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을 나온 탕평 군주들, 백성 직접 만나 의견 물었다
입력 2023.04.22 00:20
업데이트 2023.04.22 02:34
[근현대사 특강] 근대의 여명 〈상〉
김홍도가 그린 ‘화성행행도’ 8폭 중 하나. 정조가 1795년 2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의 현륭원을 행행(行幸·왕의 궁궐 밖 거동)했을 때를 표현했다. 구경나온 사람들의 분위기가 자유로워 보인다. 정조는 행행할 때 민원을 접수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1960년대 일제 식민주의 역사 극복을 향해 ‘국학 붐’이 일어났다. ‘내재적 발전론’ 의 관점에서 조선 후기 상공업과 실학의 발달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서양사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근대의 기본 속성에 해당하는 것들이 우리 역사 안에서 생성되고 있었다는 관점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정조대왕 사후 세도정치라는 퇴행적 정치가 펼쳐지고 민란이 일어나는 역사에 부딪혀 걸음이 멈췄다. 1980년대에는 계급 사관 관점에서 민란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민중사관’이 대두하였으나 민중 봉기가 정권 수립에 이르지 못한 사실 앞에서 이 또한 더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조약을 근대의 기점으로 삼는 방식이 통용되었다. 문호 개방이 근대의 필수조건의 하나이므로 편한 선택이기는 하나, 근대사 연구가 자칫 망국의 과정 추적에 빠질 위험성이 있었다. 다행히 1980년대 민중사학과는 별개로 정조시대의 규장각에 주목하여 규장각 도서로 남아 있는 많은 문헌 자료를 이용한 실증적 연구 성과가 줄을 이어 나왔다. 내재적 발전론이 빠트린 정치사 영역을 채우는 내용이 많아 내재적 발전론을 새롭게 가동할 만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전후부터 조선의 왕정은 붕당(朋黨)이 공존하는 체제로 이어졌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지식인들이 늘어나 학파가 정파를 형성하면서 상호 비판하는 공존체제가 공도(公道)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데 동의하였다. 농업경제의 발달로 재지 중소지주층의 지식화가 크게 이루어지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그러나 붕당에 비중을 둔 정치운영 방식은 자칫 왕이 보이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없지 않았다.
백성 만나는 왕정, 유교정치의 새 광경
인조반정으로 집권 세력이 된 서인은 붕당정치 원리를 따르면서 집권 기반을 장기화하는 노력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서인은 군주 중심체제보다 재상 중심체제를 지향했다. 성리학을 일으킨 주자가 붕당유용론을 편 것을 근거로 한 움직임이었다. 주자가 구양수의 붕당 긍정론을 지지하면서 “공도 실현을 추구하는 진붕(眞朋)이라면 천자(효종)도 당이 있는 것을 우려할 것이 아니라 당을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진언한 것을 근거로 삼았다. 서인은 외침과 자연 재난이 거듭하는 시국을 6조 판서와 의정 대신들이 비변사에 합좌하여 국정을 풀어가는 체제를 선호하였다. 자당 출신이 합좌 구성에 다수를 차지하면서 집권을 유지하였다. 이 체제가 지속하는 한 왕은 종속성을 면할 수 없었다. 서인은 왕실 혼인을 자파 가문에서 이루어야 한다는 철칙을 암묵적으로 세워 지켰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서인이 이끄는 체제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13세에 즉위한 임금은 스승 윤휴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윤휴는 기호 출신의 남인 대학자였다. 그는 임금과 백성의 관계를 물과 배에 비유하여, 물이 노하면 배가 뒤집히는 이치를 가르쳤다. 16, 17세기는 기온 강하로 인한 자연 대재난의 장기화로 굶어 죽거나 돌림병으로 죽는 자가 한해 100만을 헤아릴 정도였다. 돌림병 때문에 임금이 궁 밖으로 나가는 것도 말렸다. 심지어 종묘에 올리는 의례도 젊은 관리나 환관을 보내 치르는 실정이었다. 윤휴는 백성과 함께하지 않는 임금은 임금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이 말에 놀란 숙종은 종묘를 직접 다녀오고 밤중에 미복으로 궁을 나와 여염을 돌면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살폈다.
