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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어떤 시] [17] 기억하는가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4. 26. 10:04

[최영미의 어떤 시] [17] 기억하는가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1.04.26 00:00 | 수정 2021.04.26 00:00

 

 

기억하는가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 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최승자 (崔勝子 1952∼)

가장 아름다운 사랑 노래는 처참하게 부서진 가슴에서 나온다. “환희처럼 슬픔처럼”이라고 최승자 시인이 썼듯이 사랑의 환희 속에 이별의 예감 혹은 두려움이 1g은 들어있지 않나?

최승자의 어떤 시는 내게 충격이었다.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개 같은 가을’)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일찌기 나는’) 여자 냄새가 나지 않는, 여성스러움을 거부하는 언어들에 나는 중독되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아름다운 추천사를 주신 최승자 선생님에게 인사드리며 전투적인 시어와 어울리지 않게 여린 목소리에 놀라, 하얀 꽃다발을 떨어뜨릴 뻔했다. 하얀색이라니, 내 상식이 부족했다. 실수를 깨닫고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선생은 흰색이 당신의 사주와 어울린다는 말로 안심시켰다.

너그럽고 사심이 없는 분이었는데, 오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아프셨다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기사를 읽고 기뻤다. 시인이여. 밥 잘 챙겨 드시고 아기처럼 편히 주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