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다 못해 조작까지 해서 없애버리는 이승만의 흔적
[박종인의 ‘흔적’]
[아무튼, 주말]
건국 대통령을 조작한 흔적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흥행 바람을 타면서 이승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전국 팔도에 걸쳐 있는 이승만의 흔적은 일찌감치 지워진 지 오래다. ‘독재자 이승만’이라는 일방적인 평가가 일반 대중에게 너무 강렬한 탓이다. 게다가 이승만을 비판하기 위해 사료를 조작하는 사례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오늘 ‘흔적’은 ‘지워지고 조작되는 이승만의 흔적’ 이야기다.
사라진 이승만의 글씨
경남 창원시 진해구 북원로터리에는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 있다. 전쟁이 한창인 1952년에 세운 동상이다. 이순신 동상으로는 1호다. 1950년 11월 11일 해군 창설 제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당시 진해통제부사령관 김성삼이 발의해 건립이 추진됐다. 비용 3000만원이 들었다. 놋그릇을 포함해 군인 장병과 마산, 창원, 통영, 김해 등지에서 낸 성금으로 충당했다. 높이 4m82에 폭은 1m40. 제작은 해군이 맡았다.(1950년 11월 23일 ‘부산일보’)
원형 제작은 조각가 윤효중이 했다. 동상 기단에는 이승만이 쓴 ‘忠武公 李舜臣像(충무공 이순신상)’ 일곱 글자와 그 옆에 ‘李承晩 謹書(이승만 근서)’ 다섯 글자를 새긴 동판이 부착됐다.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고 동상 제작은 진행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제막식은 1년 반이 지난 1952년 4월 13일에 열렸다. 전쟁 통이지만 임시 수도 부산에 있던 정부 요인이 대거 참석했다. 이승만 대통령, 신익희 국회의장, 무초 미국 대사, 무티스코 미 극동함대 사령관도 참석했다. 진해는 일본군이 주둔했던 도시로 반일 정서가 강했다. 1949년 이승만은 이 도시에서 자유중국 장개석과 정상회담을 열며 반공과 반일의 상징으로 진해를 부각시켰다.(김미정, ‘1950, 60년대 한국전쟁 기념물’, 한국근대미술사학 10집, 2002)
그런데 이 ‘李承晩 謹書’ 다섯 글자는 지금 없다. 누군가가 박박 긁어내고 칼질을 해서 보이지 않는다.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을 흔적이 평평하게 변했다. 사라진 날짜와 범인은 기록에 없지만, 사람들은 1960년 4‧19 이후 ‘이승만 흔적 지우기’ 차원에서 없애버렸다고 추정한다. 비슷한 시기에 부산 ‘우남공원’이 부산시의회 발의로 ‘용두산공원’으로 개명되기도 했다.(2023년 12월 16일 자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참조)
기호 1번 이승만이라고?
위 사례들은 차라리 낫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규정한 독재자 이미지를 일반 대중이 그대로 수용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 흔적 자체를 조작하는 것이다. 이승만이 독재자이고 악한이라는 이미지를 유통시키는 지식인이 바로 그들이다.
지난주 주간조선 ‘송재윤의 슬픈 중국’ 칼럼에서 캐나다 맥매스터대 송재윤 교수는 <’이승만 죽이기’ 60여 년, ‘팩트’를 지어내는 역사가들>이라는 제목으로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의 한 유명 교수(역사학자)’가 조작한 사료를 지적했다. 그 교수가 한 대중 강연에서 ‘1952년 국민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기호 1번이라서 당선됐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가 한 말은 이렇다. “문맹률이 높은데 누가 기호 1번 차지하느냐가 되게 중요하거든요. 이승만 대통령이 기호 1번이에요. 당연히 (당선)되는 겁니다. 이건 뭐, 기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강한 권력을 차지하게 되는 거고요.” 이 주장과 달리 이승만은 한 번도 ‘기호 1번’을 차지한 적이 없다. 1952년 선거 기호 1번은 조봉암이었다.
이 유명 교수는 서울대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다. 그가 한 강의는 ‘최강1교시’라는 온라인 강의다. 구독자는 35만4000명이고 박 교수가 한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은 17만 명이 시청했다. 찬양 일색이던 댓글들은 송재윤 교수 칼럼 하나로 완전히 뒤집혔다.
‘이승만이 테러 배후’?
팩트(fact)는 신성하다. 불편하거나 불리해도 역사적 사실은 엄존한다. 존재하는 사실을 조작하면 역사가 아니라 창작이다.
박태균 교수가 쓴 ‘암살’(2016)이라는 단행본이 있다. ‘왜곡된 현대사의 서막’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은 해방공간에서 암살된 정치가 5명에 대한 분석 보고서다. 여운형 암살 사건을 분석한 글에 박태균 교수는 이렇게 썼다.
‘이승만은 하지 사령관으로부터 ‘누군가’에 대한 암살 계획을 취소하라는 경고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 계획의 내용이 여운형을 향한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단지 6월 28일이라면 여운형 암살 20여 일 전의 일이다. 미군정보 부서의 주간 보고서 99호에는 하지의 이승만에 대한 경고장이 실려 있다.’
