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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알려진 작은 곳 향한 발걸음… 지친 마음에 ‘나침반’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2. 29. 12:50

덜 알려진 작은 곳 향한 발걸음… 지친 마음에 ‘나침반’되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문화일보입력 2022-12-29 09:05업데이트 2022-12-29 11:49
박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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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군위군의 ‘사유원’을 대표하는 건축물인 ‘소요헌’. 포르투갈의 세계적인 건축 거장인 알바로 시자의 작품이다. 사유원은 오래된 나무와 겸손한 자연, 그리고 ‘쓸모’ 대신 ‘존재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것 같은 예술적 건축물들이 어우러지는 공간이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올해의 여행 BEST 5

지난 한 해 동안에도 문화일보 Culture & Life는 많은 곳을 다녔습니다. ‘위드 코로나’의 본격 시행으로 조심스럽게 여행이 다시 시작되면서 여행지를 찾아가는 마음은 한결 가벼웠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폭증하면서 이내 다시 발이 묶이기도 했지만, 그럴수록 여행의 효용에 대한 믿음은 더 단단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1년은 이른바 ‘포스트 코로나 시대’ 여행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해 모색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여행의 방식’에 대한 기사가 유난히 많았던 이유입니다. 크고 이름난 것보다 덜 알려졌거나 작은 것에 대한 이야기에 주목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습니다. 여행이 좀 더 나은 일이 되려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Culture & Life가 뽑은 올해의 여행지 5곳은 여행의 방식을 생각하게 했던 곳들이었습니다.

글·사진 = 박경일 전임기자

#1 군위 사유원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 1년간 3만명이 휴식·명상 즐겨



지난 1년 동안 소개한 공간 중에서 가장 논쟁적이었던 곳은 경북 군위의 사유원이었다. 법적으로는 ‘수목원’이지만, 식물원도 휴양림도 아닌 곳.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의 공간에서 휴식하고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오래된 모과나무와 배롱나무 숲을 비롯해 포르투갈의 세계적인 건축가 알바로 시자, ‘빈자의 미학’이란 개념으로 이름난 건축가 승효상, 세계적인 조경의 장인 가와기시 미쓰노부, 국내 최고의 조경가 정영선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기왕에 없던 개념의 공간이기도 하고, 공간 구성도 독창적이었지만, 사유원에서 가장 논쟁적이었던 건 단연 ‘비싼 입장료’였다. 사유원 입장료는 5만 원. 주말에는 6만9000원으로 오른다. 스테이크 저녁 식사를 엮은 관람 패키지 상품은 주말 21만9000원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사전예약을 하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었다. 오만하다 할 정도의 자부심이다. 궁금했던 건 이런 자부심이 과연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것이었다.

이런 가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껏 입장료는 변함이 없다. 다만 저녁 식사 패키지 가격을 오는 1월에만 한시적으로 15만2000원으로 조정했다. 이 경우도 스테이크 메뉴를 ‘세미 스테이크’로 바꾼 것이어서 가격 인하라 할 수는 없다. 관람일 이틀 전 예약 원칙도 여전히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경북 외딴곳이란 불리한 입지에다 만만찮은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작년 9월 개관 이후 사유원을 찾은 관람객이 3만 명이 훌쩍 넘는단다. 입장객 10명 중 6명은 수도권 거주자이고, 같은 비율만큼이 이른바 ‘MZ세대’다. 눈여겨볼 만한 건 관람객들의 평균 체류 시간이다. 정원과 건축물을 둘러보는 게 전부인 정원에서, 관람객들은 5시간이 넘게 머물렀다. 늙은 나무와 공들인 자연, 생각을 도와주는 건축과 조경을 차분하게 들여다본다는 얘기다. 관람객 3만 명이 각각 5시간을 썼다면 ‘15만 시간’이다. 관람객들이 사유원에다 쌓아두고 간 시간이 그만큼이다.

사유원은 생각과 명상을 이끌어 내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공간의 가치를 사람들이 알아주기 시작했으며, 그런 공간에 기꺼이 그에 값하는 비용을 낸다는 것을 자신만만하게 증명해 보였다. 이로써 논쟁은 마무리됐다.

