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관람객 호도하는 국립현대미술관
국립미술관은 단순히 그림 걸어두는 데가 아니다. 이곳의 모든 전시는 한국 미술계의 본보기가 되고 사료(史料)로 남는다. 그 이름의 무게 탓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최근 무리한 전시 구성으로 자꾸 논란에 휩싸이는 건 이를 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이중섭’이 서울관에서 개막했다. 이중섭 그림 9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로, 은지화·엽서화 등 기존의 분류 외에 ‘출판미술’ 섹션을 따로 마련했다. “이중섭은 작품 활동과 함께 잡지의 표지나 삽화 같은 출판미술을 제작하기도 했다”는 짧은 설명문과 함께 벽면에 현대문학·자유문학 등 1950~1960년대 잡지 16권(표지)을 부착한 것이다.
진열은 그럴싸하지만, 16개의 표지화(畵) 중 이중섭 그림은 4개뿐이다. 김영주·류경채·황염수 등 다른 화가, 심지어 앙리 마티스 같은 외국 작가의 그림도 뒤죽박죽 섞여 있다. 별도 설명이 없어 일반 관람객은 16개 표지화 전부를 이중섭 그림으로 오해할 소지가 크다. 지적이 잇따르자 미술관은 부랴부랴 사태 파악에 나섰다. 관계자는 “해당 잡지 안쪽에 이중섭의 삽화가 수록돼 있다는 의미”라며 “비치된 태블릿PC를 통해 잡지 내부 그림을 볼 수 있다”고 해명했다. 표지만 보이도록 벽에 붙여놓고는 사실 표지를 보여주려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16일 “지적을 받아들여 오늘 별도의 안내판을 설치했다”고 했다.
과천관에서 6월부터 열리고 있는 채색화 전시 ‘생의 찬미’는 더 심각하다. 색을 활용한 모든 한국 전통 회화를 ‘채색화’로 규정한 뒤, 이를 조선 후기에야 등장하는 ‘민화’(民畵) 개념과 지속적으로 혼동하는 설명 때문이다. 전시장 내에는 “우리나라의 전통 채색화를 ‘민화’라고도 한다”는 내용의 교육 자료(리플렛)까지 비치해놨다. 민화는 19세기 확산돼 민초와 일부 양반이 인테리어용으로 쓰던 그림이지만, 미술관 설명대로라면 고구려 고분벽화부터 왕실의 궁중 장식화까지 모두 민화가 되는 황당한 상황이 펼쳐진다. 미술사(史) 왜곡이라는 비판이 빗발친 이유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지낸 정준모 평론가는 “국립미술관이 한국 미술 족보를 망쳐놨다”고 말했다. 의도적인 민화 격상, 전시 목적을 둘러싼 윤범모 관장과 주변인에 대한 설왕설래도 끊이지 않는다. 결국 지난 5일 미술관은 교육 자료를 폐기하고 “채색화와 민화를 동일시한 오류가 있던 점 사과드린다”는 입장문을 냈다. 그러나 비판이 제기되면 슬그머니 임시방편으로 대처할 뿐 문제는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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