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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4. 16. 11:13

‘서민 아낀 佛心’ 가슴 울리고… ‘섬진강 물안개’ 마음 홀리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4-04-11 09:09
  • 업데이트 2024-04-11 09:29
 

곡성 오산면의 절집 용주사. 마치 ‘무협지 속 공간’처럼 느껴지는 자리에 있다. 법당 뒤로 병풍처럼 서 있는 크고 기이한 근육질의 바위가 인상적이다. 사진 왼쪽의 바위에는 물길을 돌려서 만든 폭포가 실타래처럼 걸려있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천년 고찰의 숨결 따라 힐링 전남 곡성

태안사 혜철스님 사리 모신 ‘부도’
주민들 나서 국보지정 서명운동

‘호남 3대 정자’ 꼽혔던 함허정
벼슬 못 오른 선비 회한 느껴져

제월섬엔 메타세쿼이아 숲 빽빽
‘초록의 그림책 세상’ 들어온 듯

섬진강 침실습지 주변 수변공원
봄시즌 물안개와 만나 절경이뤄

우람한 암벽앞 자리잡은 용주사
동굴 법당·폭포 등 ‘무협지’ 연상

도림사 가는 길 청류계곡 반석에
옛선비가 새겨둔 글귀 보는 재미

곡성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곡성의 서명운동이 기원하는 것

요즘 전남 곡성에서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정치적 서명은 아니고, 서명 목적이 ‘청원’도 아니다. 곡성의 천년고찰 태안사의 부도 하나를 국보가 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서명운동이다. 부도는 ‘스님이 죽은 뒤에 세우는 승탑’이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게 탑이라면, 스님의 사리를 모신 걸 부도라 한다. 서명은 태안사는 물론이고 곡성군청 민원실, 곡성읍사무소, 죽곡면사무소, 전통시장 등에서 이뤄지고 있다. 국보며 보물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이웃 구례가 부러웠을까. 어쨌든 서명운동에서 엿보이는 건 ‘지역이 가진 것’에 대한 주민의 애정이다.

국보 등극을 기원하는 부도에 앞서 태안사 얘기부터 시작한다. 곡성의 태안사는 통일 신라 시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창건 당시 태안사는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였다. 구산선문이란 이른바 ‘선종(禪宗)을 대표하는 큰 절 아홉 곳’을 말한다. 선종은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행을 잘하고 선행을 쌓는다면, 마음속의 부처를 꺼낼 수 있다고 믿었던 불교의 종파다. 교리를 많이 배운 이른바 ‘먹물’이 아니라도, 그저 지극한 마음과 실천이 있으면 불경을 읽지 못해도 성불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공부와 교리를 강조하는 교종(敎宗)과는 정반대의 주장이다.

태안사에서 구산선문을 연 건 혜철 스님이다. 혜철은 당나라 유학파다. 그가 유학에서 돌아올 무렵, 당나라에서는 ‘회창법난’이 있었다. 당나라 황제 무종이 도교를 신봉하면서 자행한 불교 탄압사건이다. ‘육신으로 영생한다’는 도교는 당시 권력자들이 추구했던 종교였다.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오래 살고 싶었을 테니까…. 도교를 믿었던 무종 곁에는 ‘늙지 않는 환약’을 만든다는 도사 조귀진이라는 이가 있었다. 그가 무종 앞에서 불교의 스님과 논쟁하다 참패를 당한 게 법난의 서막이었다. 이때의 모욕을 가슴에 새긴 조귀진은, 무종을 부추겨 대대적인 불교탄압을 감행했다.

회창법난의 탄압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법난 기간 중 문 닫은 사찰만 4600개. 일정 규모 이상의 절집만 헤아린 숫자가 이 정도다. 환속시킨 스님도 26만 명에 달한다. 화려했던 당나라 불교의 절멸에 가까운 참사였다. 교종은 초토화됐으나 그나마 산중에서 수행하던 선종은 피해가 덜했다.