그러나 비변사 국정 전담 체제에서 왕은 백성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임금이 19세 되던 해 모후 청풍김씨를 이용한 서인 측의 남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집권 남인 인사 가운데 역모 혐의가 있다고 하여 일으킨 ‘경신대출척’은 왕이 윤휴에게 사약을 내릴 정도로 험악했다. 숙종 28년 기사환국 때 서인 영수 송시열이 사사되면서 두 붕당은 원수 사이가 되었다. 남인에 대한 강·온 양론을 놓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였다.
숙종 치세에는 대동법의 전국 시행이 완료되고 5군영을 정파 중심에서 국왕 직접 지배체제로 정비하면서 군영 운영비인 군포의 납부 필수를 내리는 조치가 취해졌다. 무엇보다 국가에 대한 의무노동을 없애고 임금제도로 굳혔다. 서인의 왕실 혼인 독점 정책은 정파 대립을 왕위계승권 다툼으로 변질시켰다.
영조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영조는 종종 궁에서 나와 민심을 청취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경종이 죽고 영조(재위: 1725~1776)가 즉위한 뒤 4년 만에 임금이 형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는 이유로 소론 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평정한 후 영조는 국정 운영의 국왕 중심체제를 선언하였다. 나는 주자가 아니라 요, 순 시대의 왕정을 조선에 실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나는 나를 따르는 신하들만 데리고 임금 노릇 하겠다”고 하였다. ‘탕평 정치’가 선언되었다. 탕평은 요·순 시대 왕정의 성공한 상태를 표현하는 수식어 ‘탕탕평평’의 줄임말이었다. 영조의 방침에 따라 각 붕당에는 지지 여부로 완론과 준론의 이름이 생겼다. 한나라 시대 유학이 숭상한 『주례』의 세계 곧 주나라 문왕의 치세를 모범으로 삼겠다고 하였다. 영조의 존호 52자는 역대 왕 중 최장이었다. 중간 쯤에 ‘요명순철’ 4자가 들어있다. 요·순 임금의 ‘명철’을 체득했다는 뜻이다. 노론 측이 특별히 받드는 주자 일변도의 풍조에 대한 경고장이었다. 내각책임제와 대통령 중심체제의 대결이라면 비약일까.
영조도 아버지 숙종처럼 궁 밖으로 자주 나왔다. 인왕산 아래 경희궁을 새로 짓고 창덕궁에서 오가는 기회를 자주 만들었다. 왕은 운종로 (현 종로) 철물교 (현 탑골공원 부근) 앞에서 늘 어가를 세웠다. 육의전이 즐비하여 상인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다. 임금은 그들에게 고충을 물으면서 “시민이 나라의 근본”이라고 추켜 올렸다. 시민은 시전 상인의 줄임 말이다. 중상주의라면 비약이겠지만 ‘농자 천하지대본’의 시대에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영조의 과단성 넘치는 정치는 세자를 스스로 죽이는 참극을 동반했다. 대리 청정을 맡은 사도세자가 당파 정쟁에 휩쓸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해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임금이 아들을 처벌하는 형벌이 없어 택한 조치였다. 영조는 전국의 농민 부담인 군포를 2필로 일제히 낮추기 위해 연안 지역의 어장과 염전을 새로운 세원으로 개발하였다. 균역법이란 이름의 세제 개혁은 어장, 염전을 소유한 지방 토호들의 반발을 샀다. 임금은 창경궁 홍화문 앞에 군인, 상인들을 모아놓고 법안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었다. 국가 원수가 국세 부담자 의견을 직접 듣는 역사적인 자리였다. 세자의 죽음으로 균역법의 난항은 해소되었다. 신하들이 임금을 무서워하였다. 영조는 도망간 노비를 찾지 못하게 하는 법도 만들었다. 왜란, 호란 후 고을 인구의 30%까지 파악되던 노비 인구가 10% 미만으로 크게 줄었다.