그리고 그 경고장이다.
‘하지 장군은 6월 28일 자로 이승만에게 발송한 편지에서 이승만과 ○○의 테러 계획에 대한 고발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박태균, ‘암살’, 역사인, 2016, p131)
은폐한 팩트, 왜곡된 흔적
이제 팩트를 본다. 우선 하지가 보낸 글은 ‘경고장’이 아니라 ‘편지’였다. 그리고 이 편지는 박태균 교수가 말한 주간보고 ‘99호’가 아니라 ‘94호’에 나와 있다.
원문을 보자.
‘General Hodge wrote a letter to Dr. RHEE on 28 June stating that it was his hope that these accusations (that RHEE and KIM, Koo were planning terroristic activities) were not true.’
‘하지 장군이 이 박사에게 편지를 보내 이승만과 김구가 테러 행위를 계획 중이라는 고발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美軍政情報報告書’13권, 주한미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주간정보요약보고서 3(1947.2-1947.8), 일월서각, 1986, p411)
박태균 교수가 ‘○○’으로 가려놓은 이름은 원문에는 정확하게 적시돼 있다. 김구다. 그런데 이를 ‘○○’로 표시해 마치 이승만이 이 ‘○○’와 공모해 테러를 계획 중인 것처럼 표현했다.
이승만은 곧바로 이 편지를 김구에게 전달하고 하지에게 답장을 보낸 뒤 두 편지를 언론에 공개했다.
먼저 하지의 ‘편지’. ‘귀하의 정치기구의 상층부에서 나온 줄로 짐작되는 보도에 의하면 貴下와 金九氏는 미소공위업무에 대한 항의수단으로서 조속한 시기에 테러행위와 조선경제 교란을 책동한다고 합니다. 고발자들은 이런 행동에는 몇 건의 정치암살도 포함하기로 되었다 함을 중복설명합니다.’(1947년 7월 2일 ‘조선일보’)
그리고 이승만 답장이다. ‘경계자(敬啓者‧삼가 말씀드린다). 金九氏와 내가 테러 및 암살사건에 간여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6월 28일자 귀 서한은 귀하가 한인들과 지도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던 바를 한 번 더 깨닫게 한 것입니다.(중략) 이 편지를 金九氏에게 보내니 직접으로 회답이 있을 줄 믿습니다.’(앞 날짜 ‘조선일보’)
다음 날 이승만이 전달한 편지를 김구가 받고 하지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이 또한 언론에 공개됐다. ‘이승만 박사에게 보낸 각하의 서한은 나에게 전달되었습니다.(중략) 각하가 이승만 박사와 본인이 범벌계획의 혐의가 있다는 정보의 분명한 출처를 알고 있으리라고 믿습니다.(하략)’(1947년 7월 4일 ‘경향신문’)
이같은 내용은 1947년 7월 2일자 미군정 ‘일일보고 571호’에 기록돼 있다.(’미군정정보보고서’4권 주한미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4, 일월서각, 1986, p216)
그런데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도 2015년에 쓴 ‘몽양 여운형 평전’에서 ‘하지 장군은 이승만에게, 계획 중이라는 테러 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요청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고 기록했다.(김삼웅, ‘몽양 여운형 평전’, 채륜, 2015, p351) 출처는 ‘G2 보고 4, 1947. 7. 2, 329쪽’이다. ‘G2 보고’는 미군정정보보고서를 뜻한다. 김 전 관장이 인용한 이 날짜 미군정 정보보고서는 하나밖에 없다. 즉 김 전 관장 또한 이 보고서에 나와 있는 ‘하지 장군이 말한 테러의 주체’ 가운데 ‘김구’를 생략해버렸다는 뜻이다.
못 읽은 혹은 안 읽은?
박태균 교수는 ‘암살’ 서문에 이렇게 썼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자료 수집과 연구에 기초해(중략) 그 후 국내외의 관련자료가 발굴되고 현대사 연구가 진전되면서 새로운 사실이 많이 밝혀졌다.(중략) 20년 전만 하더라도 김구를 최고의 민족주의자이자 애국자라고 해도 그 누구 하나 반론을 다는 사람이 없었다. 이승만을 독재자요 국민의 생활을 파탄에 빠뜨린 사람이라고 비판해도 누구 하나 반기를 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김구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는 헛짓거리를 했다는 평가가 나오는가 하면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8월 15일을 광복절이 아니라 건국절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정권 차원에서 시도되고 있다.’(박태균, 앞 책, pp.14,15) 박 교수는 이 책 결론부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각각의 암살 사건과 관련해서 암살의 시기에 오히려 더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 이는 특히 미군정의 판단이었다.’(박태균, 앞 책, p246)
하지가 썼고 이승만이 읽었고 김구가 읽은 편지와 미군정 정보보고서에는 ‘귀하(이승만)와 김구씨’라고 정확하게 적혀 있다. 1947년 당시 신문 독자들도 다 그렇게 읽었다. 그런데 박태균 교수와 김삼웅 전 관장은 ‘김구’라는 이름을 읽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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