 전남 신안군 흑산도 상라산 정상에서 흑산항 일대를 내려다본 모습. 조심스럽게 여행이 다시 시작되자마자 홍도와 흑산도를 찾았던 건 그곳이 코로나19로 가장 멀어진 명소였기 때문이었다.


#2 흑산도·홍도

멀고 바닷길 거칠어도 변함없이 ‘추억의 자취’ 가득


지난봄은 이른바 ‘위드 코로나’ 시행으로 여행이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되던 때였다. 이후 코로나 확진 환자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폭증하면서 다시 거리 두기가 강화되긴 했지만 말이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던 곳이 전남 신안의 홍도와 흑산도였다. 그곳에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10년 뒤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그래서 추억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는 홍도와 흑산도를 둘러보고 소개했다.

거리가 멀고 바닷길이 거칠어 평소에도 홍도와 흑산도는 큰맘 먹어야 갈 수 있는 로망의 여행지였다. 팬데믹 기간에 여행자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던 곳이 섬이었는데, 뱃길까지 멀었으니 관광으로 생계를 잇던 홍도와 흑산도 주민들에게 지난 몇 년은 가장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었다.

경제적 어려움도 어려움이었지만, 고립된 공간인 섬에서는 감염의 공포 또한 컸다. 홍도 주민들이 얼마나 공포에 시달렸는지를 알 수 있는 얘기를 최성진 홍도 1구 이장에게 들었다. 대구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속도로 확산하던 2020년 4월 초. 최 이장은 홍도로 여행 온 대구의 60대 초반 부부를 오랜 설득 끝에 타고 온 배편으로 되돌려보냈다. 부부는 확진자가 아님에도 대구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홍도 땅을 밟지도 못하고 시한폭탄 취급을 받으며 돌아갔다. 그때의 일이 못내 미안했던 최 이장은 한 달쯤 뒤에 대구의 부부에게 전화를 걸어 백배사죄를 하고, 홍도에서 거둔 특산물에 ‘꼭 다시 한 번 방문해달라’는 초대의 편지를 동봉해 보냈다고 했다. 최 이장은 최근 대구의 부부로부터 “내년 봄쯤 홍도에 가겠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이들 부부를 어떻게 맞이할지 궁리 중이라는 최 이장은 기대 속에서 이들 부부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일상을 되찾으면서 여행이 다시 시작되고, 관계도 다시 복원되고 있다. 거리 두기로 멀어졌던 관계는 점점 가깝게 회복되고 있다. 지난해 봄 ‘겨우 유람선을 띄울 수 있을 만큼’만 회복됐을 무렵에도 주민들은 “지난 2년간의 적막에다 대면 그래도 이게 어딘가”라고 했었다. 그리고 “섬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지 알게 됐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은 겨울이라 관광객이 거의 없어 섬이 텅 비다시피 했지만, 이제 봄이 오면 완연히 훈기가 돌기 시작하리라.

 강원 춘천의 닭갈비골목. 춘천을 소개하면서 여행의 목적이 그곳에 깃든 시간과 이야기를 들춰보는 일일 수도 있음을 얘기했다.


#3 춘천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와 시간따라 흐르는 ‘아웃사이더의 생생 기록’


여행의 목적이 어찌 잘 나온 ‘인생 사진’ 한 장 남기는 일뿐일까. 그곳이 어디든 사진 찍기 좋은 곳이나 줄 서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일관하는 과시적 여행법과는 좀 다른 방식의 여행을 제안했다. 목적지는 춘천. 이곳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는’ 여행을 했다. 좋은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하다. ‘어떻게’의 답은 ‘자세하게’다. 애정을 담고 자세히 보면 대단찮아 보이는 것들의 진짜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법. 오래 들여다보면 모든 것은 ‘입체적’으로 변한다.

