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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8. 2. 14:39

140년의 공간·이야기 따라 한바퀴… 인문·역사·건축 ‘개항장 파노라마’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4-08-01 09:00
  • 업데이트 2024-08-01 15:55

차이나타운 황제의 계단.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다양한 관광 콘텐츠… 등잔밑 ‘알짜 여행지’ 인천

‘일본인 거류지’ 중앙동서 시작
중구청 등 일제 근대건축물 즐비
우리나라 첫 호텔 ‘대불호텔’도
1978년 헐렸다 전시관으로 재건

‘창영동 배다리’매력적 문화공간
헌책방 골목 안쪽에 40년 고깃집
뜻밖의 공간 발견하는 재미 쏠쏠
신포시장‘진짜 노포’ 감성 만끽

인천=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완결형 여행을 할 수 있는 도시, 인천

여행에 관한 한 인천은 ‘완결형’이다. 거의 모든 완결된 형태의 여행지가 인천에 있다. 도시 여행인 경우에도 그렇고, 미식 여행이나 역사 여행인 경우에도 그렇다. 보통 다른 도시, 그게 내로라하는 관광명소인 경우도 여행 목적지나 코스는 ‘이제야’ 만들어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표 명소 한 곳에만 집중했을 뿐, 나머지는 별 볼 일 없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그에 비하면 인천은 도시 전체에 다양한 관광 콘텐츠가 꽉 차 있다는 느낌이다. 오래전부터 꾸준하게 시도해온 도시재생의 결과다. 인천의 도시재생은 도시의 쇠락과 기념비적 공간의 유실을 손 놓고 볼 수 없다는 생각에서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특정 장소의 관광명소 개발의 욕망을 숨기지 않고 ‘도시재생’이란 명분을 끌어들여 자원과 인력을 집중 투하하는 다른 도시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일찌감치 시작된 도시재생으로 인천의 웬만한 명소는 이미 완결의 형태로 다듬어졌다. 더불어 시민들은 시민대로 재생공간에 대한 가치를 자연스럽게 공유하게 됐다. 인천을 ‘여행하기 좋은 도시’라 말할 수 있는 이유다. 그럼에도 인천은 과소평가됐다. 순전히 가까운 수도권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인천 곳곳에는 시간이 새겨놓은 굵직굵직한 이야기들이 있다. 개항도시 인천은 인문 자원이 많기도 하거니와 정체성도 선명하다. 인천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다채롭다는 것. 인천에는 역사적 명소와 함께 수많은 주제와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개항도시가 인천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인천에 깃든 이야기가 유독 흥미로운 건, 그 시절 역사가 촘촘하게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역사에 비벼진 미시사(微視史)는 인천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입체적으로 재현해 놓은 개항장 일대의 거리 풍경. 인천개항박물관에 있다.



# 인천 여행이 시작되는 곳…개항장

인천에는 ‘개항장(開港場)’이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조성된 공간이다. 개항장이란 이른바 ‘만국공법(萬國公法)체제’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에 따라 개방된 항구를 말한다. 차이나타운을 비롯해 부두와 가까운 중구 송학동과 중앙동 일대를 그렇게 부른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사이에 지어진 근대건축물들은 당연히 이 부근에 모여 있다.

인천 여행의 시작에 맞춤한 곳이 구도심의 개항장이다. 인천 여행은 근대건축을 따라가는 여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즐겁자고 떠난 여행에서 건축은 ‘따분한 소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천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 개항장의 건축이 환기하는 건 자체의 미감보다, 개항의 기억과 흔적이다. 건축은 시간을 거슬러가는 여정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거기 시간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여행이 들여다보는 건 ‘공간’이다. 아무리 많은 기록이 있다 해도, 공간이 존재해야 감상도, 로망도 살아난다. 공간이 없으면 실감은 사라지고 만다. 오래된 공간들이 여태 남아 있다는 것. 인천이 특별한 이유다.