정조의 화성 행차, 능행 정치의 절정
1776년 영조가 82세로 승하하고 24세의 세손이 즉위하였다. 정조는 동궁 시절 서재 정이당(貞頤堂)을 규장각으로 확대 개편하고 여기에 일급 신하들을 모았다. 천하의 서적을 모으고 왕정의 역사를 정리하고 새로운 정책을 개발하는 곳으로 발전시켰다. 군주 중심 정치의 질을 높이는 것이 목표였다. 창덕궁 후원에 새로 지은 본관 건물은 큰 주머니로 합친다는 뜻으로 주합루(宙合樓)라고 불렀다. 이곳은 경연 장소로도 활용하여 군신 간의 정책 토론 장소 기능도 부여하였다. 임금과 신하가 높은 수준의 정사를 함께 하는 전통을 만들어갔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궁 밖 행차를 도성 밖 행차로 발전시켰다. 경기 일대에 산재한 역대 왕들의 능을 찾아 효도한다는 명분으로 ‘능행’을 자주 가졌다. 예컨대 선릉을 참배할 경우, 오가는 시간과 쉬는 곳을 미리 공고하였다. 어가가 쉬는 곳은 민원을 접수하는 장소로 삼았다. 그는 능행을 백성과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듣고 풀어주는 기회로 만들었다.
아버지 묘소가 있는 화성 행차가 ‘능행 정치’의 절정이었다. 이때는 충청·전라·경상도 사람들까지 올라왔다. 한강 건너기가 난제였으나 쉽게 해결했다. 경강상인들의 배를 동원해 배다리를 만들고 그들에게 조세 운송 우선권을 주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시간은 저녁 시간으로 잡아 남대문을 들어오면 호위 무사들이 등불을 들게 하고 어가의 창을 열어 불빛으로 임금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를 보려는 ‘관광(觀光)’ 인파가 많을 때는 10만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궁 밖을 나와 수많은 백성을 만나는 왕정, 유교 정치의 새로운 광경이었다. 19세기 후손 왕들이 이를 어떻게 계승할지가 조선의 자력 근대화 여부의 입론을 좌우할 문제였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수가 있다.
탕평정치가 잉태한 심청전·춘향전, 새로운 역사 신호였다
[근현대사 특강] 근대의 여명 〈중〉
‘열녀춘향수절가’ 경판본, 한글박물관 소장본. 민간 출판이란 뜻으로 방각본이라고도 한다. [사진 한글박물관]
심청전과 춘향전은 조선 후기 대중문화의 양대 명작이다. 판소리와 소설책 두 종류로 전해왔다. 언제 등장한 작품일까. 국문학계에 따르면 춘향전은 유진한(柳振漢)의 한시 「춘향전」이 최초다.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의 후손인 작자가 1753년(영조 29년) 전라도 여행에서 돌아와 이듬해에 지은 것으로 춘향전 줄거리가 담겼다. 그곳에서 들은 것을 한시로 남긴 것이다. 춘향전의 본령은 판소리 완판본(전주)이다. 19세기 초반 전주 일원에서 등장하여 신재효(1812~1884)의 남창본(男唱本)에서 집대성되었다. 1867~73년 사이 정리된 대표작이다. 경판 춘향전은 읽기용으로 ‘열녀 춘향 수절가’란 제목이 붙었다. 1864~69년 무렵 소설로 나온 『남원고사(南原古詞)』는 책 빌려주는 점포에서 인기 최상이었다. 결론적으로 춘향전은 18세기 중반에 등장하여 19세기 초중반에 소리와 소설 두 가지 형식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심청전은 한문으로 된 것이 없고 한글 소설로는 경판본과 안성본, 판소리로는 완판본이 있다. 판소리로는 신재효의 것이 역시 대표작이다. 국문학계는 최초 판본이 19세기 초에 나온 것에 모두 동의하고 있다.