여행의 방법은 간단하다. 뒷골목을 기웃거리다 별것 아닌 장소에서 문득 멈춰서 거기 깃든 시간을 우두커니 들여다보는 방식. 도시와 골목의 역사를 밑그림으로 놓고 오래된 가게와 그 가게를 지켜온 이들, 그리고 골목에서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과거의 지층을 읽었다.

이런 방법으로 요선동 먹자골목의 ‘동대문곱창’부터 생선구이 백반을 내는 ‘강릉집’, 시아버지 가게를 며느리가 이어받아 운영하는 ‘독일제빵’, 노포 중의 노포 갈비집 ‘봉운장’, 40년 넘는 내력의 경양식집 ‘함지’를 찾아 이야기를 들었다. 제일종합시장의 ‘토탈패션’ 사장 최현숙 씨가 여자 팔씨름대회 왕중왕전에서 준우승하기까지의 사연도, 영국 프리미엄리그 토트넘의 손흥민 선수가 춘천의 고향 집에 오면 추억의 경양식집 ‘함지’에 꼭 들른다는 이야기도 소개했다. 혼자 들어가 고기를 시켜놓고 술 한잔할 수 있는, 마침 비 오는 날이라면 더 운치 있을 대폿집 ‘정선달’, 꼭 사지 않더라도 오래된 추억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음반가게 ‘명곡사’, 주택가 뜬금없는 자리에 간판도 없이 성업 중인 ‘가보자 순대국’ 이야기가 있다. 못내 아쉬웠던 건, 지면 사정상 60년 넘는 내력의 슈즈 살롱 ‘에스피어’를 운영하던 이강수(88) 씨의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얘기를 소개하지 못한 것이었다. ‘에스피어’는 기사가 나오고 보름여 지난 뒤에 폐업했다. 욕망과 과시의 사진 찍기가 이른바 인싸(인사이더)들의 여행이라면, 이렇게 이야기와 시간을 따라가는 여행은 아웃사이더의 여행이니 이름하여 ‘아싸여행’이다. 춘천의 골목으로 이야기와 추억을 찾아 떠난 여행은 이런 ‘아싸여행’에 대한 제안이자 선언이었다.

 태국 방콕의 짜오프라야 강변에서 뒤돌아 바라본 왕궁 일대 풍경. 팬데믹 와중에 태국에서 여행이 앞으로 어떻게 바뀌게 될지를 보았다.


#4 태국 푸껫

이슬람 마을 ‘방롱빌리지’서 농촌마을 체험


관광 대국 태국이 팬데믹 와중에 조심스럽게 외국인 여행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할 무렵에 방콕과 푸껫을 다녀왔다. 입국자의 신속한 코로나 검사를 전제로 한 이른바 ‘테스트 앤드 고’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감염병의 위세는 기세등등했던 때였지만, 앞으로 달라질 여행의 방식과 내용이 궁금했다.

동기부터 조건, 그리고 방식까지 코로나19 이후에 여행의 거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다시 시작하는 여행’은 과거의 여행과 무엇이 다를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행은 조심스러웠다. 비행기 안에서, 혹은 식당 안에서 누구 하나 잔기침이라도 할라치면 공포의 시선들이 한꺼번에 모였다. 살얼음판 같았다. 확률은 적었지만 만에 하나 여행 중 확진자가 된다면 여행은 악몽이 될 게 틀림없었다.

태국 방콕은 착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과거에는 늘 분주하고 소란스러우며 달뜬 느낌이었는데 당시의 방콕은 이전과 같은 도시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했다. 밤마다 불야성을 이루던 배낭여행의 성지였던 카오산 로드의 풍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거리는 텅 비다시피 했고 거리는 어두웠다. 푸껫은 그나마 돌아온 여행자들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회복 중이었다.

태국관광청은 뜻밖에 이름난 관광지 대신 방콕 차이나타운 변두리의 뒷골목을 여행지로 추천해줬다. 자동차 부품상이 늘어서 있던 공구 거리를 청년과 예술가들이 감각적인 공간으로 꾸며낸 이른바 ‘도시재생’ 공간이다. 관광객을 이름난 관광명소로 한꺼번에 몰아넣는 식의 여행은 팬데믹 시대에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다양한 목적지를 발굴하고 동선을 세분화해서 관광객을 분산하려는 의도가 명확했다.

