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군산군도 연작 탄생 현장…‘사진 거장’ 민병헌 작가와의 ‘1박2일’
한겨레 2020-07-06 06:00수정 :2020-07-06 13:34
지인에게도 공개 않던 관행 깨고
펄밭 누비며 출사 현장 공개
6년전 우연히 들른 군산 월명동에 반해
폐가인 적산가옥 작업실 삼아
수십종 꽃과 함께 정원사처럼 살며
고군산군도와 새 담아내
11월 새 연작 사진집 출간 앞두고
눈 펑펑 내리는 결정적 날 기다려
“그때를 상상하면 미치는 거죠”
지난달 21일 아침 고군산군도의 무녀도 해안가에서 삼각대를 대고 작업 중인 사진작가 민병헌씨. 롤라이플렉스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찍을 풍경과 피사체를 어림하는 작업이 이어졌지만, 그는 끝내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셔터를 누르는 것보다 눈으로 담고 찍는 것이 중요하다고 민 작가는 힘주어 말했다. 이한구 사진가 제공
수묵화를 방불케 하는 아련한 톤의 자연 풍경을 담은 사진으로 지난 20여년간 국내 사진계의 대표적인 스타 작가로 활동해온 민병헌(65)씨. 그가 지난달 20~21일 1박2일 동안 <한겨레> 취재진과 땀내 나는 작업현장을 함께했다. 요즘 꾸준히 작업하고 있는 서해 고군산군도의 출사 현장과 적산가옥을 개조한 군산 작업실의 일상, 그리고 비장의 신작인 <새> 연작을 공개했다. 민 작가는 그간 지인들에게도 공개하지 않던 관행을 깨고 펄밭을 누비고 다니면서 그만의 앵글을 찾는 작업 모습을 드러냈다.
■ 풍경은 눈으로 찍는다
카메라를 들었지만, 찍지 않았다. 초여름 햇빛이 벌써 쨍하게 내리쬐는 지난달 21일 아침 7시. 장비를 둘러멘 민병헌씨는 햇살에 반사돼 역광을 뿜어내는 개펄을 전사처럼 성큼성큼 걸어갔다. 삼각대를 바주카포처럼 어깨에 메고 300㎜ 렌즈를 장착한 롤라이플렉스 6008 중형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이날 고군산군도의 들머리 섬인 신시도 포구 귀퉁이 개펄에서 민 작가는 펄밭과 인근 바위, 숲 그늘 여기저기를 옮겨 다녔다. 삼각대를 펄과 인근 바위에 놓고 멀리 보이는 섬을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이리저리 살폈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무릉도원이라 불렸던 선유도의 주봉인 망주봉 등 아련한 바위 봉우리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는 셔터를 누르는 데는 도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척후병처럼 뷰파인더의 시야에 들어온 대상을 관찰하는 데 집중했다. “별 볼 일 없는 풍경 같아도 하루의 때와 계절, 보고 찍는 사람의 기분, 시점에 따라 수십가지의 다양한 상이 나온다”며 그는 뷰파인더를 보여줬다.“여기 한번 봐요. 저기 멀리 사람들이 일렬로 조개 잡는 모습이 점으로 보이죠. 펄 위에 돌이 솟아 오톨도톨한 표면 같은 모습도 보이고. 이걸 넣느냐 빼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져요. 이 자리에서 앵글을 돌리면 또 이런 게 나와. 저기 소나무 바로 앞을 봐요. 밑에 갯가 바위의 결 위로 나무 그림자가 비치죠. 어떻게 프레임을 잡느냐에 따라 풍경의 느낌이 크게 달라져요. 사진이 이래서 재밌는 거야. 많은 사진가가 선유도를 찾지만, 이런 보물 같은 곳은 안 와요.”
고군산군도의 개펄 위에 서서 뷰파인더를 보며 작업 중인 민병헌 작가. 이한구 사진가 제공
그의 뷰파인더 안에는 가까이는 낮은 주상절리 암반이 폭포 같은 형상으로 이어졌고, 조금 떨어진 앞쪽엔 화성의 표면 같은 융기한 언덕이 도드라졌다. 썰물이 빚어낸 기막힌 풍경들. 하지만 연륙교를 질주하는 차에 실려 선유도를 스쳐가는 행락객이나 아마추어 출사자들에겐 이런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민병헌 작가는 이런 풍경이 좋다고 말한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풍경. 지극히 평범한 풍경 속에서 색다른 비주얼이 나올 때면 찍지 않아도 미칠 듯한 희열에 젖어든다고, 오직 나만이 그 풍경을 전유할 수 있다는 기쁨에 몸을 떤다고, 그는 털어놓았다.그의 작업은 선승의 수행과 비슷했다. 찍지만 찍지 않는 것. 찍지 않지만 찍는 것. 무슨 말인가. 그는 뷰파인더로 특정 풍경의 포커스를 옮겨내 열심히 눈에 담기만 했다. 셔터는 누르지 않았다. 풍경을 포착하고 눈에 담아두는 연습. 이미 수십년 동안 그렇게 가장 적절한 구도와 풍경을 찾아내고 눈으로 옮기는 훈련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셔터를 누를 때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미 가장 적절한 장소와 구도, 날씨, 시점을 선별한 뒤이기 때문이다. 그가 구상한 시점에 작업은 절로 이뤄진다.“카메라에 의존하지 않고 눈으로 보고 눈으로 찍는 훈련을 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눈으로 보이는 풍경의 구도를 놓고 어느 부분을 자를지, 몇㎜ 카메라로 찍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며 마음에 기록하는 거죠. 그렇게 머릿속과 눈 속에 기록해놓으면 원하는 때와 날씨를 기다렸다가 카메라만 들이대면 되거든요.” 작가는 대상을 보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시간을 오래 잡고 그냥 보는 거야. 카메라 막 들이대면 방해가 돼. 물론 자연이 도와줘야 하고….”