그 무렵 당나라로 유학 간 스님들이 법난을 전후해 잇따라 귀국했다. 염거, 체징, 범일, 무염…. 줄줄이 국사(國師)를 역임했던 이들이다. 법난의 기미를 일찍 알아챘던 것일까. 혜철의 귀국은 다른 이들보다 좀 빨랐다. 혜철이 돌아왔을 때 태안사는 이제 창건한 지 5년 된 새 절이었다. 혜철은 태안사를 선종 사찰로 바꾸고,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를 자처했다. 혜철이 태안사에 머물며 주창했던 선종은 일대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지배층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했던 불교를, 서민들의 것으로 되찾아 온 셈이었으니 왜 안 그랬을까. 믿음은 신화가 됐다. 혜철이 향을 사르고 기원하자 가뭄에 큰비가 내렸다거나, 산불이 났는데 혜철의 거처에만 폭우가 쏟아져 타지 않았다거나 하는 기적의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태안사에 신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이야 위세가 쪼그라들어 화엄사의 말사 신세지만 구례 화엄사도, 순천 송광사도 말사로 거느렸던 그 시절 태안사의 위세는 대단했다.

곡성이 자랑하는 명소인 침실습지. 봄, 가을이면 이른 아침 물안개로 황홀한 경관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한자로 ‘잠자는 방’을 뜻하는 ‘寢室(침실)’이라고 쓰는데, 주변의 지명에 따른 것이다.



# 태안사의 부도, 그리고 포장도로

혜철이 세상을 떠나자 태안사에 그를 기리는 부도가 세워졌다. 그게 바로 곡성군민들이 서명으로 국보 지정을 기원하고 있는 ‘적인선사 부도’다. ‘적인’이란 왕이 내린 혜철의 시호다. 적인선사 부도를 보면, 태안사에서 혜철이 얼마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적인선사 부도는 태안사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 대웅전을 비롯한 법당이 다 발아래다. 부도는 법당 뒤편 가파른 돌계단 끝의 ‘배알문(拜謁門)’ 너머에 있다. 배알문 처마가 유난히 낮다. 문을 통과할 때 누구든 고개를 숙이도록 의도한 설계다. 고승의 부도 앞에서 뻣뻣했던 세도가들도 이 문을 들어서려면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배알문 앞에서 낮은 자리에 들어서 마음을 낮추는 ‘하심(下心)’을 생각한다.

부도는 1200여 년 전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생생하다. 가장 돋보이는 건 하대석에 돋을새김한 사자다. 저마다 다른 자세의 사자 모습이 선명하기 이를 데 없다. 부도 중에서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나, 구례 연곡사 동부도의 화려한 미감에 견줄 만하다.

태안사에서는 또 눈여겨볼 것이 있으니, 지난해 연말에 보물로 지정된 일주문이다. 이게 왜 보물인지는 그 앞에 서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처마 아래에 촘촘하게 나무 부재를 끼워 만든 장식이 깜짝 놀랄 만큼 화려하다. 거기에 오색단청까지 입혔으니, 겹겹의 부재는 현란함으로 아찔할 정도다. 6·25 전쟁의 와중에 태안사의 거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탔을 때도 일주문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다.

일주문과 함께 전란의 화마를 피한 또 하나의 건물이 일주문 바깥의 ‘능파각(凌波閣)’이다. 능파각은 독특한 건물이다. 계곡에 걸어 놓은 다리이자, 누각이면서 산문 역할을 한다. 계곡 양쪽의 바위에 거대한 나무를 켜서 만든 다리를 걸쳐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워 지었다. 미련도, 욕심도 없이 가볍고 우아하게 걷는 걸음을 ‘능파’라고 한다는데, 계곡 물소리로 그득한 주변 경관이 그런 걸음에 어울린다.

사실 태안사에는 국보나 보물보다 훨씬 더 소중했던 것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 시제는 ‘과거형’이다. 태안사로 들어가는 비포장 숲길 얘기다. 태안사에는 그야말로 ‘최고의 숲길’이 있었다. 절 입구부터 일주문까지 비포장의 유연하게 굽은 산길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길옆의 이끼로 가득한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많지도, 적지도 않아 돌돌 내려가는 물소리가 마치 독경 소리 같았다. 소리마저도 유순한 길이었다.

비포장 오솔길이지만 차가 드나들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 길이 지난 1월 말에 아스팔트로 포장됐다. 먼지가 날려서 불편했다지만, 그래 봐야 1.8㎞ 남짓에 불과했다. 포장도로 앞에서 황망함을 감출 수 없었는데, 길옆에 못 보던 반들반들한 공덕비가 눈에 띄었다. 도로포장을 위해 시주를 한 불자를 기리는 공덕비다. ‘태안사 대중 일동’ 명의로 세운 비석 뒤편에는 그 좋았던 오솔길을 ‘오랫동안 불편했던 진입로’라고 표현했다. 세상 만물은, 사람에 따라 다 달리 보이는 모양이다.