인천을 탐험하는 여행자가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은 개항 초기 일본인 거류지였던 중앙동이다. 일제강점기에 ‘본정(本町)’으로 불렸던 이곳을 지금은 ‘개항장 문화지구’라 부른다. 일본 영사관으로 쓰였던 근대건축물인 중구청 건물을 비롯해 일본 제일은행, 18은행, 58은행 인천지점 건물 등 수많은 개항 문화재들이 이곳에 있다. 문화지구라 부르는 건 이런 근대건축물들이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구청 건물은 옛 일본 영사관이었다. 제일은행은 개항시대 근대문물을 전시한 인천개항박물관이 됐으며, 18은행은 개항 당시 조계지 모습을 소개하는 근대건축전시관이 됐다. 1888년 인천항에서 물류수송을 담당했던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사무실을 비롯해 주변의 붉은 벽돌 창고는, 창작스튜디오와 전시장, 공연장 등을 갖춘 인천아트플랫폼의 아카이브 공간이 됐다. 저마다 다른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근대건축물들에는 생동감이 불어넣어졌다. 오래된 것들에 저마다의 쓸모와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인천이 오래된 것을 지켜오는 비결인 듯했다.

대불호텔 전시관.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을 재현해 지었다.



# 사라진 것을 불러오다…대불호텔

박물관과 전시관 얘기로 시작하는 여행이 어쩌면 따분하고 딱딱하다 생각할 수도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전시를 둘러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100년 전쯤의 개항장을 상상하게 되는데, 개항장 곳곳에 깃들어 있는 사연을 꺼내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디든 풍성한 이야기와 사료가 있어서 그걸 꺼내서 퍼즐 맞추듯 조각조각을 이어 붙이면, 살아본 적 없는 100여 년 전의 장면을 만나게 된다.

개항박물관 뒤편 ‘대불호텔 전시관’에 딸려 나오는 이야기로 예를 들어보자. 개항 당시 인천은 수도 서울로 가는 관문이었다. 기차도, 차도 없던 시절, 인천에서 경성까지는 조랑말이나 가마를 타고 서두른다 해도 12시간이 넘게 걸렸다. 경성에 가려면 인천에서 자고 갈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그 시절 인천에 변변한 숙박시설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1888년 해운업과 선박운송업을 하던 일본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郞)가 일본인 거류지에 3층 서양식 건물을 짓고 ‘대불호텔’의 간판을 내걸었다. 1902년 서울 정동에 들어선 손탁호텔보다 14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다. 서양식 침실과 식당을 갖추고 영어로 서비스를 제공했던 대불호텔은 서양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무렵 우리나라를 찾은 서양인의 여행기나 비망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을 정도다.

번성했던 대불호텔은 1899년 경인선 철로 개통으로 급속하게 쇠락하게 된다. 열차를 타면 1시간 40분 만에 경성에 도착하니 인천에서 묵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서양인의 왕래가 크게 줄어든 것도 경영난에 일조했다. 간판을 내린 대불호텔은 1918년 중국인에게 팔려 ‘중화루’란 간판을 내건 청요리집이 됐다. 명성이 경성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성업했으나 1960년 이후 청관 거리가 쇠퇴하면서, 중화루는 1970년대 초반에 문을 닫았다. 그 뒤에는 간판도 떼지 않고 월셋집이 됐다가 1978년에는 건물이 헐리며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있는 대불호텔 전시관이 있는 자리가 대불호텔이 섰던 바로 그 자리다. 전시관은 상가 건축공사 도중 호텔 지하 저장시설이 발견되고 문화재청이 보존을 권고하자 지난 2017년 대불호텔의 옛 모습을 재현해 지은 것이다. 대불호텔의 경우는 ‘사라진 것들을 다시 불러온’ 드문 사례지만, 인천의 근대 공간에는 ‘있는 걸 지켜온’ 이야기들이 적잖다.