18세기 들어 평민 열녀 전기 등장
춘향전과 심청전의 주인공은 열녀와 효녀이다. 열녀의 역사는 오래다. 조선 전기 『삼강행실도』가 언해본으로 보급되면서 생긴 역사다. 각 고을 읍지(邑誌)를 보면 「효행」 「열녀」 항목이 세워지고 시대가 지날수록 뽑힌 인물의 수가 늘었다. 「효행」에는 남자가 대부분이고 효녀는 어쩌다 보인다. 「열녀」에는 적지 않은 평민과 천인의 이름이 올라 있다. 18세기에 들어와 평민 열녀의 전기(傳記)가 등장한다. 조귀상의 「향랑전(香郞傳)」을 비롯해 6편 정도가 확인된다. 전기는 정려문 세우기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 수절 내용을 후세에, 그리고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도 알리는 효과가 있었다. 18세기 서민 보호 정치를 내세운 탕평 군주 시대에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진한의 한시 춘향전도 굳이 따지면 이 계열에 속한다. 그런데 심청전의 연원으로 간주할 만한 효녀 ‘전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딱지본 심청전 표지. [사진 이태진]
숙종은 재위 7년(1681)에 한강 노량진 언덕에 버려지다시피 한 사육신의 묘들을 찾아 새로 정비하게 하고 그 충절을 기리는 민절사(愍節祠)를 세웠다. 그 전까지 사육신은 세조에 대한 불충과는 동전의 양면 관계여서 왕실의 ‘뜨거운 감자’였다. 숙종이 과감하게 금기를 깨고 진정한 충신의 표본으로 사육신을 내세웠다. 신하들의 끝없는 정쟁에 대한 분노였을까. 임금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이곳을 몇 차례 직접 찾았다. 어느 행차 때 한 여성이 어가 앞에 뛰어들었다.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미복으로 여염을 도는 군주에 대한 서민의 기대가 없었다면 이런 돌출 행위는 있기 어렵다. 신분제 관료국가에 백성의 억울함은 수도 없이 많았다. 정조 임금이 능행 중 쉬는 곳에서 상언(上言)을 접수한 것은 서민사회의 이런 여망이 만들어낸 것이다. 보증인을 요구하는 상언 문서를 갖출 수 없는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꽹과리 치기(격쟁, 擊錚)방식도 허용되었다.
정조는 재위 18년(1794) 정초에 백관을 거느리고 할머니(영조 계비 정순왕후)와 어머니(혜경궁 홍씨)를 찾아 특별한 세배를 올렸다. 할머니가 50세, 어머니가 60세 되는 해였다. 할머니가 계비로 늦게 간택된 탓으로 며느리보다 10세 연하였다. 정조 임금은 두 어른이 같은 해에 순년(旬年, 10년 단위)을 맞이한 것을 “천 년에 한 번 있을 경사”라고 축하하였다. 이어 신하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전·현직 관리 70세 이상, 사(士)·평민 80세 이상, 80세 미만이라도 해로하고 있는 부부들을 모두 조사하여 ‘작위’(품계)를 내리고 해당자의 이름과 나이를 적어 올리게 하였다. 9개월 뒤 총 7만5145인의 이름과 나이를 담은 『인서록(人瑞錄)』이 올려졌다.