최근 보물로 지정된 태안사 일주문의 화려한 나무 부재와 선명한 단청.



# 회한의 자리에 세운 근사한 정자

곡성군 입면에는 섬진강을 끼고 있는 근사한 정자가 있다. 한때 ‘호남의 3대 정자’ 중 하나로 꼽혔다는 함허정이다. 그랬다는 얘기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정자인데, 지난해 12월 명승으로 지정되면서 새삼 주목받고 있다. 함허정은 500여 년 전인 조선 중종 때 청송 심 씨 가문 후손 심광형이 지었다. 할아버지가 병조참판과 남원·해주 목사 벼슬을 지냈으니 심광형은 명문가의 자제였다. 이런 후광에도 그는 평생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대신 함허정 곁에 지금으로 치면 사립 기숙학교인 ‘군지촌정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다 여생을 마쳤다.

섬진강을 바라보는 언덕에 지은 함허정은 기숙학교에 딸린 정자였다. 그 정자가 ‘호남의 3대 정자’로 떠오른 건 섬진강을 끼고 있는 운치 말고도 하나의 이유가 더 있다. 당대의 학자 김인후가 옥과 현감으로 부임해 함허정을 드나들며 강론을 했기 때문이었다. ‘동방 18현’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김인후야말로 조선 중기 호남을 대표하는 천재적 성리학자. 선비들이 죽기 전에 함허정을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했던 건, 거기 김인후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자가 내건 ‘함허(涵虛)’란 어떤 뜻일까. 함허에서 먼저 떠올렸던 건 조선 초 스님 ‘함허기화(涵虛己和)’다. 조선 초 불교 배척 정책이 극에 달했을 때 불교의 정법을 주장했던 고승이었다. 그의 글이 곡성 태안사에 주련으로 걸려있다. “천겁이 지났어도 옛일이 아니며, 만세를 펼쳐도 영원한 지금일세(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정자 이름과 같은 ‘함허정’을 그대로 당호로 쓴 홍귀달도 있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해 연산군 민원조차 들어주지 않았던 인물이다. 연산군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갑자사화 때 함경도로 유배돼 사형에 처해졌다.

‘함(涵)’은 젖다는 뜻이고, ‘허(虛)’는 비우다, 욕심이 없다는 뜻이다. 그저 섬진강 물에 젖어 세월을 받아들이고 욕심을 비운다는 뜻이었을까. 그런데 뜻밖이다. 함허정 주인은 당나라 시인 맹호연의 시(詩)에서 ‘함허’란 이름을 가져왔다는 주장이 있다. 그 대목을 읽어보자. “팔월이라 호수는 물이 가득하여, 호숫물에 허공이 비친 것이 하늘과 같다(八月湖水平 涵虛混太淸).” 이렇게 시작한 시는 ‘건너려 해도 배와 노가 없다’는 한탄으로 이어지다가 ‘고기 잡는 낚시꾼을 바라보다 부질없이 물고기를 낚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는 자조로 끝난다.

맹호연은 과거에 낙방해 평생 벼슬자리에 나서지 못했다.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쯤 되는 재상에게 바친다는 부제가 달린 이 시에는, 재상의 추천을 받아 벼슬자리에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담겨있다.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향교의 훈장에 머물렀던 함허정 주인도, 맹호연과 똑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래서 그의 시에서 글자를 가져다 정자 이름으로 삼았던 것일까. 후손들이 뒤에 ‘호연정(浩然亭)’으로 현판을 바꿔 달았던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함허정을 지역에서는 ‘벼슬을 마다한 선비의 결기’로 기둥 삼은 듯 설명하지만, ‘날개 꺾인 채 묻혀 살아야 했던 시골 선비의 회한’으로 해석하는 쪽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뭉클하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물론 알 수 없다.

곡성 주민들이 국보 지정을 기원하고 있는 적인선사 부도.



# 섬 이름은 ‘비 갠 하늘의 맑은 달’

해마다 봄이면 관찰사들이 마을 선비들과 모여 술을 마시는 행사(향음례·鄕飮禮)를 여기 함허정에서 베풀었다고 했다. 딱 요즘 같은 계절이었겠지만, 지금 함허정 앞에서 예전의 풍경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본래 정자는 지금 있는 구릉 정상에 있었다. 지금보다 높은 자리였다면 정자에서 굽이쳐 흐르는 섬진강이 더 잘 보였겠다. 퇴락한 정자를 증손자가 아래로 옮기며 호연정으로 현판을 바꿔 달았다. 이후에도 제호정, 세연정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정자는 몇 번 고쳐 짓는 과정에서 조선 후기 명필 창암 이삼만의 현판 글씨를 받아 함허정이란 옛 이름으로 되돌아갔다.

