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금빛 숲과 옥빛 물, 석탄 나르던 길이 열렸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10. 28. 15:08

금빛 숲과 옥빛 물, 석탄 나르던 길이 열렸다

중앙일보

입력 2022.10.28 00:02

운탄고도1330 6길의 하이라이트 구간인 태백 지지리골의 자작나무 숲. 옛날 함태광산이 있던 자리에 자작나무를 심어 거대한 숲을 일궜다. 운탄고도가 옛 폐광지역을 잇는 장거리 트레일이다 보니 평범해 보이는 숲에도 각별한 사연이 숨어 있다.

강원도 깊은 산속에 ‘운탄고도’라는 이름의 길이 있다. 해발 1000m 언저리의 산속에 낸 비포장 산길이지만, 탄광 시절 대형 트럭이 달렸던 길이어서 넓고 평탄하다. 지난 1일 강원도가 그 운탄고도를 폐광지역 4개 시·군을 잇는 산악 트레일로 조성해 ‘운탄고도1330’이란 이름으로 개통했다. 영월에서 시작해 정선, 태백을 지나 삼척까지 이어지는 9개 길(코스) 174㎞ 길이의 장거리 트레일이다. 이름에서 ‘1330’은 길이 지나는 최고 높이다. 운탄고도1330의 5길 종점 만항재의 해발고도가 1330m다. 강원도관광재단이 운탄고도 중에서 이맘때 걷기 좋은 세 개 구간을 추천했다. 첩첩산중에 숨은 비밀 같은 길에서 가을을 만끽하고 왔다.

구름 속 마을

운탄고도를 걷다 보면 옥빛 계곡을 만나게 된다. 옛 석회석 광산에서 물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강원도관광재단이 추천한 첫 코스는 영월 모운동마을이다. 최근 TV 프로그램 ‘운탄고도 마을호텔’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옛 탄광촌이다. 운탄고도1330의 2길과 3길이 이 마을에서 만났다가 헤어진다.

모운동마을은 산속에 숨은 마을이다. 만경산(1088m) 중턱 해발 550∼750m에 자리해 산 아래에서는 마을이 안 보인다. 구름이 모이는 마을이란 뜻의 모운동(募雲洞)도 마을 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옥동광산이 잘나가던 시절, 이 구름 속 마을에 1만 명이 넘게 살았단다. 그 시절엔 학교·병원은 물론이고, 극장도 있었단다. 지금은 마을에 31가구 47명이 산다.

영월 모운동마을은 이장 부부가 이끌고 있다. 김은미 이장과 동갑내기 남편인 문현진 옥동교회 목사.

모운동마을을 이끄는 부부가 있다. 옥동교회 문현진(49) 목사와 동갑내기 아내 김은미 이장. 이들 부부가 앞장서 낡은 벽화를 새로 그리고, 마을 화단을 조성했다. 마을을 찾은 손님을 위해 부부가 밥도 하고 커피도 내린다. 아쉬운 건, TV 프로그램과 달리 마을회관에서 잠을 잘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현진 목사는 “영월군청이 허가를 안 내줘 산골 마을까지 찾아오는 손님을 돌려보내고 있다”며 아쉬워했다.

영월 만봉사 암자 오르는 길.

마을 주변 운탄고도를 걷다 보면 탄광 시절의 흔적이 하나둘 나타난다. 광부가 사용했던 목욕탕 건물, 입구에서 붉은 물 흘러나오는 광산 갱도도 남아있다. 싸리재 넘어 만봉사 암자까지 올랐다가 내려오면 얼추 8㎞ 거리다. 만봉사 암자 오르는 숲길에 가을 정취가 그윽했다.

황금빛 자작나무 숲

단풍 물든 태백 지지리골운탄고도.

태백 지지리골 자작나무 숲에서 이번 가을 최고의 장면과 조우했다. 약 4㎞ 길이의 숲길과 옛 운탄도로를 걸었는데, 깜짝 놀랄 만한 장관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취재에 동행한 강원도관광재단 강옥희 대표도 “지지리골은 강원도의 어느 가을 명소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했다.

오투리조트 주변 임도에서 가파른 산길을 약 1.5㎞ 내려가면 자작나무 숲이다. 마침 자작나무 잎이 누렇게 익는 가을이었고, 마침 햇빛 받은 잎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오전이었다. 노란 잎사귀 휘감은 하얀 줄기의 자작나무 수만 그루가 파란 가을 하늘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자작나무 숲에서 한동안 걸음을 떼지 못했다.

ADVERTISEMENT

가팔랐던 산길과 달리 약 20만㎡(6만 평)에 이르는 자작나무 숲은 평지에 가깝다. 바로 이 자리에 옛날 함태광산이 있었다. 자작나무 숲은 함태탄광이 1993년 문을 닫은 뒤 폐탄광 산림 훼손 복구사업으로 조성된 인공림이다. 20여 년 전 심은 자작나무가 이제야 오롯한 숲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면 널찍한 운탄도로가 마을까지 이어지는데, 운탄도로 옆을 흐르는 개천이 에메랄드빛이다. 옛 석회석 광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어서 옥빛을 띤다. 에메랄드빛 물과 노란 자작나무와 빨간 단풍나무와 파란 하늘이 어울린 거짓말 같은 풍광을 뒤로하고 마을로 내려왔다.

미인폭포

인생 사진 명소로 떠오른 삼척 미인폭포. 옥빛 폭포 물이 신비롭다.

운탄고도1330은 10월 1일 정식 개통했으나 지역마다 사정이 다르다. 영월과 정선 지역은 정비가 마무리됐는데, 삼척은 공사가 덜 끝났다. 원래 계획에 있던 코스와 현재 운영되는 코스가 다르다. 그런데도 삼척에 가면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 최근 MZ세대 사이에서 인생 사진 명소로 떠오른 미인폭포다. 폭포를 보려면 직각에 가까운 절벽을 600m쯤 내려갔다가 와야 하는데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삼척시 김성열 시설팀장은 “주말이면 이 절벽 길에서 극심한 병목 현상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미인폭포는 정말 미인처럼 생겼다. 약 50m 높이의 폭포로, 목이 긴 여인이 초록 저고리와 폭넓은 붉은 치마를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폭포 아래에 고인 물도 옥빛이어서 신비감을 더한다. 옥빛 물은 폭포 아래 심포협곡(또는 통리협곡)을 따라 흘러내린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심포협곡이 끝나는 자리에 하이원 추추파크가 있다. 옛 심포리역 터에 세운 기차 테마파크다. 심포리역은 10년 전 운행을 중단한 스위치백 구간에 있던 폐역이다. 옛날에는 기차가 통리역에서 도계역을 운행할 때 전진과 후진을 병행하며 산을 넘었다. 그 역주행 구간을 스위치백이라 한다. 지금은 기차가 나선형 터널을 통과한다. 운탄고도1330은 원래 미인폭포 아래 심포협곡을 따라 이어지지만, 내년 말에야 공사가 마무리될 예정이다. 지금은 통리에서 하이원 추추파크까지 도로를 따라 내려가야 한다.

영월·태백·삼척=글·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