딱지본 춘향전. 1910년대부터 반세기 동안 5일 장터 책 장수들에 의해 널리 팔렸다. [사진 이태진]
정조는 요임금 시대에 장수, 부귀, 다남(多男)의 태평성세를 누렸다는 화서국(華胥國)의 실현을 꿈꾸었다. 아버지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도시를 새로 만들어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불렀다. 화성은 조선의 화서국이었다. 『인서록』은 곧 왕실 두 어른의 특별한 신희(新禧)을 기념하여 화서국의 장수 실현을 기약한 책이다. 이해 신도시 화성과 아버지의 원묘(園廟) 현륭원 공사가 완료되었다. 아버지의 신분이 세자였으므로 능이 아니라 원이었다. 임금은 이듬해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의 진갑 잔치를 성대하게 열 계획으로 12월에 정리소(整理所)를 세웠다. 영의정을 역임한 채제공을 총리대신, 호조판서를 정리사, 그 아래 중신 5명을 배치하여 10만여 냥의 예산을 배정하여 모든 행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일반 백성도 유교 실천 덕목 공유
정조대왕 어진. [중앙포토]
이듬해 윤2월 11일 예정대로 임금은 어머니를 모시고 화성으로 갔다. 먼저 아버지의 묘원을 찾아 인사를 올렸다. 이어 화성 낙남헌에서 어머니 생일을 기념하여 문·무 특별 과거시험을 연 뒤 봉수당에서 어머니 생일잔치를 올렸다.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은 1735년(을묘, 영조 11년) 생으로 동갑이었다. 흔히 ‘을묘 원행(園幸)’으로 불리는 이 행사는 김홍도의 「화성행행도」 8폭에 담겼다. 다음날 낙남헌에서 양로 잔치가 열렸다. 서울에서 수행한 노 대신 15명과 화성 거주 노인 969명 총 984명에게 음식과 작위를 내렸다. 네 번째 화폭에 그 광경이 담겼다. 서장대 군사훈련(제5폭), 신하들과의 활쏘기 대회 행사(제6폭)를 차례로 마치고 환궁하기 전 임금은 남은 비용을 ‘정리곡’이란 이름을 붙여 전국 8도에 내렸다. 각 도에 1000~3000냥씩 나누어 화성 잔치의 기쁨을 온 백성과 함께하는 뜻을 실었다.
효녀 심청이 인당수에 던져진 후 용왕의 배려로 연꽃으로 세상에 되돌려 보내져 마침 그곳을 지나던 뱃사람들이 그 연꽃을 건져 임금에게 바쳤다. 임금은 연꽃이 처녀로 변하자 왕비로 삼았다. 왕비 심청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전국의 맹인 잔치를 열어 부녀 상봉이 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아버지 심 봉사는 딸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뜬다. 이 줄거리에서 주목할 것은 지극한 효성이면 평민도 왕비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 그리고 왕실이 마련한 전국 맹인 초대 양로 잔치이다. ‘을묘 원행’의 양로 잔치가 없었다면 있기 어려운 구성이다. 심청전이 ‘을묘 원행’ 직후 19세기 초에 처음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화성 양로 잔치가 없었더라면 그런 높은 구성력을 지닌 작품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2년 뒤(1797년) 새해 첫날 정조는 다시 신하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의 기쁨을 팔도 신민들과 함께 누리고자 효자를 표창하고 노인을 경모하는 의식에 최선을 다하였으나 내가 부덕한 탓으로 풍속이 새로워진 것이 없다고 하면서 특별한 조치를 지시하였다. 요순시대처럼 오륜을 닦는 것이 주요하므로 모든 공부의 출발인 『소학』을 백성들이 뜻을 쉬이 알 수 있도록 설명[訓義]를 붙이고, 또 『삼강행실도』와 『이륜행실도』를 합친 『오륜행실도』 언해본을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농촌에서 노인을 앞세우는 「향음주례」를 행하여 노인을 섬기면서 농민들이 힘써 농사짓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자 하며, 「향약」 또한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요결이므로 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듬해 그 결과로 언해본 『오륜행실도』가 간행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이 책 머리에 앞의 지시를 정리하여 양로와 무농(務農)을 위해 소학·오륜행실·향음주례·향약을 반포하는 「윤음」을 붙였다. 소학, 오륜행실, 향음주례, 향약 등은 지금까지 양반 사대부들의 것이었다. 정조는 일반 백성들도 이를 공유하여 그들이 유교 덕목 실천 주체가 되어 나라의 주인 의식을 가지게 하려고 하였다. 서민 대중의 국가 의식에 큰 변화를 가져올 조치였다. 춘향전의 하이라이트는 수청 들라는 변 사또에 대한 춘향의 항변이다. 남자는 두 임금을 모실 수 없고, 여자는 남편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천륜인데 나보고 수청들라는 사또 당신은 임금을 바꿀 사람이라고 질타한다. 효성이 지극하면 평민 출신도 왕비가 될 수 있다는 심청전의 메시지도 같은 지향이다. 어사 출두 후 이 도령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춘향은 나중에 나온 판본에서 지위가 첩에서 처로 바뀌고, 왕이 춘향에게 특별한 상을 내리는 것으로 끝이 맺어진다. 두 작품은 곧 탕평 군주, 특히 정조가 모든 신민이 나라 주인이 되게 하려는 새로운 역사 만들기에 대한 합창이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수가 있다.