푸껫에서는 이슬람 마을 ‘방롱빌리지’의 로컬 투어를 소개해줬다. 파인애플을 수확하고, 고무를 채취하고 코코넛으로 디저트를 만들어 먹는 체험을 진행하는 투어다. 우리 식으로 치면 ‘농촌체험마을’쯤 되는 곳이다.

문화 인프라를 바탕으로 관광지를 구축하면서 지역의 고유성을 되찾고, 쇠락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식으로 여행은 달라지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게 달라져 가고 있다.

 울산 관광을 대표하는 캐릭터 울산 큰애기. 여행자들을 공업 도시 울산의 압축 성장기 시절 추억으로 이끄는 캐릭터다.


#5 공업 도시 울산

공업으로 일으킨 도시… ‘울산 큰애기’ 독특한 풍경


울산을 두고 흔히 ‘노잼 도시’라 부른다. ‘노잼’이란 ‘노+재미’란 뜻. 울산이 ‘재미를 느낄 수 없는 도시’란 얘기다. 압축 성장의 시대에 공업으로 일으켜 세운 도시여서 오랜 역사도, 빼어난 자연경관도 없으니 그런 별명이 붙었을 것이었다. 공업 도시란 사실 즐거움과 가장 멀어 보인다.

하지만 울산에는 최빈국에서 시작해 압축 성장의 견인차로 성장하기까지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울산만의 풍경이다. 어려웠던 시절의 희망, 성취감과 자부심, 아련한 추억이 울산이 건너온 시간에 골고루 버무려져 있다. 울산의 도심을 여행한다는 건, 그런 시간을 엿보는 일인데, 그 재미가 뜻밖에 각별하다. 하나의 도시의 이야기를 드물게 두 번으로 나눠 소개한 이유다. 울산 구도심을 여행하는 키워드는 ‘울산 큰애기’다. 울산 큰애기는 1965년에 히트한 가수 김상희의 노래 제목이자 노랫말의 주인공. 울산 구도심에는 울산 큰애기 캐릭터와 상징물이 곳곳에 있다.

노래가 히트한 1965년 무렵은 공업 도시로 지정된 울산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때였다. 공장이 속속 들어서면서 일자리를 찾아 전국에서 외지인이 쏟아져 들어왔고 울산의 경기는 흥청거렸다. 커피에 달걀을 타주는 이른바 ‘모닝커피’가 유행했고, 술집과 여관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중앙호텔 앞에 ‘홍콩 비어홀’이 들어섰고, 옥교동 미나리카바레 인근에 ‘미광 통술집’이 문을 열었을 무렵이었다. 울산에서 가장 깊은 의미가 새겨진 공간이라면 단연 ‘공업탑’이다. 공업탑은 울산이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된 걸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공업지구 지정은 울산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꿨다. 공업탑은 국가 경제를 어깨에 메고 걸어갔던 울산의 자부심을 상징한다.

공업탑은 모던 록밴드 ‘브로콜리 너마저’의 노래 ‘공업탑’에도 등장한다. 읊조리는 듯한 가사와 나른한 목소리의 노래는, 도시의 성취나 자부심과는 전혀 상관없이 공업탑을 그저 ‘쳇바퀴 돌 듯하는 연인과의 관계’로 은유할 따름이다. 노래가 드러내는 건 도시의 공간을 기억하는 세대 간의 차이다. 울산을 여행하다 보면 문득문득 그 간극을 들여다볼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가며 도시를 여행하는 재미가 이런 데 있다.

■ 우리는 ‘좋은 여행’을 하고 있을까.

끝이 보이지 않았던 팬데믹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당연한 듯 누렸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지를 알게 됐다. 그렇다면 다시 여행이 시작됐을 때, 여행의 방식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한 해 동안 물리적인 속도를 늦추고, 마음의 속도도 늦추고, 무심히 지나쳤던 곳을 찬찬히 다시 보는 여행을 줄곧 얘기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