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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나무편지] 꽃 없어도 좋지만 그래도 꽃을 기다리게 되는 여름의 절집 나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6. 28. 11:39

[나무편지] 꽃 없어도 좋지만 그래도 꽃을 기다리게 되는 여름의 절집 나무

  조금 이르지 싶긴 해도 배롱나무가 붉은 꽃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장마 시작되면서 비가 세차게 내리고, 주말엔 삼십도 넘는 무더위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겠지요. 우리의 여름을 붉고 화려하게 수놓는 아름다운 꽃, 배롱나무 꽃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순서입니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곳곳에서 자라는 배롱나무들이 살살 꽃망울을 올리고 여름 채비를 마쳤으리라 짐작됩니다. 오래 전에는 따뜻한 남쪽에서만 자라던 나무이지만, 최근의 기후에는 중부지방에서도 너끈히 심어 키우게 된 나무입니다.

  경상북도 구미시의 연악산(淵岳山) 자락에 자리잡은 천년고찰 수다사(水多寺) 마당 가장자리에 서 있는 배롱나무가 떠오른 건, 며칠 전 삼천포에서 구미가 고향인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온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구미 연악산 수다사는 여러 차례 다녀온 절집입니다만, 오늘 《나무편지》에서 보여드리는 배롱나무가 빨간 꽃을 피운 광경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배롱나무 꽃이 떨어진 초가을이나 거꾸로 꽃 피어나기 전인 초여름에 다녀오곤 했습니다.

  오늘의 사진은 아직 꽃 피어나기 전에 찾아보았던 지난 해 이맘 때의 사진입니다. 구미 연악산 수다사에서 지금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전각은 대부분 새로 복원한 건축물입니다. 그래서 신라 때에 창건한 고찰임에도 불구하고 고졸한 느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수해(水害)와 화재(火災)에 의한 훼손이었습니다. 그래도 절집에 이르는 고즈넉한 산길과 절집 주변의 크고 싱그러운 나무들 때문에 싱그러운 산사의 느낌을 갖추고 있을 뿐입니다. 가벼운 여행으로는 더 없이 좋은 곳 아닌가 싶습니다.

  구미 연악산 수다사는 신라 문성왕 때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연악산 봉우리인 미봉(彌峯)에 신비롭게 피어난 한 송이의 백련(白蓮)을 보고 지은 절이라고 전합니다. 처음에 진감국사는 절집 이름을 연화사(淵華寺)라고 짓고 불사를 이뤄갔지요. 그런데 초기부터 수다사는 화재에 의한 피해를 많이 보게 됐어요. 특히 고려 광종 18년인 서기 967년에는 매우 큰 화재가 절집을 덮치는 바람에 거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타 스러지며 사세가 기울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백 년쯤 뒤인 1185년(명종 15)에 화재로부터 살아 남은 극락전과 청천료를 옮겨 세우고, 금강문과 비로전 나한전 미륵전 등을 새로 짓는 등 중창불사를 일으킨 뒤 절집 이름도 성암사(聖巖寺)로 바꾸었습니다. 겨우 절집의 기운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다시 또 백 년쯤 흐른 1273년(원종 14)에는 물난리가 절집을 덮쳤습니다. 이때에도 절집의 전각들은 거의 무너앉았습니다. 백 년 전에 옮겨 세운 극락전과 청천료, 그리고 시왕전만 남고 모두 물에 떠내려갔다는 겁니다.

  물과 불의 피해로 사세(寺勢)가 기울어가던 절집을 다시 일으킨 건 사명대사였습니다. 조선 선조 5년인 1572년에 사명대사가 무너앉은 절집을 찾아온 겁니다. 그는 극락전을 ‘대웅전’으로 ‘청천료’는 극락당으로 고쳐 지었습니다. 또 스물네 칸짜리 만세루(萬歲樓)를 새로 지으며, 절집을 부흥시키려 애를 썼습니다. ‘물 많은 절집’이라는 뜻의 ‘수다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 바로 이 즈음입니다. 하지만 수다사의 시련은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또 백 여 년이 지난 1704년에 절집에 큰 화마가 들이닥쳐 몇 채의 전각을 빼고 모두가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적지 않은 규모의 고찰이었던 수다사는 결국 지금처럼 아담하고 아늑한 절집으로 남게 된 겁니다.

  물 많은 절집임을 알리듯 개울 건너 닿게 되는 수다사에 이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나무가 절집으로 오르는 계단참에서 하늘로 높이 솟아오른 은행나무 두 그루입니다. 하늘을 항해 팔을 뻗어 올린 채, 운수납자를 반기는 큰 키의 은행나무 그늘의 계단을 걸어오르면 절집은 전각들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바로 배롱나무입니다. 2010년에 보호수 10-05-02호로 지정한 〈구미 수다사 배롱나무〉는 키가 8미터 쯤 됩니다. 보호수로 지정한 배롱나무 가운데에 그리 큰 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의 배롱나무 전체를 돌아보면 결코 작은 나무가 아닙니다.

  게다가 〈구미 수다사 배롱나무〉는 사방으로 넓게 퍼진 가지가 균형을 이루며 배롱나무의 전형적인 수형을 했으며, 넓게 펼친 나뭇가지 아래 쪽으로 드러난 매끈하면서도 알록달록한 무늬의 줄기 부분 또한 매우 아름답습니다. 삼백 년쯤 된 것으로 여겨지는 나무는 생육 상태도 무척 건강해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몸과 마음이 싱그러워집니다. 굳이 꽃이 피지 않았어도 한참을 바라보게 할 만큼 좋습니다. 꽃 없어도 아름다운 〈구미 수다사 배롱나무〉가 이제 서서히 꽃을 피우며 아담한 규모의 천년고찰 수다사 풍광의 백미를 보여줄 때입니다.

  주초에 중부지방은 잠깐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다시 주중에 큰 비가 쏟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비가 많이 내려야 하긴 하겠지만, 제발 한꺼번에 너무 많이 내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게 한 주일 평안히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유월 이십칠일 아침에 …… 솔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