이쯤에서 털어놓는 이야기. 인천 구도심을 여행하는 심경이, 실은 좀 복잡하다. 개항장은 대외무역이 이뤄지며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장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제국주의 열강들이 토지나 가옥 등을 침탈하는 현장이었기도 해서다. 우리 근대의 시작이 식민지였으니, 근대의 역사적 장면은 모두 제국주의 그늘 속에 있었다. 나라가 열강의 횡포에 당당하게 맞서지도 못했고, 자국민을 지키는 데도 무력하기 짝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삼국지의 주요 장면을 타일에 그려 장식한 인천 차이나타운의 삼국지 거리.



# 차이나타운의 주인공은 짜장면

개항장에 볼 것이 많아 숨돌릴 틈 없다. 개항장 문화지구 바로 옆 선린동은 인천의 대표명소가 된 ‘차이나타운’으로 대표되는 동네다. 과거의 청나라 거류지역이었던 이곳은 ‘중국인이 사는 마을’을 뜻하는 ‘지나(支那)’라 불리다가, 중국과 우호를 맺는다는 의미에서 ‘선린(善隣)’동이 됐다. 차이나타운의 주인공은 뭐니 뭐니 해도 ‘음식’이다. 붉은 등을 켠 중국요리집이 도로를 따라 죽 늘어서 있다.

차이나타운은 ‘짜장면 동네’다. 이 거리에서 짜장면이 처음 만들어졌다. 언제, 어디서 처음 만들어졌는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정식으로 ‘짜장면’이란 이름을 내걸고 음식을 팔기 시작한 건 1905년 무렵이다. 이곳에 일하러 온 중국 산둥(山東) 지방 노동자들이 야식으로 볶은 춘장에 국수를 비벼 먹었는데, 그걸 우리 노동자들이 먹기 시작하면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인천에서 ‘짜장면의 원조’로 자주 지목됐던 곳이 차이나타운의 ‘공화춘’이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독보적인 명성의 고급음식점이었던 공화춘을 기념해 그 자리에 2012년 ‘짜장면 박물관’이 들어섰다. 공화춘은 1908년 처음 문을 열 당시에는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중국식 여관 ‘객잔(客棧)’이었다. 처음에는 ‘산동회관’이란 간판을 걸고 개업했는데, 1911년 신해혁명을 기념해 ‘공화국의 봄’이란 뜻에서 ‘공화춘(共和春)’으로 상호를 바꿔 달았다.

공화춘은 197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리다가 외국인 부동산 소유 규제조치 등으로 인천의 화교 경제가 무너지면서 1983년 문을 닫았다. 공화춘은 사라졌지만, 창업주의 후손과 주방장의 계보가 이리저리 얽히고설키면서 차이나타운의 중국집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차이나타운에는 2004년 개업한 또 하나의 ‘공화춘’이 있다. 폐업한 공화춘을 재건한다며 공화춘 출신 주방장을 영입해 문을 연 집으로 100년 전의 공화춘과는 다른 집이다. 저마다 공화춘과의 인연을 내세워 ‘원조’를 주장하는 와중에 고발, 고소로 새 공화춘이 법정에 선 적도 있다. 짜장면이 ‘국민 메뉴’가 된 지 이미 오래. 이제 와서 어디가 원조인지가 뭐 그리 중요할까. 붉은 등을 주렁주렁 매단 이국적인 분위기의 차이나타운 중국집에서의 짜장면 한 그릇만으로 여행자는 충분히 즐겁다.

차이나타운은 중국풍의 이국적인 경관으로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차이나타운 동서남북에다 세운 중국식 문 ‘패루(牌樓)’는 여기가 어딘지를 헷갈리게 만든다. 차이나타운에는 중국문화를 알리기 위해 우리 정부가 세운 한중문화관이 있다. 중국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삼국지와 초한지의 장면을 수천 장의 타일에 나눠 그려 모자이크식으로 벽에 붙여 놓은 ‘삼국지 거리’와 ‘초한지 거리’는 화려함으로 눈길을 끈다. 중국요리집뿐만 아니라 월병이나 공갈빵 등 중국식 간식을 파는 상점들도 즐비하다. 거리와 상점마다 홍등을 밝히는 저녁 시간이면, 차이나타운은 순간 이동한 중국의 도시처럼 느껴진다.

