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역 터널 벗어나자 ‘빛의 나라’… 오, 한강이었다
[당신의 리스트] [1] 서현 - 지하철에서 만나는 최고의 풍경 5
서현 서울대 교수·건축가
입력 2021.01.05 03:00
서울 지하철 7호선, 청담역을 출발해 긴 터널을 지나온 열차가 복층 교량 청담대교를 타고 한강에 돌입하고 있다. 이 순간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드넓은 한강. 어두운 굴 속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쯤 별안간 허공에 떠 가는 기분을 맛보게 되는 초현실적 공간 체험이다.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신년 기획 ‘당신의 리스트’를 시작합니다. 문화는 선별과 여과의 오랜 역사. 클릭 한 번이면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리스트를 제출하느냐는 것. 조선일보가 신뢰하는 전문가들이 자신만의 리스트를 제출합니다. 1회는 서울대 건축학과 서현 교수의 ‘지하철에서 만나는 최고의 풍경 5’.
[7호선 청담역 지나 한강으로]
지하서 허공으로 연결되는 열차… 세계에 유례 드문 극적 공간 변화
서현 서울대 교수·건축가
긴 터널을 벗어나자 눈나라, 아차, 아니고 한강이다. 열차의 밑바닥이 물로 가득해지는 순간이다. 7호선 청담역을 떠난 열차는 뚝섬유원지역을 향해 질주하는 중이다. 완만하고 지루한 오르막길 터널을 지나던 열차가 갑자기 빛 속으로 솟아오른다. 뻥 터지듯, 툭 내쳐지듯, 확 달려들 듯. 그때 펼쳐지는 것이 한강이다. 아니 허공이다, 아니 초현실의 공간 이동이다. 암굴벽해(暗窟碧海). 전 세계의 지하철 노선 중 이런 극적 공간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강이 아무 데나 있더냐.
열차의 오른쪽 창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건너편 철로를 거치지 않고 더 생생한 한강을 대면할 수 있다. 한강 너머 펼쳐지는 도시 풍경 또한 초현실적이다. 옹기종기 아파트 군락 위로 123층 건물이 생경하게 우뚝하다. 당장 열차에서 뛰어내려 절대반지를 구하러 달려가야 할 듯하다. 지하철 가득 비루한 호빗족들의 일상을 변태 껍데기로 남겨두고. 1250원 찍히는 교통카드로 체험할 수 있는 초현실적 공간 변화. 그게 서울의 지하철이다.
지하철은 도시 전경 사진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도시의 광장이고 얼굴이다. 그리고 도시 일상의 테마파크다. 세상 구경 중에서 참 구경이 사람 구경이라고 했다. 과연 지하철에는 생로병사, 길흉화복의 인생만사를 얼굴에 붙인 군상이 빼곡하다. 나도 나의 하루 운세를 얼굴에 붙이고 그 무리에 밀려 들어간다.
[4호선 남태령, 지하의 롤러코스터]
어둠 속 청룡열차처럼 꼬인 선로… 지하철은 도시 일상의 테마파크
테마파크의 필수 구비 요소는 궤도가 꼬이는 열차다. 옛날에는 청룡열차라고 통칭했다. 이게 없으면 테마파크라 부르기도 어렵다. 놀랍게 우리의 지하철에도 테마파크답게 마땅히 구비되어 있다. 도시의 기능적 구조물이 이런 장치를 장착했다면 그 연유가 기구할 것이다. 이곳은 단절된 현대사의 매듭이 공간으로 체현되어 묶인 곳이다. 뭐가 그리 기구하기에.
지하철에서 만난 극적 풍경들. 4호선 남태령 구간에서 열차 통행 방향과 함께 전류 공급 방식이 변경되는 순간 일부 조명이 꺼지고 어두워진 객실. /양수열·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남쪽으로 사당역까지만 연결되었을 때 4호선은 평범한 지하철이었다. 그런데 더 남쪽으로 연장하면서 좀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연결해야 할 노선은 코레일 구간이었는데 그 코레일은 이전 철도청이었고 이를 더 더듬어 오르면 일제강점기를 만난다. 그래서 그들은 좌측통행. 그런데 독립국가 대한민국의 지하철 4호선은 우측통행.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결국 대한민국 여기저기 뿌리 내린 일제강점기의 질곡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통행 방향이 다른 두 노선 연결로 가장 손쉬운 방법은 환승이었겠다. 역에서 내려서 갈아타면 된다. 그런데 우리의 위대한 엔지니어들은 상상하기 좀 어려운 방식으로 이를 돌파해버렸다. 어찌 보면 무모하다 할 방안이었다. 남태령과 선바위역 사이의 동굴 속에서 선로의 좌우를 뒤집었다.
전류공급 방식 변경으로 객실 안 일부 전등이 소등되겠다며 안내방송은 담담하다. 하지만 조금 전 왼쪽을 달리던 반대 방향 노선이 문득 오른쪽으로 옮겨와 있는 것은 초현실 체험이다. 전 세계의 희귀 사례일 것이다. 이런 역사를 장착한 도시가 희귀하므로. 분식점 표현으로는 꽈배기, 기하학 표현으로 뫼비우스의 띠가 현실의 공간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건 철마교호(鐵馬交互).
