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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관(譯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6. 8. 17:30
 

[뉴스 속의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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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6.08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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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관(譯官)

 ▲ 1636년 제4차 통신사 일행을 그린 행렬도. 정사(正使) 뒤쪽으로 역관(譯官)과 소통사(小通事) 모습이 그려져 있어요. /부산박물관
 
부산박물관에서 7월 9일까지 '조선의 외교관, 역관(譯官)' 특별전이 열려요. 조선 시대 역관은 통역 전문가이자 실무 외교관으로 통사(通事)라고도 불렸어요. 그들은 뛰어난 외국어 능력을 바탕으로 중국이나 일본에 간 사신단에서 통역을 담당했고, 국내를 방문한 외국 사신을 수행하고 통역하는 업무를 담당했어요. 오늘날 외교관과 같은 역할을 했던 역관들이 어떻게 길러졌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볼까요.

국가가 양성한 조선 시대 역관

우리나라에서 처음 통역 업무를 전담한 관청은 고려 시대인 1276년(충렬왕 2년) 세워진 통문관(通文館)이에요. 그전까지 통역은 설인(舌人)으로 불리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맡았는데, 지식이 풍부하지 못해 오역(誤譯)을 하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일부러 틀리게 번역하는 등 폐단이 있었어요. 이를 바로잡고자 외국어 교육과 통역 업무를 담당하는 전문기관이 설치됐어요. 조선 시대에는 통문관 제도를 계승해 외국어 번역과 번역 업무를 위한 사역원(司譯院)을 만들었어요.

조선 시대 역관은 신분상 중인(中人)에 속했어요. 조선의 신분은 세습됐으므로 대개 역관은 한 가문이 연이어 배출하는 일이 많았죠. 역관은 추천을 거쳐 심사를 받고 적격자로 판정받으면 사역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외국어 공부를 했어요. 대체로 10세 전후에 사역원 생도로 들어가 외국어를 학습한 다음, 20세가 넘으면 역과(譯科) 시험을 볼 수 있었어요.

조선 시대 4대 외국어는 중국어와 몽골어·일본어·여진어였는데 그중 중국어가 가장 중요했어요. 다른 언어 전공은 역과에 배정된 인원이 2명이었으나 중국어는 13명이나 됐어요. 역과 시험 방식도 약간 달랐어요. 중국어 시험은 암송 능력뿐 아니라 유교 경전 내용을 아는지 함께 평가했어요. 중국어 역관은 조선 문관이나 명나라 관리가 사용하는 유교 경전이나 한시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 통역이 가능했기 때문이죠. 몽골어·일본어·여진어는 교재를 암송해 일부분을 베껴 쓰거나 경국대전(經國大典) 일부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시험을 치렀어요. 역관들이 공무를 수행할 때 근거가 되는 법전의 내용을 숙지하고 있는지와 그 내용을 해당 외국어로 말할 수 있는지 평가한 거죠.

하지만 조선 전기 역관 대다수는 명나라 사신을 만났을 때 원활하게 통역하지 못해 상대방이 답답해했다고 해요. 외국어를 글자로만 외우고 소릿값을 몰랐기 때문이죠. 오죽하면 10년간 중국어를 배워도 몇 달 명나라에 다녀온 사람보다도 못하다고 할 정도였대요.

실용 회화로 배우는 외국어 교재

조선 시대 사역원에서 사용한 중국어 교재로는 '노걸대(老乞大)'가 유명해요. 노걸대는 고려 상인 3명이 인삼과 모시를 팔기 위해 중국에 다녀오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상황을 대화 형식으로 구성한 책이에요. 이 책에는 여관에 들어가는 방법, 여관 주인에게 음식을 요청하고 말먹이를 요청하는 방법, 시장에서 거래하는 방법, 의원을 불러 달라고 요청하는 방법 등이 나와 있는데 요즘의 실용 회화책 같은 거예요.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중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한글로 해설한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도 편찬됐어요.

일본어 학습용 교재로는 '첩해신어(捷解新語)'가 있어요. 1393년 사역원이 처음 설치됐을 때는 중국어와 몽골어만 개설됐다가 나중에 일본어도 개설돼 일본어를 '신어(新語)' 또는 '신학(新學)'이라고 불렀어요. '첩해신어'라는 책 제목은 '일본어를 빨리 해독하는 책'이란 뜻으로 요즘으로 치면 '속성으로 배우는 일본어' 정도가 될 거예요. '첩해신어'는 동래와 부산포의 조선 관리와 부산 왜관(倭館)의 일본인이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어요. 일본인 왕래와 접대, 무역할 때 사용하는 회화를 문답체로 엮었고, 통신사(通信使) 일행이 부산포를 떠나 일본 에도(지금의 도쿄)를 다녀오는 동안 일어난 일을 대화체로 엮었어요.

외교 최전선에서 활약한 역관

역관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은 통역이에요. 조선 시대 역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홍순언(1530~1598)과 김지남(1654~미상)을 꼽을 수 있어요. 조선 선조 때 역관 홍순언은 나라를 구했다는 말을 듣기도 해요. '통문관지'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명나라로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 도중 한 여인을 구해줬는데 이 여인이 나중에 명나라 군사권을 장악한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후처가 돼요. 홍순언은 그 인연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다고 해요.

홍순언은 그보다 앞서 이른바 '종계변무(宗系辨誣)'라는 외교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깊이 관여했어요. 종계변무는 조선 건국 초기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명나라에 태조 이성계에 대한 틀린 기록을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한 것을 말해요. 명나라에서는 이성계를 그의 정적이었던 이인임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했는데, 종계변무에 관한 문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홍순언이 담당했어요. 이 문제가 해결된 후 홍순언은 중인 신분으로서는 파격적으로 종2품 벼슬까지 올랐어요.

역관 김지남이 속한 우봉 김씨 집안은 조선 후기에 역과 합격자 92명을 배출했는데 그 시작이 김지남이에요. 중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청나라에서 외부 유출을 금지하고 있던 자초법(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방법)을 중국에 갈 때마다 조금씩 알아내서 1698년 마침내 그 방법을 수록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이라는 책을 썼어요. 이 방법으로 화약을 만들면 노동력이 적게 들면서도 폭발력이 큰 화약을 몇 배나 많이 생산할 수 있었대요. 또 1712년에는 청나라 장수 목극등(穆克登)을 따라 백두산에 올라 정계비(定界碑)를 세우는 데 참여했어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이라는 경계를 정해 백두산 천지를 조선의 영토로 확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죠. 이렇듯 역관은 외교 현장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왼쪽부터) 노걸대언해, 몽어노걸대(중국어 노걸대를 몽골어로 번역한 몽골어 학습 교재), 첩해신어. /부산박물관
 일본과 외교·무역이 이뤄진 공간인 초량왜관과 일대를 그린 그림. /부산박물관
 경진년 연행도첩(燕궋圖帖) 중 문묘도(文廟圖). 1760~1761년 중국 북경을 다녀온 사신들이 영조가 열람할 수 있도록 제작한 21폭의 화첩 중 공자의 사당을 그린 그림. /부산박물관
이병호 공주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 도움말=부산박물관 '조선의 외교관, 역관(譯官)' 도록 기획·구성=김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