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우리말에 서식하는 황소개구리
태백산 낙엽송(落葉松)이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밉보였나 보다. 50만 그루를 싹 베어내려는 이유는 일본산. "이미 우리 땅에 자리 잡았는데" "다른 외래종(種)은 그럼" "그러다 환경 망가질라"…. 시끄러워지자 일단 접어놓은 이 일에서 언어 생태계(生態系) 문제가 떠오른다. 요즘은 일본산 못지않게 영어 때문에 어지럽다.
'전국에 폭염특보가 내린 11일 오후. 땡볕 아래 40여 명이 강원 고성 대진항에서 화진포를 향해 걷고 있었다. 2016 만해로드 대장정에 참여한 대학생 26명과 동국대 만해연구소 연구원들이다.'
잘 닦은 '길' 버리고 '로드'를 따라간 것부터 꺼림하다. 게다가 하필 독립운동가 한용운 선생을 기리는 행사에서. 만해와 연(緣)이 닿은 지자체들이 마련하고 이름 붙인 모양인데, '만해길' 하면 어딘가 '없어' 보였을까?
아닌 게 아니라 '있어' 보이려 했음 직한 말이 수두룩하다.
'여러 시인의 좋은 시를 가려 묶는 컴필레이션 시집이 다시 증가하는 추세다.'
'이 제품의 특징은 저렴한 가격과 트렌디한 디자인이다.'
'수학도 스토리텔링식으로 바뀌면서 한글을 모르면 수학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다
.''저를 계파라는 프레임에 가두지 말아 달라.'
'독일이 갖춘 국가 경쟁력이 여러 분야에서 우리나라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모음(또는 선집·選集), 최신 유행, 이야기, 틀, 본보기라고 하면 쉽고 편할 텐데. 외려 의식(意識) '없어' 보인다면, 모국어에 집착하는 교열쟁이의 착각인가. '버스, 컴퓨터, 아웃, 서비스, 에너지, 샐러드' 따위를 베어내자는 게 아니다. 진작 토착(土着)한 낙엽송 같은 말 아닌가.
이런 외래어 말고, 언중(言衆)한테까지 번진 생태계 교란어(攪亂語)는 늘어놓기도 버겁다. '힐링, 펀더멘털, 리스크, 글로벌, 레시피, 미스매치, 헬스케어, 터닝포인트, 테라피, 콜라보….' 치유(위안), 기본적, 위험, 세계적, 조리법, 불일치, 건강관리, 전환점, 치료법, 합작이 무슨 잘못을 했기에 목숨을 내놓으라 하는지. 테라피(→세러피), 콜라보(→컬래버레이션)는 하다못해 표기법에도 어긋난다.
황소개구리나 가시박처럼 환경부가 고시한 '생태계 교란 생물'이래야 고작 스무 가지다. 대중 매체부터 조심해야 한다. 우리말에도 황소개구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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