섬진강 변을 내려다보는 자리의 정자는 근사하다. 보통 정자가 보여주는 미감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바깥에서 정자를 볼 때의 아름다움이고, 두 번째는 정자 안에서 바깥을 볼 때의 아름다움이다. 함허정은 이런 ‘이중적’ 경관이 다 훌륭하다. 특히 정자 안에서 보는 바깥 경치에는 근경(近景·가까운 경치)과 중경(中景·중간 거리 경치), 원경(遠景·먼 거리 경치)이 다 있다. 가까이에는 섬진강이 반달 모양으로 끼고 돌아가고, 중간쯤의 거리에는 정자를 감싸는 마산봉과 고리봉이 있으며, 멀리에는 광주 무등산이 조망되는 파노라마 경관이 있다.

함허정 아래 습지에는 제법 큰 섬이 있다. 섬진강 상류에 댐을 세운 뒤에 유속이 느려지면서 토사가 쌓여 저절로 만들어진 섬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개인이 묘목을 기르던 곳이었으나, 묘목포가 나간 뒤에 아무렇게나 방치됐다. 수해 때 떠내려온 쓰레기가 뒤덮으면서 섬을 드나들던 낚시꾼들은 ‘똥섬’이라는, 모욕적인 이름으로 불렀다. 그러다 섬진강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에서 부지를 사들였고, 이후에 곡성군이 다듬어서 미래교육재단 ‘꿈놀자학교’의 야외 숲체험 학습장으로 활용하면서 섬은 달라졌다. 한때 ‘똥섬’으로 불렸던 섬에 마을 이름을 따서 제월섬이란 번듯한 이름까지 붙여줬다. ‘제월(霽月)’은 ‘비가 갠 하늘의 맑은 달’을 뜻한다.

콘크리트 다리를 딛고 건너가는 제월섬에는 묘목포가 있었을 당시에 심은 30여 종의 묘목이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눈길을 붙잡는 건 빽빽하게 자라고 있는 메타세쿼이아 숲이다. 길러 팔 요량으로 이렇듯 촘촘히 심었을 듯한데, 그대로 두어 우람한 숲이 되니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느낌이다. 제월섬의 느낌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초록으로 그린 그림책 속 세상’이다. 봄 소풍을 하기에 이만큼 좋은 곳이 또 있을까.

# 진짜 ‘침실(寢室)’이라고?

곡성이 자랑해 마지않는 섬진강의 명소가 있다. ‘침실습지’다. 침실습지는 섬진강의 본류에 오곡천과 고달천이 만나는 길목에 만들어진, 서울 여의도 면적과 비슷한 규모의 하천 습지다. ‘설마 ‘잠자는 방’을 뜻하는 침실(寢室)이겠어?’ 했는데, 한자를 보니 진짜 ‘寢室’이다. 인근 오지리 남쪽에 쓴 유(柳)씨 종가의 묘가 이른바 ‘침혈(寢穴)의 명당’이라 여겨져서 행정지명이 ‘침곡리(寢谷里)’가 됐고, 침곡리를 예전에는 ‘침실’이라고 했다. 그걸 따서 습지 이름으로 쓴 것이다.

습지 풍경은 낮도 좋지만, 일출 무렵 빛을 받은 섬진강 안개가 출렁일 때가 압권이다. 띠를 두르듯 습지를 휘감은 순백의 안개가 아침 볕에 붉고 노랗게 물드는 모습은 눈부시다. 안개가 걷히고 나면 마치 주술이 풀린 듯 사라지고 말아서 더 몽환적이다. 이런 장면을 담아두고 싶은 사진가들이 이쪽 습지를 자주 찾는다. 습지의 물안개는 주로 봄 가을에 피어난다. 4월부터 6월까지와 9월부터 11월까지가 적기라니 이제 막 봄 시즌의 물안개 시간이 시작됐다.

