 나무인 소중한 자연유산입니다. 안타까운 건 해마다 눈에 들어올 정도로 나무의 생육 상태가 조금씩 나빠진다는 사실입니다. 얼핏 봐서는 무엇보다 복토에 원인이 있지 싶습니다만 보다 세밀한 조사와 대책이 필요하지 싶습니다.

   각연사는 괴산 칠성리에 솟은 해발 779미터의 칠보산 북쪽 ‘청석골’이라는 골짜기에 자리잡은 고찰입니다. 일곱 개의 보물을 간직한 산으로 알려진 칠보산의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2년에 유일대사(有一大師)가 창건한 고찰로 전해옵니다. 유일대사가 이 자리에 터잡고 절집을 짓는 중에, 아침이면 목재를 다듬을 때 나온 대팻밥이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답니다. 이를 수상히 여겨 밤 내내 지켜보니, 까치들이 대팻밥을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연못이 있었고, 까치들은 그 연못에 유일대사의 대팻밥을 내려놓았답니다. 연못에서는 신비로운 빛이 솟아나고 그 안에 석불이 있어서, 유일대사는 절집을 이 자리로 옮겨 짓기로 하고, ‘연못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으로 절 이름을 각연사(覺淵寺)라 한 겁니다. 연못에서 건져올린 불상이 바로 비로전 안에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입니다. ‘보물’로 지정한 국가유산입니다.

   창건에 얽힌 설화는 또렷이 전하는 절집이지만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놓인 비로전 앞의 랜드마크인 보리자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전하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무의 자리를 보아서는 필경 이 절집의 스님이 비로전 풍경을 더 아름답게 일구기 위해 일부러 심고 정성껏 키운 게 분명하지만 그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습니다. 처음에 나무를 심던 어떤 스님의 손길을 더 자세히 느끼고 싶은 마음이지만 어쩔 수 없지요. 350년 전쯤에 이 땅의 사람살이를 이어가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나무를 심고 키우는 일을 굳이 기록이나 이야기로 남길 만큼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일 테지요. 나무를 심고 키우는 일은 그때 그 사람들에게는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을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나무는 사람살이 곁에서 말없이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아, 참! 내가 사는 경기도 부천시의 소식도 하나 전해드리며 오늘의 《나무편지》 마무리하겠습니다. 부천시는 2017년에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가 지정한 ‘문학창의도시’입니다. 유네스코 창의도시는 문학, 영화를 비롯한 7개 분야를 지정해 운영하는데요. 우리 마을은 2017년 동아시아 지역 최초이며, 세계에서 21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도시로 지정됐지요. 그 기념으로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이라는 국제문학상을 운영, 해마다 수상작을 발표하는데요. 그 4회째인 올해의 대상에는 세네갈 출신의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Mohamed Mbougar Sarr)의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이 선정됐습니다. 노벨문학상 발표 이틀 전인 지난 8일의 발표입니다. 마침 지금 한창 빠져들어 읽는 중인 540여 쪽의 두툼한 장편소설인데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세네갈 출신의 위대한, 그러나 ‘감쪽같이 사라진 작가’와 그가 남긴 ‘사라진 작품’을 찾아가는 미스테리 형식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첫 단락, 첫 장부터 독자의 호흡을 장악하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우리의 작가, 한강 덕분에 오늘의 《나무편지》는 문학을 이야기하는 게 그리 이상하지 않게 생각되는 흐린 가을 날 아침니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은 단지 한강이라는 작가 한 개인의 성취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문학, 우리의 예술 수준이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지를 전 세계에 당당하게 선포한 우리 땅, 우리 모두의 위대한 성과입니다.

   하룻만에 30만권의 책이 독자를 찾아간 이 기적적인 사건이 단순한 이벤트로 그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앞으로 우리의 문화, 특히 우리의 독서 문화가 노벨상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1,255번째 《나무편지》를 띄우는 여기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학창의도시’ 부천시입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10월 14일 아침에 1,255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