정조가 꿈꾼 만민평등 ‘공화’ 세계, 세도정치에 막히다
[근현대사 특강] 근대의 여명 〈하〉
효명세자 대리청정 시기 제작된 『동궐도』 중 ‘폄우사(①)’와 ‘만명당(②)’ 6각 정자. 정조는 이 건물(②)을 존덕정으로 불렀으나 『동궐도 』에는 건물이름이 없다. 현존 존덕정은 나중에 새로 지어져 이와 다른 모습이다. [사진 이태진]
정조는 재위 20년(1796)에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란 글을 썼다. 화성(수원) ‘현륭원 행차’에서 돌아온 이듬해였다. ‘만천명월주인옹’은 임금의 호, ‘자서’는 내가 쓴다는 뜻이다. 수많은 하천(萬川)에 밝은 달(明月)이 하나씩 담기는 것이 백성과 임금의 관계라는 내용이다. 밝은 달은 군주인 나이자 태극으로, 태극이 음양-4괘로 분화하여 이르는 최종의 획 1677만 여를 나의 백성의 수라고 하였다. 백성은 곧 군주의 분신이라는 선언 아닌가. 군주가 나뉘어 백성이 되었다는 군민일체(君民一體)의 사상이자 신분제도를 근저에서 무너뜨릴 혁명적 사고다. 정조는 이 무렵 ‘민국(民國)’이란 단어를 즐겨 썼다. 국(國) 곧 왕실과 대·소의 민(民)이 곧 나라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민국사(民國事)’라는 말도 자주 썼다.
서얼 차별 없애고 노비제 혁파 결심
1800년 초 정조는 서얼(첩 자식) 차별을 없애는 법을 세우고, 노비제도의 전면 혁파를 결심한다. 이 해 외할아버지 홍봉한이 영조에게 올린 건의들을 모아 외삼촌 홍낙임과 함께 정리하여 『어정(御定) 홍익정공주고(洪翼靖公奏藁)』라고 이름 붙였다. 이 책 노비 항목의 서문 「노비인(奴婢引)」에 공·사노비 전면 혁파 결심을 적었다. 영조가 익정공의 건의로 도망 노비를 잡지 못하도록 한 조치를 크게 발전시킨 결단이었다.
정조는 앞서 재위 15년(1791)부터 과거 제도의 혁신을 꾀하였다. 『주례』는 시험으로 관리 뽑는 것을 빈흥(賓興), 곧 손님을 찾아 모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빈흥시’라는 이름으로 각 도마다 소과 시험을 차례로 시행하고 그 결과를 도별 『빈흥록』에 담았다. 여기에 실린 각도 합격자 명단에 놀랍게도 4조(祖) 표시가 없어졌다. 이제부터 관리 등용에 양반과 평민을 따지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정조 말년 이 나라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공화’의 기둥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정조는 노비제 혁파 결정을 내린 뒤 심한 피부병으로 병석에 눕는다.
