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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한강 풍광을 즐긴 임금의 동산에서 큰물을 피한 사람들의 나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5. 31. 10:31

[나무편지] 한강 풍광을 즐긴 임금의 동산에서 큰물을 피한 사람들의 나무

  아침 저녁으로 오가는 길가에 쥐똥나무 꽃 향기가 가득 들어찼습니다. 굳이 멈춰서지 않아도 자잘하게 피어있는 작은 꽃차례 가까이로 코를 가까이 들이밀지 않아도 그 향기는 가슴 깊은 곳까지 스밉니다. 매일 오가는 길이지만, 한해 중에 지금처럼 쥐똥나무 꽃 향기 가득할 때는 그저 행복합니다. 낮은키의 쥐똥나무 위로는 덩굴장미가 하늘 향해 붉은 초여름 노래를 피워올렸습니다. 장미 꽃이 처음 피어난 건 벌써 한 달쯤 지난 듯한데, 여전히 붉은 꽃 싱그럽습니다. 쥐똥나무와 장미 꽃이 만발한 우리집 앞 길입니다.

  장미 쥐똥나무 뿐 아니라, 돌아보면 도심에도 큰 나무는 곳곳에 있습니다. 사람살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그렇습니다. 매우 번잡한 도심,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시월 초하루에 마을 굿을 올립니다. ‘부군당굿’이라는 이름의 제사이지요. 당산역 부근의 아파트 단지 곁에는 부군당굿을 올리는 당집인 ‘당산동 부군당’이 있습니다. 이 부군당은 1450년에 지은 것으로, 조선시대부터 이 마을에서 마을 굿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이 마을에는 단산單山이라 불리는 동산이 있었고, 그 동산 위에 마을굿을 올리는 당집이 있어서 지금의 당산동堂山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합니다. 이 동산을 중심으로 웃당산 원당산 벌당산이라고 부르던 세 마을을 합쳐서 당산리라고 불렀다고 전합니다.

  당산동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또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조선 영조 때에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이 마을애 해당화가 많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지금은 한 그루도 찾아볼 수 없지만, 예전에 해당화가 많이 피어나던 시절에 해당화를 듯하는 ‘당棠’자를 써서 ‘당산棠山’이라고 부르던 것이 지금의 당산동이 됐다는 짐작입니다. 정확한 건 모르겠습니다만 ‘해당화 피던 마을’이라고 생각하니, 마을로 들어서는 마음이 자못 상큼해집니다. 지금은 온통 고층 아파트 빌딩 숲이 들어차 있고, 그 사이를 지나는 도로 또한 번거롭기만 한 전형적인 서울 도심입니다. 이 마을 가운데 예전에 ‘웃당산’이라 부르던 마을에 육백 년 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1968년에 산림청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서울 당산동 은행나무〉입니다. 보호수 지정 때에 나무나이를 오백팔십 년으로 측정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육백 년은 넘은 셈입니다. 나무의 높이는 이십일 미터나 되는 큰 나무인데, 작은 동산 꼭대기에 홀로 우뚝 서 있기에 동산 아래에서 바라다보는 나무는 실제보다 훨씬 커 보입니다. 이 나무가 바로 ‘당산동 부군당굿’의 중심이 되는 신목神木입니다. 주변이 고층아파트로 둘러싸인 탓에 나무의 존재감이 미약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무는 결코 주눅들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부군당굿을 지낼 때의 모든 축원은 바로 이 나무에서 올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 나무를 특별히 신목으로 모시게 된 데에는 두 가지의 특별한 유래가 있습니다. 우선 이 나무를 처음 이 곳에 심을 때인 육백 년쯤 전의 일입니다. 조선 전기가 될 그 무렵에 임금이 한강으로 나들이 나왔다가 한강 풍경이 훤히 내다보이는 이 자리에 들러서 한참 쉬다 갔다고 합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임금이 즐거이 쉬어간 자리임을 표시하기 위해서 이 은행나무를 심고, 마을 당산으로 삼고 마을굿을 올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오래도록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1925년 대홍수’ 때의 일로 전해옵니다. 그때 쏟아지는 홍수비에 살림집들이 죄다 물에 잠기고 사람들조차 불어나는 강물에 떠내려갈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큰물에 대한 대책을 과학적 체계적으로 갖추었다는 현대에도 갑작스러운 홍수라면 어쩔 수 없이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거늘 그때에는 오죽했겠습니다. 유일한 대책이라면 불어난 물을 피할 수 있는 높은 곳으로 피신해 목숨만이라도 건지는 것이었겠지요. 그때 사람들의 눈에 띈 곳이 바로 이 은행나무가 서 있는 동산이었고, 서둘러 이 동산, 임금이 풍광을 즐기던 동산에 모여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서울 당산동 은행나무〉가 서 있는 작은 동산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곳입니다. 지금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 자리만 오똑하니 남아있고, 주변에는 온통 고층아파트가 이 동산보다 훨씬 높게 솟아올랐지만 고층 건물들만 아니라면 한강이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였음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이 동산 자리를 중심으로 지대가 완만하게 높다는 것도 실제로 찾아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임금이 쉬어간 동산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나무이기도 하고, 홍수로부터 사람살이를 지켜낸 동산의 나무이기도 한 이 나무가 마을의 신목神木으로 오래 지켜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사실 나무의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세월의 풍진 탓이겠지요. 앞에서 나무 높이를 이야기하면서 곧바로 덧붙여야 할 나무줄기의 굵기를 적지 못한 것도 나무 줄기의 상태가 측량을 불가능하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산림청 보호수 기록에는 가슴높이 줄기둘레를 5.45미터라고 했습니다만, 이건 처음 보호수로 지정할 때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지금은 이 나무의 줄기 상당 부분이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줄기 아랫부분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진 부분이 성한 부분보다 훨씬 크고 넓어서 사람 가슴높이께에서 측정한 줄기둘레는 사실상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썩어 텅 빈 자리는 정성스레 외과수술로 메웠지만, 이 상태로 줄기 둘레를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긴 세월을 살아온 나무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줄기 위쪽으로 올라가면서도 곳곳에 외과수술 흔적이 드러납니다. 굵은 줄기는 물론이고, 여러 개의 가지가 오래 전에 부러졌거나 썩고 찢겨졌습니다. 안타까울 수밖에요. 그나마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 주변의 넉넉한 공간에 울타리를 치고 한쪽으로 기운 굵은 가지를 지탱하기 위해 버팀쇠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한때 매우 우람한 크기로 좌중을 압도했을 〈서울 당산동 은행나무〉는 결국 이제 아담한 크기로 남아 여느 육백 년 된 은행나무에 비해 왜소해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 앞에 머무르며 나무가 살아온 모진 세월의 깊이를 가만히 짚어보는 동안 뜻밖에도 두 분의 노파가 나무를 찾아왔습니다. 나무 앞에 세운 보호수 안내판을 보며 나누는 그들의 이야기로 짐작건대 마을 사람들은 아닌 듯했습니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사람살이를 지키며 살아온 나무 한 그루의 큰 역사 앞에 서 있는 두 노파의 뒷모습이 나뭇결에 남은 나무살이의 역사만큼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