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문화평론

김부식·윤언이·정지상·묘청의 네 갈래 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7. 19. 14:39

김부식의 금 사대 현실론은 역사 퇴보였나
중앙일보
입력 2024.07.19 00:24




김부식·윤언이·정지상·묘청의 네 갈래 길

이익주 역사학자

11세기 고려는 평화로웠다. 1019년 강감찬의 귀주대첩으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쳤고, 이 승리를 바탕으로 평화를 지켰다. 그러다 12세기 초 만주에서 여진이 흥기하면서 위기를 맞는다. 여진은 부족을 통일한 뒤 금나라를 세웠고, 거란과 송나라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그사이에 고려와도 충돌했다. 윤관의 9성 개척과 환부(還付)는 여진이 아직 나라를 세우기 전에 있던 일이었다. 금나라의 등장에 따른 동북아 질서의 급격한 변동은 고려의 오랜 평화를 뒤흔들었다. 오늘 이야기는 국가의 위기에 대처하는 네 사람의 서로 다른 방식에 관한 것이다.

조공 바치던 금 돌연 형 대접 요구
묘청 풍수론 “천도하면 금 항복”

좌절되자 반란, 김부식이 제압
경쟁자 정지상·윤언이도 화 입어

신채호 “사대사상에 정복” 한탄
묘청 천도론, 현실성 잣대로 봐야

                                    묘청의 난을 진압한 고려 문신 김부식의 영정. [연합뉴스]

김부식(1075~1151)은 『삼국사기』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135년 묘청이 서경(지금 평양) 천도를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진압했다. 윤언이(1090~1149)는 학자이자 문장가이며, 윤관의 아들이다. 김부식을 따라 서경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지만 묘청 일파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수난을 겪었다. 정지상(?~1135)은 서경 출신의 시인으로 묘청 편에서 서경 천도를 주장하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서경 반란에 동참하지 않고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으로 묘청(?~1135)은 서경 출신의 승려이다. 풍수 이론을 가지고 서경 천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 네 사람이 모두 같은 시대에 살았고, 각각 다른 행동을 보였다.

묘청 “땅 기운 쇠하면 수도 옮겨야”

공을 쏘아 올린 사람은 묘청이었다. 그는 1128년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제의했다. 수도 개경(지금 개성)이 땅의 기운이 다했고 서경은 왕기가 서렸으니 서경으로 천도하면 고려가 천하를 호령하게 될 것이며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전적으로 풍수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풍수란 땅에 기운에 있으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기운이 성했다 쇠했다를 되풀이한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수도를 정할 때는 땅의 기운이 성한 곳을 찾아야 하고 시간이 지나 기운이 쇠해지면 다른 성한 곳으로 옮겨야 하는데, 지금이 바로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길 때라는 것이었다. 그럼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란 무슨 말일까?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중앙포토]

여진이 부족을 통일하고 거란과 싸워 연전연승하더니 1115년에는 나라를 세우고 대금(大金)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2년 뒤인 1117년 고려에 국서를 보내왔는데, 첫머리부터가 충격적이었다. “형 대여진 금나라 황제가 아우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금나라 황제를 형, 고려 국왕을 아우로 명시해서 금이 형, 고려가 아우인 형제 관계를 기정사실인 듯 드러냈던 것이다. 고려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오히려 얼마 전까지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며 떠받들었고, 고려는 여진을 조공국으로 간주해서 황제국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요소쯤으로 대우했던 만큼, 금나라의 국서는 거의 도발에 가까웠다. 하지만 금은 자신들의 강성함을 이유로 관계 변경을 강요했다.

처음에 고려는 강력 반발했고, 금의 국서에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고려 편이 아니었다. 금은 점점 더 강성해졌고, 마침내 1125년에는 거란을 멸망시킨 데 이어 송나라 수도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의 대응도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1126년 어전 회의에서 “금이 과거에 작았을 때는 우리를 섬겼으나, 지금은 갑자기 세력을 일으켜 거란과 송을 멸망시켰으며, 병력도 강하여 나날이 커지고 있으니 사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현실론이 격론 끝에 채택되었다. 그에 따라 금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대가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심이 문제였다. 어제까지 아래로 보아왔던 여진을 갑자기 상국으로 받들게 된 상황을 대다수 고려 사람들은 용납할 수 없었고, 그 틈을 묘청이 채우고 나선 것이었다.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가 항복할 것이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개경의 고려 황궁 화재가 천도 명분

일제강점기의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 『조선사연구초』에서 묘청의 난을 고려·조선 1000년 역사의 최대 사건으로 규정했다. [중앙포토]

