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사람들이 세운 고려, 어떻게 지방을 차별했나
중앙일보
입력 2024.08.16 00:26
수도 개경에는 아무나 살 수 없었다
이익주 역사학자
지금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은 수도권(서울·경기·인천)에 산다. 좁은 지역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다 보니 수도권의 주택난, 교통난, 환경 오염, 쓰레기 처리 등 발생하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반면, 지방은 인구가 나날이 줄어들어 소멸을 걱정할 판이다. 수도권에 사는 사람을 지방으로 옮겨 살게 하면 양쪽 다 해결할 수 있는데,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수도권 집중이 단순한 공간 활용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과 지방의 뿌리 깊은 차별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역사적인 문제이다.
골품제 폐지, 지방 차별 없앴지만
행정구역 위계 엄격, 이사도 막아
사는 곳에 따라 사회적 지위 결정
비대해진 개경, 지역 차별의 정점
죄 지으면 개경서 추방 귀향형도
지방소멸 해법은 발상의 전환에
부족국가 합쳐지며 지방 차별 생겨
고려의 개경 지도. 궁성과 황성, 내성 바깥에 나성이 보인다. 나성까지가 개성의 영역이다. 서울대 학교출판부에서 출간한 『북한의 문화재와 문화유적』에 수록된 이미지. [사진 국가유산청, 연합뉴스]
아주 옛날 국가가 처음 생겼을 때, 그때는 인구 2000~3000명 규모의 도시국가였으므로 서울이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한국사에서는 이 단계를 청동기 시대의 부족국가 또는 성읍국가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뒤로 전쟁을 통해 여러 개의 성읍국가가 통합되어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로 발전했고, 통합의 중심이 된 성읍국가 자리가 서울이 되었다. 사로국이 있던 경주가 신라의 서울이 된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사로국 사람들은 통합 전쟁의 승리자로서 기득권을 인정받고 왕경인(王京人), 즉 서울 사람이 되었다. 신라의 신분제로 널리 알려진 골품제는 왕경인에게만 적용되었고, 지방 사람들은 골품 외로 편성되어 차별을 받았다.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백제도 왕경인이 지방민을 지배하는 나라였다(전덕재, 『한국고대사회의 왕경인과 지방민』). 여기에 서울과 지방 차별의 오랜 연원이 있다.
고려는 지방 사람들이 세운 나라였다. 왕건은 물론이고,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한 사람들도 모두 지방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나라를 세우고 골품제를 없앴다. 골품제 폐지는 진골과 6두품, 5두품, 4두품 간의 차별 폐지를 뛰어넘어 골품을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 즉 경주 사람과 지방 사람의 차별을 없앤 것이었다. 이것이 고려 건국의 역사적 의미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힌다. 하지만 역사의 발전에는 언제나 변화와 계승의 양 측면이 있다. 경주와 지방의 차별은 없어졌지만 서울과 지방의 차별이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는 새 서울 개경을 중심으로 새로운 지방차별 장치를 만들어냈다. 지방행정 제도를 정비하면서 경(京), 목(牧),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의 위계를 만들었는데, 이 위계는 과거에 왕건의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그 지방 사람들이 얼마나 협조했는지, 미래에 국가 운영에서 그 지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1960년대 ‘무작정 상경’이 사회 문제였다. 2019년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물. [사진 국가유산청, 연합뉴스]
경상도 안동의 사례가 기록으로 잘 남아 있다. 안동은 본래 고창군(古昌郡)이었는데,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 이 지방 사람들이 큰 도움을 줬으므로 후삼국 통일 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다. 군·현 아래로는 부곡(部曲), 향(鄕), 소(所), 진(津), 역(驛), 장(莊), 처(處) 같은 행정구역이 있었다. 처인부곡, 명학소, 용산처 등이 그것이다. 왕건에게 협조하지 않았거나, 산간벽지나 오지에 위치해서 쓸모가 적다고 판단한 곳들이었다. 지역 간의 위계야말로 고려 사회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개경은 지역의 위계를 초월해서 그 정점에 위치했다. 이것이 왕건의 고향으로서 고려의 서울이 된 개경이 500년 동안 누린 독점적 지위였다.
지역 간 위계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특히, 군현 이상과 부곡 등 지역에 사는 사람들 간에 차별이 심했다. 부곡에 사는 사람들은 군현 사람들의 3대 의무, 즉 조세(租稅, 농사를 지어 생산량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것), 공부(貢賦, 지방 특산물을 현물로 내는 것), 역역(力役, 군대에 가거나 성 쌓기, 길 닦기 등에 동원되어 일하는 것) 외에 왕실 농장을 경작하거나 광산에서 일하거나 역마를 관리하는 등 추가 부담을 졌다. 생활이 더 어려웠지만, 국가에 더 많은 부담을 지는 이 사람들이 오히려 차별받고 천대받았다.