인천 개항장 거리 입구에 세워진, 개항장에서 화물 선적작업을 하던 짐꾼 동상.



# 책 읽듯 여행하다…문화공간 배다리

인천 여행을 다채롭게 만드는 바탕에는 ‘다양성’이 있다. 인천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쏠림현상이 덜하다. 헌책방 거리의 좁은 골목 안쪽에 40년 내력의 간판 없는 고기 구이집이 있고, 감각적인 카페 골목 뒤쪽 주택가 2층에 양옥집을 개조한, 사회과학서적을 쌓아둔 북카페가 있는 식이다. 한 가지가 좀 이름났다 싶으면, 골목 전체가 죄다 비슷비슷한 가게들로 가득 차는 다른 관광지들과는 격이 다르다.

인천에는 뜻밖의 공간이 불쑥불쑥 나타난다. 오래된 여인숙 골목 안쪽에 근사한 미술관이 있고, 늙고 오래된 극장이 도시 한복판에 꿋꿋하게 살아남아 여전히 상영 중이며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오래된 성냥공장은 박물관이 됐다. 도심에서 술을 빚던 술도가가 떠난 자리는 문화를 숙성하는 ‘문화양조장’으로 탈바꿈했다.

이런 매력을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 창영동 ‘배다리’ 일대다. 개항장의 주인공이 일본인과 청나라 사람들이었다면, 배다리는 개항장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이 살던 터전이었다. 배다리는 ‘배로 놓은 다리(船橋)’란 뜻이 아니라 배가 닿던 나루터, 즉 ‘선창(船艙)’을 뜻한다. 지금이야 구도심 한복판이지만, 193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배다리에는 바닷물이 통해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가 있었다.

배다리에는 조선인을 위한 학교와 시장,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는 성냥공장을 비롯해 간장공장, 양조장, 고무공장 등이 들어서 있었다.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노랫말로 시작하는 노래 ‘성냥공장 아가씨’의 배경이 바로 여기다. 배다리는 1970년대 헌책방이 속속 들어서 성업했다. 인근에 학교가 많아 서점 자리로는 최적지였다. 그 시절 헌책방은 이제 딱 다섯 개만 남았지만, 배다리 일대는 상권 쇠퇴로 임대료가 싸지면서 작은 미술관과 북카페 등이 비집고 들어와 다양한 지식이 유통되는 매력적인 문화공간이 됐다.

배다리를 보려면 먼저 금곡동의 ‘성냥마을 박물관’을 찾아가는 게 순서다. 박물관은 1917년 문을 연 성냥공장인 ‘조선인촌주식회사’ 자리에 있다. 이 회사는 인천에서 시작해 신의주와 평양에 지점을 내고 전국으로 판로를 개척했던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성냥공장이었다. 1930년대 전국 성냥 생산량의 70%를 차지했을 정도로 위세가 당당했다. 성냥마을 박물관에는 마을해설사가 근무하는데, 관광객이 찾아가면 배다리 일대의 근대 문화공간을 기꺼이 안내해준다.

배다리에는 1926년 정미소를 운영하던 황해도 출신 사업가가 창업했다가 문 닫은 양조장이 있고, 1930년대 지어진 여인숙 골목을 미술관과 게스트하우스, 카페로 꾸민 공간이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학교와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가 있으며 6·25 전란 중에 ‘꿀꿀이죽’을 팔던 골목도 있다. 문 닫은 양조장은 공공미술프로젝트를 운영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인천은 도시재생 공간도 좋지만, 도보여행 코스도, 테마를 정해 여행을 즐기기에도 나무랄 데 없다. 인천에는 여행을 통해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다 있다. 지금은 사라진 것도, 아직 남아 있는 것도, 없어져서 다시 만든 것도, 새로 만든 곳도 있다. 비유하자면 여행자에게 인천은, 목차가 잘 정리된 충실한 한 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잘 구분된 목차의 가장 큰 장점은, 큰 수고 없이도 체계적인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더불어 여행으로 얻은 인문 지식의 휘발을 막아주는 역할도 톡톡히 한다.