창덕궁 후원에 있는 6각 지붕의 존덕정. 이 정자에는 새로운 정치에 대한 정조의 의지를 담은 글 ‘만천명월주인옹자서’가 새겨진 나무판이 걸려 있다. [뉴시스]
정조는 밤새워 일할 때가 많았다. 할아버지 영조가 곤장 크기를 줄였듯이 서민들의 억울한 죽음을 막아야 한다는 뜻에서 사형 판결은 집행하기 전에 모두 임금에게 올리게 하고 자신이 밤을 새며 재심, 3심을 했다. 그 사례를 묶은 『심리록(審理錄)』(1789)을 분석한 한 연구는 임금이 내린 최종 사형 판결은 원심의 2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과로가 겹쳐 재위 24년(1800) 6월 14일 병석에 눕고 만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온몸에 퍼진 크고 작은 종기에서 피고름이 흐르면서 고열에 시달렸다. 큰 종기는 벼루 크기만 했다고 한다. 6월 28일 임금은 백약이 무효하여 유명을 달리하였다. (병석의 정조가 의원들과 나눈 병 증상에 관한 『실록』 기록 8건을 이성낙 교수(전 가천대 총장·피부학)에게 보내 자문한 결과 무서운 ‘전신성 패혈증’으로 진단하였다.)
정조는 자식 복이 없었다. 왕비(효의왕후) 몸에 소생이 없고 재위 6년(1782) 의빈 성씨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바로 세자(문효)로 책봉했으나 4세에 사망하고 4년 뒤 수빈 박 씨 몸에서 둘째 아들을 얻어 재위 24년(1800) 1월 1일 11세 때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해 2월 할머니(정순왕후, 영조 계비)와 어머니(혜경궁) 뜻으로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했다. 어린 세자는 책봉 5개월 만에 국상을 치르고 7월 왕위에 올랐다. 이가 곧 순조이다.
1800년 순조 즉위 당시 궁중의 어른은 정순왕후 경주김씨였다. 정조 치세에 대비의 오빠 김귀주 일당은 노론 벽파(탕평 정치 거부파)의 핵심으로 정조와 자주 충돌하였다. 순조 원년 1월 대비의 수렴청정 아래서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대비 측의 벽파가 정조 친위세력(시파) 가운데 서학(천주교)에 가까이 간 사람이 많았던 것을 악용해 ‘사옥’을 일으켰다. 정조는 서학에 대해 유학을 바로 세우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면서 관용적이었다. 저들은 그 관용이 화를 불렀다고 하여 300여 명을 잡아 죽이거나 유배 보냈다. 정조가 양성한 우수 인재 다수가 제거되었다. 세자 보호 부탁을 받은 김조순마저 뒤로 물러서 있었다. 이듬해 1월에는 대비가 직접 나서 정조가 내린 노비 혁파 결단을 실행한다면서 왕실 소속 공·사노비 문서를 불태웠다. 6만6000여명의 왕실 소속 노비가 해방되었으나 양반 사대부들의 노비는 그대로 남았다.
효명세자, 시중에 서점 세우기 권장
창덕궁 후원 존덕정 내부. 아래 현판이 정조의 글이다.
