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편지] 고려 임난수 장군이 지킨 충절의 상징으로 살아남은 나무 한 쌍
국립수목원이 있는 세종에 다녀왔습니다. 선입견일까요, 세종에서는 새로 단장한 새 도시만의 세련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정돈된 분위기가 때로는 알 수 없는 답답함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곳이 사람이 많이 사는 행정 중심 도시라는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습니다. 세종수목원 옆으로 곧게 뚫린 도로를 지날 때면 오래 전, 연기군 양화리이던 시절에 찾아오던 때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가을에 유난히 아름다운 은행나무 두 그루가 반기는 곳이었지요.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처음 찾아본 뒤로 이십 년도 더 넘게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연기군은 세종시로 바뀌었고, 나무가 있는 양화리는 ‘세종시 연기면 세종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 사실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처음 보았던 이십년 전, 그때부터 주변 풍광과 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우리나라의 여느 은행나무에 비해서는 규모가 좀 작은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연기념물보다는 충청남도 기념물, 즉 ‘지방기념물’ 정도의 지위가 딱 적당하다고 여겼지요.
그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세종 임난수 은행나무〉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에 지정 완료됐습니다. 천연기념물 지정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나무에 담긴 사람살이의 무늬가 가지는 가치를 높이 인정한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고려 때 활동한 임난수(林蘭秀, 1342~1407) 장군에 얽힌 이야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나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고려말 탐라 정벌에 공을 세우고 공조전서를 지낸 임난수 장군이 심은 나무로 전합니다. 이성계가 조선 건국에 성공하자, 망국의 장수였던 임 장군은 고려 멸망의 한을 품고 낙향해 고려의 임금을 그리워하며 나무를 심고, 이 마을에 은거했습니다. 그 뒤에 이성계가 여러 차례에 걸쳐 임 장군을 다시 불러냈지만,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조선의 조정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은행나무는 고려에 대한 장군의 충절과 신표의 상징인 겁니다.
나무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1674년 간행된 《부안임씨세보扶安林氏世譜》, 1859년 간행된 충청도 공주목 《공산지公山誌》, 1934년 간행된 《연기지燕岐誌》, 1962년 간행된 증보부안임씨세덕록增補扶安林氏世德錄》 들이 그것들입니다. 이들 기록에는 은행나무와 관련한 앞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명확히 기록해두었고, 그의 후손인 부안임씨 종중에서 선조가 지킨 충절의 상징으로 소중히 보호했다는 이야기가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나무의 그림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나무 앞에는 임난수 장군의 사우가 세워져 있는데, 이 사우와 함께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빚어내는 풍경은 가히 장관이랄 수 있습니다. 부인임씨 가문에서는 지금도 나무 앞에서 은행나무 목신제를 지내며 조상의 음덕을 기리고 있습니다.
임난수 장군이 심은 나무이니, 대략 육백 년은 훨씬 넘은 나무입니다. 이 오래 된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암수 한쌍이라는 것도 주목할 만한 요인입니다. 두 그루 가운데 동쪽의 나무가 수나무이고, 서쪽의 나무가 암나무입니다. 기록을 좀더 찾아보았는데요. 은행나무 두 그루가 마주보고 서 있는 경우는 가끔 찾을 수 있지만 그것도 그리 흔한 게 아닙니다. 게다가 같은 규모, 같은 나이의 은행나무가 암수 한 쌍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정말 흔치 않은 경우라고 할 수 있겠더군요. 은행나무는 어릴 때에 암수를 감별하기가 쉽지 않아서 아마도 처음에 나무를 심을 때부터 암수를 감별하여 심은 건 아닐 겁니다. 우연히 벌어진 일이겠지만, 결과적으로 흔치 않은 경우가 된 겁니다.
동쪽의 수나무는 삼 미터쯤 높이까지 몸통줄기가 곧게 솟아오른 뒤에 나뉜줄기 하나가 남쪽으로 뻗으며 나뭇가지를 고르게 펼쳤습니다. 몸통줄기가 살짝 남쪽으로 기울기는 했지만, 워낙 나뭇가지 펼침폭이 무성하고 넓게 퍼져 몸통줄기의 기울기는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오래 된 여느 은행나무들처럼 매우 아름다운 수형을 갖추었습니다. 남쪽으로 뻗은 나뉜줄기가 수평으로 넓게 펼쳐셔 제 무게를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어서 철제 지지대를 세 곳에 설치해 보호하는 데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습니다. 줄기 곳곳에 썩어 형성된 공동이 적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또 곳곳에 부러지고 찢겨나간 줄기와 가지의 흔적이 있지만 여전히 장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특히 꿈틀거리며 솟아오른 줄기의 모습은 인상적입니다.
곧은 줄기가 둘로 나뉜 서쪽의 암나무는 동쪽의 수나무와 달리 비교적 단아한 수형을 갖췄습니다. 둘로 나뉜 줄기들은 간격을 벌이지 않고 수직 방향으로 거의 평행을 이루면서 솟아올랐습니다. 그 바람에 수나무에 비해서는 몸통이 왜소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수직으로 뻗어오른 나무 줄기의 강건함은 나름대로의 위엄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찌 보면 두 그루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는 듯합니다. 암나무에서도 역시 곳곳에 외과수술 흔적이 드러납니다. 뿌리에서부터 줄기의 전 부분에 외과수술 흔적이 도드라집니다. 특히 둘로 나뉜 서쪽의 줄기에서는 매우 큰 외과수술 부위가 드러나 안타깝습니다. 이 부분은 아마도 오래 전에 굵은 가지가 찢겨나간 것으로 짐작됩니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모두 줄기의 상당 부분이 훼손돼 수피의 절반 정도는 외과수술로 덮여 있는데, 대부분은 오래 전에 훼손된 것입니다. 물론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는 나무로서도 세월 흐르며 곳곳에 상처를 간직하게 마련이지요. 〈세종 임난수 은행나무〉가 붙안고 있는 상처들은 대개 큰 바람에 의해 부러지거나 찢겨나간 굵은 가지의 흔적으로 보입니다. 큰 상처를 여럿 지니고 있으면서도 후손들의 각별한 보호로 현재의 생육 상태는 건강한 편입니다.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나라에 큰 변이 생길 때마다 큰 울음을 울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특히 1910년 한일합방 때와 1950년 한국전쟁 때 그랬다는 거죠. 또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일본인들이 이 나무를 베려고 하였으나 나무에서 통곡 소리가 울려나오는 통에 베어내지 못하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하는 신령스러운 나무입니다.
〈세종 임난수 은행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세종특별자치시의 중심권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은행나무 바로 앞으로는 금강 지천인 내삼천이 흐르고 내삼천 맞은편으로 건설된 도로는 ‘절재로’라고 불립니다. 절재로는 조선전기에 활약한 김종서(金宗瑞, 1383~1453)의 호인 절재(節齋)에서 빌려온 도로 이름으로, 이 지역 출신인 김종서의 묘지와 사당이 있는 이 지역의 역사테마공원 조성과 물리면서 이름 지어진 것입니다. 2020년 7월에 문을 연 도시형 수목원인 세종수목원이 바로 이 도로 건너편에 있습니다.
지금 나무 주변은 한창 공사 중입니다. 이 공사에는 나무 주변을 역사테마공원으로 조성하는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도시화 과정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예전의 아늑한 풍경은 가뭇없이 사라졌지만, 나무를 천연기념물 지정을 계기로 잊어진 옛 사람살이의 향기를 되살릴 좋은 기회 되기를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덧붙임] 오늘의 사진은 지난 해 칠월의 상황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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