[2호선 대림, 도시를 부유하는 순간]
도시 한가운데를 쾌속으로 달려… 어떤 권력자도 못 누렸을 호사
그러나 지하철 탑승은 모험이나 여행 아닌 운송에 가깝다. 우리는 승차하고 하차하면 될 뿐이다. 말하자면 발 달린 짐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승객에게 각각 구비된 눈과 귀는 별 존재 의미가 없다. 열차의 창문 역시 그냥 진화에 뒤처진 흔적기관에 지나지 않을 듯하다. 그런데 가끔 우리의 승차가 기꺼이 여행이 되는 구간이 있다. 승객의 눈이 열리고 짐짝에서 생물체로 순간 변화하는 구간이다. 그 생물체의 서식지는 도시다.
방음벽의 방해 없이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2호선 대림역 일대 지상 구간. /양수열·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열차가 지상으로 달리는 곳이니 2호선에서는 두 곳이 있다. 북동쪽의 성수 구간과 남서쪽의 대림 구간이다. 성수 구간은 자연지반 위, 대림구간은 도림천 위의 구간이다. 이 차이가 크다. 성수 구간은 천문학적 예산이 문제지 마땅히 지하화되어야 할 구간이다. 서울이 이리 바뀔 줄 당시의 누가 내다봤으랴. 그런 애물이니 구간 내내 방음벽이 서 있다. 그러나 대림 구간은 방음벽이 없이 도시가 훤히 다 내다보인다. 천변 완충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치로 치면 당연히 대림 구간이다.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구간의 참된 가치는 고가 위를 달린다는 점에 있다. 열차가 허공을 주유한다. 이 높이에서 이 속도로 도시 구간을 질주하는 경험은 이전 세상의 어느 권력자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다. 그래서 이때 시선을 막는 방음벽의 존재 여부가 중요하다.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창 방향은 북쪽이다. 남쪽은 멀리 관악산 전망이 좋지만 햇빛을 마주 봐야 해서 경치가 뿌옇다. 물론 이 구간 풍광이 양쪽 다 두서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고 그런 점에서 항상 더 흥미롭다. 새로운 공사 현장과 새로운 건물과 새로운 간판으로 심심할 틈이 없고 그래서 두서없는 도시. 그 도시 유람을 제공하는 고상주유(高床周遊).
[1호선 한강철교, 눈부신 서울의 노을]
여의도와 노들섬에 지는 석양… 겸재가 살아있다면 그렸을 풍경
지하철 여행자에게 좀더 박진감 있는 풍경을 제공하는 지점은 1호선 한강철교 구간이다. 이 구간은 여의도와 노들섬이라는 두 섬 사이를 지난다. 여의도는 한국에서 가장 비싼 건물들이 빼곡한 인공구조물의 도시다. 이곳은 고층건물 즐비한 도시의 매력을 철교 구조물 너머 가장 박력 있게 보여주는 곳이다. 최근 정비된 노들섬은 한가한 전원 풍경이니 이 또한 초현실적이다.
여의도의 빌딩 숲 너머로 해가 지는 시간, 노을 진 한강철교를 건너가는 1호선 열차. /양수열·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이 다리는 한강대교와 원효대교 사이에 놓여있다. 내 평가로 한강에서 가장 잘생긴 두 다리니 어느 쪽을 보아도 좋다. 간혹 옆 철로로 늘씬한 고속전철이 지나가는 모습 또한 절경이다. 나는 저 고속기계가 기계 괴음을 내며 철교라는 허공 위를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모두 강철이 만들어낸 도시 풍광이다.
이곳이 특히 더 멋진 시간대가 있으니 여의도 건물군 너머 해가 지는 석양의 순간이다. 최고의 공간과 시간과 속도가 다 맞물리는 지점. 우리 시대에 서울팔경을 뽑는다면 이 경치가 빠질 수 없겠다. 지금 겸재가 살았다면 그는 분명 노들섬에 앉아 한강철교와 여의도의 강철낙조(强鐵落照)를 그렸을 것이다.
[신분당선, 어둠 속의 질주]
맨 앞자리서 만끽하는 속도감… 게임으로도 체험 못 할 초현실
그럼에도 여전히 지하철은 어둠을 달리는 숙명을 지닌 물체다. 그래서 이름이 지하철이다. 그런데 그 어둠 속의 질주를 만끽할 수 있는 노선이 있으니 그건 빨간색 신분당선이다. 이 노선이 특별한 것은 기관사의 부재다. 열차 전면이 개방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최고의 자리다. 그래서 신분당선을 타면 굳이 열차의 맨 앞자리로 갈 일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좌석 없다. 그러나 이런 질주에 그런 편의 필요 없다.
반복되는 벽면 조명이 자아내는 리듬감 속에서 어두운 터널을 질주하는 신분당선. /양수열·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터널 속의 열차는 소실점을 향해 내달린다. 초현실적 비례의 초현실적 공간을 초현실적 기계음과 함께 질주, 계속 질주. 벽면의 등간격 조명이 알려주는 노선은 좌우로 휘어 돌며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이건 컴퓨터 모니터의 비디오 게임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몰입형 공간감이다. 시속 90㎞의 실제 상황이며 실물 공간이다. 여전히 질주.
질주무정(疾走無情)의 열차가 속도를 줄여나간다. 터널 너머 빛이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달리기만 하는 열차가 어디 있더냐. 캄캄하기만 한 인생은 또 어디 있으랴. 그래도 방심하면 곤란하다. 장미꽃만 만발한 인생은 없다더라. 열차는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잊지 말지니. 아무리 긴 암굴이어도, 얼마나 긴 어둠을 달려도 결국 우리가 내릴 곳은 저 밝은 빛 어디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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