그럼 이사를 하면 되지 않나? 고려 시대에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결혼을 하거나 출가해서 스님이 되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지만, 관청에 신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했다. 특히, 부곡에 사는 사람이 일반 군현으로 이사하는 것은 금지되었으며, 부곡 사람이 군현 사람과 결혼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어디서 태어나고 어디서 사는지에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것이 고려 사회였다. 그리고 이렇게 철저한 위계의 정점에서 아무런 차별을 받지 않고 맘 편히 살 수 있었던 게 바로 개경 사람이었다.
13세기 개경 인구, 18세기 한양보다 많아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개성 황궁의 정전인 ‘회경전(會慶殿)’을 디지털로 복원한 3차원 이미지. [사진 국가유산청, 연합뉴스]
그럼 누가 개경에 살았을까? 개경은 고려 건국 이전에는 통일신라의 송악군이었으므로 원주민이 다른 군현보다 많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서울이 되면서 인구가 늘었다. 개경 인구를 알려주는 유일한 사료에 따르면 건국 후 300여 년이 지난 1232년에 10만 호(戶) 이상이 었다. 1호당 3~5명으로 계산해서 대략 30만~50만 명으로 추정하는데, 조선 후기 1789년 한양의 인구가 18만9153명이었으니(『호구총수』),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이런 현상은 인구의 서울 집중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고려 시대에도 지방 사람들의 상경(上京)이 유행했던 것이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 어떻게 서울에 올라가 살 수 있었을까?
고려 궁궐터인 개성 만월대. 2007~2018년까지 남북이 공동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사진 국가유산청, 연합뉴스]
고려 시대에 지방 사람이 상경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출세해서 관리가 되는 것이었다. 과거에 급제하고 관리가 되면 근무처가 개경이므로 당연히 상경해야 했다. 이 경우 가족을 이끌고 개경으로 이사했고, 그러면 아들 교육을 개경의 좋은 학교에서 시킬 수 있고, 그 아들이 또 과거에 급제하고, 그러면서 대대로 관리가 되고, 점차 서울 사람으로 정착했다. 과거 급제 이외에도 개경의 말단 서리가 되거나, 군인이 되거나 해서 어떻게든 국가 공무원이 되면 서울에 살 수 있었다. 그밖에 장사하러 서울로 오는 사람, 공부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는 사람, 스님이 되어서 서울의 절에 머무는 사람 등 수많은 상경 루트가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강감찬의 낙성대 설화도 상경으로 마무리된다. 어떤 관리가 왕명으로 시흥군에 왔다가 큰 별이 인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그 집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고 하므로 기이하게 생각해서 그 아이를 개경으로 데려다 길렀다는 이야기다. 강감찬은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개경에서 성장했는데, 현대의 1970년대까지도 명문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로 소년 유학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도 개경은 기회의 땅이었다. 누구나 개경에서 살고자 했지만,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 번 서울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좀처럼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았고, 개경 인구는 계속 누적되며 늘어났다. 그런데, 이 상경의 수고를 한 번에 무효화하는 형벌이 있었다. 고려의 독특한 귀향형이다. 귀향(歸鄕)이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언뜻 목가적인 느낌이 나지만, 고려에서는 형벌이었다. 관리가 관청 재물을 훔치거나, 뇌물을 받고 법을 굽혀 적용하거나, 고신(告身, 임명장)을 위조하거나, 변란에 연루되거나 하면 관직에서 파면할 뿐 아니라 고향으로 쫓아냈는데, 이것을 귀향형이라고 했다. 서울에 살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한 것으로, 매우 무거운 형벌이었다. 이처럼 중죄를 저지른 관리를 귀향시키는 것으로 처벌한 것은 지방 사람이 상경해서 서울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거꾸로 보여준다.
지방 차별 없어지는 것이 역사 발전
조선의 한양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왕실과 연고 없이 수도가 된 곳이다. 그런 만큼 태생적인 권위가 없었고, 그것 때문에도 조선의 지방차별은 고려와 비교하면 훨씬 덜해졌다. 고려의 위계적 지방 제도는 폐지되었고, 부곡 같은 행정구역도 모두 사라졌다. 긴 역사의 흐름에서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줄어드는 것이 분명 발전의 방향이었다. 마침내 근대에 이르면 개인 간 차별을 정당화하던 신분제가 폐지되듯 지역 차별도 소멸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 서울 집중과 지방 소멸의 극단적인 비대칭 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역사 발전의 결과로서 모든 지방은 평등해야 하며, 서울도 여러 지방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을 가질 때 비로소 서울과 지방의 격차를 해소하고, 더 나아가 도시와 농촌의 격차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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