국정은 외척 세도 세력이 비변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정조 왕정의 중심이던 규장각은 기록 담당 기능만 남겨졌다. 정조 왕정의 하이라이트 능행(陵幸) 정치도 외형만 남았다. 정조 24년간 160회(연간 6.7회)에 비해 순조 34년간의 능행 87회(연간 2.5회)는 그래도 모양새는 유지한 셈이었다. 그러나 어가가 쉬는 곳에 백성들이 보이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억울하게 죽은 집안 어른의 원한을 호소하는 양반 자제들만 기다리고 있었다. 평민들은 접근을 금지당했다. 헌종 15년의 37회, 철종 14년 55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11년 관서 지방에서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 평안도 사람들은 왕조 초기부터 과거 시험을 볼 수 없었다. 정조 말년의 『관서 빈흥록』(1800)은 이런 차별을 없앴다. 부푼 기대가 정조 사후 세도정치로 거품이 되고 말자 난이 일어났다. 홍경래 난은 안동김씨 김조순이 집권한 가운데 진압되었다. 5년 전 정순왕후와 그 오빠 김관주가 사망함으로써 경주김씨는 정국에서 사라졌다. 이 무렵 임금 순조는 정양을 자주 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스스로 국정이 소홀해진 점을 안타까워하던 중 재위 27년 2월 세자(효명)가 19세가 되어 바로 대리청정을 명하였다.
할아버지 정조의 ‘호문(好文)’ 자질이 격세유전되었던가. 효명세자는 매우 영특했다. 1830년 5월 대리청정 3년 만에 2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440편의 시부(詩賦)와 10편의 악장을 남겼다. 대리청정 2년여에 내린 영지(令旨·대리 어명)만 114건에 달하였다. 세자는 대리청정 중에 창덕궁 후원에 연경당(演慶堂)을 새로 지어 거처로 삼았다. 앞서 세자로 책봉되어 학업에 열중하기 위해 지었던 조그마한 누각 의두각(倚斗閣)·기오헌(寄傲軒)처럼 단청을 칠하지 않았다. 군주라도 학인으로서 지켜야 할 검소한 생활 실천의 표시였다.
효명세자는 할아버지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세워 요순시대의 재현을 꿈꾸면서 내세운 서민 보호 정치를 다시 일으키고자 힘썼다. 정조가 「만천명월주인옹자서」를 목판에 새겨 걸어둔 존덕정(尊德亭) 옆에 작은 건물 폄우사(砭愚榭)를 지었다. ‘폄우’는 돌침으로 머릿속의 어리석음을 쳐서 깨친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학문을 닦던 세자는 존덕정을 ‘만명당(萬明堂)’으로 지칭하여 시를 지었다. ‘만천명월’을 줄인 시제 ‘만명’은 곧 백성은 군주의 분신이라는 할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겠다는 굳은 다짐이었다.
세자는 백성들에게 책 읽기가 ‘수신제가’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하면서 시중에 서점 세우기를 권장하였다. 많은 사람의 기대를 모았던 영특한 세자가 대리청정 3년 만에 알 수 없는 병으로 각혈하고 사망하였다. 아버지 순조는 “아! 하늘이 어찌 이렇게도 일찍이 너를 빼앗아 가는가. 상제(上帝)가 너를 데려가 섬기게 하려는 것인가. 이 나라를 망하게 하려고 이러는가”라고 애통했다. 저자 사람들도 모두 머리를 풀고 울었다.
세자는 대리청정 중에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를 불러 할아버지의 학문을 정리해 올리라고 명하고, 박제가의 문인이던 추사 김정희도 가까이하였다. 세자의 부름을 받은 윤종의, 남병철, 김영작 등은 모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영향을 받은 북학파 계열 영재들이었다. 오랑캐라도 문명이 앞서면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근대의 새벽을 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결집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4년 뒤 순조 왕정이 막을 내렸을 때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은 겨우 8세였다. 대비 순원왕후(안동김씨)의 수렴청정을 거쳐 안동김씨의 세도는 헌종 재위 기간에 하늘을 찔렀다. 그들은 헌종이 재위 15년에 22세로 사망하자 ‘강화도령’을 찾아 왕위에 앉혔다. 효명세자와 같은 왕실의 도전 싹을 없앨 속셈이었다. 효명세자에게 모였던 북학파 영재들은 세자빈 조씨(헌종의 모·신정왕후)가 대비로서 다음 왕위를 지명하게 될 날을 기다려야 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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