묘청이 보기에 금에게 굴복한 것도 개경의 기운이 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개경의 쇠운을 탓하기에 더 좋은 소재가 있었다. 바로 궁궐의 화재였다. 묘청이 등장하기 두 해 전인 1126년, 이자겸이 군사를 동원해서 궁궐을 범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자겸 편에 있던 척준경이 인종을 궁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불을 질렀고, 고려 황궁이 전소하고 말았다. 1년 만에 이자겸 일파가 제거되고 반란은 평정되었지만, 불탄 궁궐은 마치 개경의 기운이 쇠했음을 보여주는 것인 듯했다. 묘청은 이것을 풍수로 연결해서 서경 천도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자 김부식이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이자겸의 권세가 한창일 때 인종이 이자겸을 신하 이상으로 특별 대우하려는 것에 반대해서 중지시킨 바 있는 강직한 신하였다. 하지만 묘청의 말을 믿은 인종의 천도 의지가 워낙 강해서 말릴 수가 없었다. 얼마 뒤 묘청은 국왕을 황제라고 부르고 독자 연호를 만들어 쓰자고 주장했다. 서경으로 천도하면 금나라가 항복해올 것이라던 주장을 좀 더 구체화한 것이었다. 그러자 천도에는 찬성하지 않았던 윤언이가 동조하고 나섰다. 고려를 황제국으로 만드는 것이 평소 꿈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지상은 서경 천도부터 칭제건원까지 모두 묘청과 뜻을 같이했다.

윤언이의 묘지명. 금나라의 사대요구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는 묘청 반란 진압에 가담했으면서도 묘청 일파와 내통했다는 혐의을 받았다. [사진 이익주]

그런데 묘청 일파의 계획은 천도를 준비한 지 5년이 되는 1133년 무렵부터 인종의 변심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인종은 그사이 여러 차례 서경에 행차했지만 좋은 일이 생길 조짐은 없고 오히려 서경에서 큰 화재가 나고 기상 이변이 일어나자 묘청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초조해진 묘청은 대동강에 기름떡을 가라앉혀 기름이 조금씩 수면으로 올라오게 하고는 용이 침을 토해 오색구름을 만든 것이라고 꾸몄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결국 묘청은 인종의 협조를 포기하고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때 정지상은 개경에 머물고 있었다. 묘청에게 배신을 당한 것일 수도 있고, 서경 천도와 칭제건원까지 동의했지만 반란에는 찬성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개경에서 묘청의 일당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12세기 전반, 국가적 위기에서 네 사람은 각각 다른 길을 걸었다. 그 결과 김부식이 정지상과 묘청을 죽이고 윤언이를 지방관으로 쫓아내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승리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차가웠다. 정지상의 죽음에 대해서 “당시 사람들이 ‘김부식이 평소 정지상과 문장에서 명성을 다투었는데, 불평이 쌓였다가 이때 반란에 내응했다는 핑계를 대고 죽였다’고 말들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전한다. 수십 년이 지나서 이규보의 『백운소설』에는 정지상의 귀신이 절간 해우소에서 김부식의 음낭을 옥죄어 죽게 했다는 전설이 실렸다. 윤언이와는 좀 더 긴 이야기가 있다. 일찍이 윤관이 대각국사 의천의 비문을 지었는데 문장에 불만을 가진 문도들이 왕에게 아뢰어 김부식으로 하여금 고쳐 짓도록 했더니 김부식이 사양도 하지 않고 다시 지었으므로 아들 윤언이가 앙심을 품었다. 어느 날 왕이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의하게 하고 윤언이에게 토론하도록 했는데, 윤언이가 일부러 거침없이 따져 물었으므로 김부식이 진땀을 흘렸고, 이 일로 감정이 상한 김부식이 묘청 난을 진압한 후 윤언이를 모함해서 내쫓았다는 일화이다.

신채호 “묘청·김부식 대립은 진취·보수 싸움”

서경(평양) 임원역의 대화 궁 터. 한때 천도 주장에 기울었던 고려 인종이 묘청의 건의에 따라 조성하려다 중단했다. 성벽과 내궁 흔적이 보인다. 1916년 촬영 사진. [사진 이익주]

김부식이 묘청에게 승리한 데 대해서는 더 싸늘한 평가가 있다. 근대의 역사가 신채호의 평가이다. 신채호는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이 “낭가(郞家)·불가(佛家)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부식이 승리하는 바람에 고려·조선의 1000년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고 한탄했다. 모두가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을 담고 있지만, 하나같이 현실적인 판단은 아니다. 그럼, 묘청이 이겼어야 하나? 묘청의 주장대로 서경 땅의 기운을 믿고 수도를 옮겼더라면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해왔을까? 여진에 굴복한 데 분노한 민심을 쫓아 금에 적대했다면 평화를 지킬 수 있었을까?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대한 평가는 그 주장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었는지를 기준으로 내려져야 한다. 풍수에 국가의 운명을 맡기지 않는 것은 옛날 사람들도 우리와 같았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45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