# 신포시장의 노포, 그 매력을 찾아서

인천에 가면 신포시장을 빼놓을 수 없는 건, 인천을 대표하는 먹거리 절반 이상이 신포시장에 있어서다. 신포시장은 인천 최초의 근대형 상설시장. 1926년 7월 1일. 시장을 처음 연 날이 기록으로 또렷하게 남아 있다. 중국인들이 심어 기른 채소를 내다 파는 ‘푸성귀 전’이 시초였다. 시장에서 거래됐던 건 토마토며 피망, 연근 같은, 우리 눈에는 귀한 것들이었다. 비싸고 귀한 채소를 거래하는 고급시장이었다는 얘기다. 손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그러다 일본인과 중국인이 시장을 갈라 각자 영역을 차지해 상권을 형성했고, 그 틈으로 한국인들이 노점을 펼치면서 신포시장은 커졌다.

신포시장은 인천 원도심이 쇠퇴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시장을 살리기 위해 지난 2000년 대대적인 정비작업을 벌였다. 2010년에는 중소기업청의 ‘문화관광시장’ 육성 지원을 받고 ‘신포국제시장’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세상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으려 시장의 면모를 일신한 게 20여 년 전. 지역 주민이며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시장의 중심에는 그나마 활기가 남아 있지만, 시장 깊숙한 안쪽에는 쇠락의 느낌이 완연하다.

신포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건 뭐니 뭐니 해도 ‘신포 닭강정’이다. 주말은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닭강정집 앞에는 길게 줄이 선다. 현지 주민이나 외지인이 뒤섞여 있다. 공갈빵이며 육즙만두(샤오룽바오)도 신포시장의 명물이다. 이즈음에는 제철을 맞은 민어회를 내는 시장통 안쪽 오래된 횟집들에 손님들이 붐빈다.

신포시장에는 ‘진짜 노포(老鋪)’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노포 특유의 정서와 분위기가 살아 있는 곳이다. 대표적인 곳이 신포시장의 마지막 대폿집인 ‘신포주점’이다. 이제는 찾아보기 쉽잖은 시장통 선술집의 전형과도 같은 곳이다. 신포시장의 노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장어 튀김으로 이름났던 ‘신신옥’, 공갈빵과 만두를 빚어 파는 ‘산동만두’, 평양냉면을 내는 ‘경인면옥’ 등이 시장 사람들이 손꼽는 노포다. 이 중에서 특히 ‘인천 냉면 맛 좋다’는 소문의 진원지가 된 경인면옥은, 40~50년 전에도 서울 사람들이 경인선 기차를 타고 와서 냉면을 먹고 갔을 정도로 명성을 떨치던 곳이다. 냉면 맛은 여전했지만, 경인면옥 문앞의 짧아진 줄이 못내 신경 쓰였다. 기억하고 지키는 것의 가치가 한 그릇 국수에도 있다.



■ 인천의 ‘그때 그시절’

대불호텔 전시관을 다 보고 나면 뒤쪽으로 ‘생활사전시관’ 전시가 이어진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인천의 생활사를 전시한 흥미로운 공간이다. 압축적 경제개발 속에서 도시화 현상이 본격화되던 시절의 인천 모습을 사진과 글로 담아 놓았다. 당시 가게와 주택을 재현한 공간도 있다. 지금은 문 닫은 다방이며 중국집, 대폿집 등의 상호를 꺼내 놓고, 그 시절 이야기를 소개한다. 인천과 인연이 있다면 추억을 소환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