침실습지 주변은 근래 수변 공원으로 단장됐다. 공원에는 ‘연하일휘(煙霞日輝)’라는 근사한 테마도 있다. ‘안개(煙)와 노을(霞), 햇볕(日)이 빛난다(輝)’라는 뜻이다. 공원의 정식 명칭은 ‘연하원(煙霞園)’이다. 연하원에는 새집을 얹은 형상으로 만든 ‘생명의 나무’라는 전망대와 너른 수변공간이 있다.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될 방문자 센터는 아직 건물만 완공된 상태. 공원은 아직 다 조성되지 않았지만, 습지 안팎으로 편안하게 걷기 딱 좋은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침실습지만큼 알려지지 않았지만, 봄 풍경만큼은 더 빼어난 곳이 목사동면 대황강 상류의 ‘반구정 습지’다. 물에 몸을 담근 버드나무와 갖가지 수중 식물들이 밀생해 거대한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푸른 강물과 연두색으로 반짝이는 신록의 숲이 어우러진 반구정 습지의 풍경은 매혹적이다. 짙은 안개가 습지의 숲을 빨아들이기도 하고, 일순 토해놓기도 한다. 이런 황홀한 풍경에 건너편 산자락의 청아한 뻐꾸기 소리까지 겹쳐진다면, 그 순간이 가슴 속에 인화돼 오래 남게 될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도림사를 끼고 이어지는 도림사 계곡의 마지막 9곡 너럭바위에 새겨진 글씨. 도림사 계곡을,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살았던 무이구곡에 빗대느라 주자의 시를 가져다가 여기에 새겼다.



# 무협지 속 용주사와 무이구곡 너머 도림사

이번에는 곡성에서 과소 평가된 절집 두 곳 얘기다. 오산면의 ‘용주사’는 거대한 바위들로 이뤄진 기이한 공간에 그림처럼 들어서 있는 절이다. 근래 지어진 절집이긴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전설을 믿는다면 내력은 1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설이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건 ‘호랑이 바위’라 불리는 대웅전 뒤편의 거대한 바위를 보면, 그 앞에 필시 무언가가 들어서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까닭이다.

절집 앞에 서면 기대하지 않았던 경관에 ‘와’ 하는 탄성이 나오게 된다. 절이 기대고 있는 산은 어딜 봐도 흙산인 듯한데, 유독 이쪽에만 우람한 바위들로 가득하다. 너른 바위벽에는 폭포의 가는 물줄기가 쏟아지고, 바위 사이에는 법당이 자리 잡고 있다. 우람한 바위틈에는 사다리를 매달아 놓은 동굴 법당도 있다. 먹을 찍어 그린 상상 속의 그림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협지의 배경 같기도 한 풍경이다. 법당 건물이 좀 낡았고, 요사채는 허름한 양옥 살림집이어서 어울리지 않는데도, 워낙 주변 경관이 압도적이어서 그런 것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또 한 곳이 동악산 아래 절집 도림사다. 신라 때 원효가 세운 사찰인데, 도선국사가 고쳐 세웠을 때 도인들이 숲같이 모여들어 절 이름을 도림사(道林寺)라 했다고 한다. 도림사는 동악산 계곡을 끼고 들어간다. 너른 반석과 맑은 계곡 물이 있어 여름 피서지로 이름난 계곡이다. 지금은 ‘도림사 계곡’으로 부르지만, 예전에는 ‘청류 계곡’이었다.

청류계곡에는 옛 선비들이 새긴 글씨들로 빽빽하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의 대학자 주자가 살았던 무이구곡에 빗대 지은 글이 대부분이다. 선비들이 이곳을 성리학에서 꿈꾸던 이상향으로 여겼던 것이다. 사찰로 이어지는 길이 불교를 억압하고 성리학의 정신을 따르던 선비들의 글씨로 도배된 셈이어서 좀 낯설긴 하지만, 계곡을 따라 오르다 글씨를 찾아 읽으며 풍경과 함께 글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도림사 일주문 근처가 1곡이고 계곡 깊이 새로 지은 암자 앞이 9곡이다. 1곡에서 9곡까지의 경관과 글씨가 내내 이어지는데, 너른 반석이 펼쳐진 4곡과 5곡에 가장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 불교탄압 뒤 도교

기사에서 못다 한 당나라의 ‘회창법난’ 뒷얘기. 도교를 믿었던 당 무종은, 도교의 도사 조귀진이 올린 단약을 먹고 죽는다. 도교에서는 단약을 먹으면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질병을 예방해 불로장생한다고 믿었다. 단약은 건강에 치명적인 수은과 납, 비소 등으로 만들어 독약과 다름없었으니, 서른세 살에 죽은 황제의 사인은 납이나 수은중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황제가 죽고 난 뒤 단약을 만든 조귀진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음은 물론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