21일 아침 무녀도 해안에서 민 작가가 멀리 보이는 선유도를 카메라로 포착하고 있다. 그가 촬영 작업 현장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언론에 공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노형석 기자
■ 나는 군산집과 화초를 돌보는 집사
2014년 1월, 민 작가는 아무 연고도 없는 군산 월명동 동네를 우연히 들렀다가 너무 편하고 좋다는 이유로 충동적인 이주를 결행했다. 그해 6월 경기도 양평 양수리 작업실에서 이곳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으로 작업 근거지를 옮겼다. 유년시절을 보낸 서울 종로5가 효제동의 서민 동네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월명동의 분위기에 반해 폐가였던 집을 수리해 작업실 겸 거처로 만들면서 고군산군도 연작을 집중적으로 작업했다. 하지만 지난달 20일 만난 그는 “요즘엔 작가라기보다는 집과 정원을 가꾸고 고치는 정원사나 집사에 가깝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민 작가는 요즘 작업 이상으로 화초를 심고 관리하는 데 공을 들인다. 수년 전부터 수국, 은쑥, 선인장, 방풍나물, 캐머마일, 백리향 등 수십종의 화초를 마당에 심었다. 그가 ‘풀들의 싸움터’라 부르는 정원에서 이들이 다정하게 공생할 수 있도록 신경 쓰는 것이 또 다른 일과가 됐다. “혼자 사는 게 불편하지 않으냐고 하는데, 제 유년시절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는 이 동네와 집이 너무 좋고 편해요. 사진을 찍을 때도 기분과 날씨, 때에 따라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상이 나오기 때문에 심심하거나 외로울 짬이 없어요. 꽃들이 서로 살 자리를 투쟁하는 모습도 작업에 영향을 미치고요.”밤에는 마당에서 맥주를 마시며 작업과 삶을 성찰한다. “빛이 들어오는 각도만 봐도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어요. 오래돼서 굉장히 어두운 집인데, 여름엔 그런 느낌이 안 들죠. 겨울엔 무겁고 진중하고. 홀로 사는 제겐 딱 맞춤해요.”작가는 함께 찾았던 일행들과 와인 잔을 기울이다 “사진 하는 사람들이 찍을 게 없다는 말을 하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대상을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며 목소리를 높이더니 작업공간을 열고 자신의 신작을 꺼내 보였다. 오는 11월 프랑스 출판사에서 사진집으로 출간할 예정인 연작 <새>의 사진들이었다. “내가 보고 싶은 대상은 내 마음으로 보는 게 제일 좋아요. 지난 20여년간 여러 공간에서 포착한 내 눈길 속의 새를 담은 작품들입니다.”
민병헌 작가가 군산 월명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새로운 연작 <새>의 주요 작품들을 보여주면서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 출판사에서 펴내는 사진집을 통해 처음 선보일 <새>연작의 일부. 작가가 가장 좋아한다는 갈매기 사진이다. 고적한 느낌으로 날갯짓하는 새의 세부를 감성적으로 포착했다. 마치 조선후기 그림 대가들의 화조화를 떠올리게 한다.
올해 하반기 프랑스 출판사에서 펴내는 사진집을 통해 처음 선보일 <새> 연작의 일부. 누드 외에는 처음으로 움직이는 동물인 새의 모습들을 대자연 속에서 포착한 회심의 역작이다. 작가의 특기인 아련한 화면 톤의 완성도가 정점에 올랐고 미세한 세부를 드러내는 역량도 더욱 농익었음을 알 수 있다.
■ 새·눈과 함께 찾아올 신작들
1990년대 이후 수묵화처럼 부옇고 아련하고 모호한 작품을 주로 내놓았던 민 작가는 5년 전 이곳으로 작업실을 옮긴 이래 인근 고군산군도 섬의 자연과 생태를 탐방하면서 기존 스타일을 벗어나 숲과 바위, 하늘의 세부를 포착하고 드러내는 쪽으로 변신했다. 고군산군도 연작은 지난가을 대구 루모스 갤러리에서 처음 소개돼 관심을 모았다.새로 보여준 작업은 단원 김홍도나 현재 심사정 같은 조선시대 문인화가들의 화조화를 떠올리게 했다. 물길을 헤엄치며 잔물결을 일으키는 오리와 고적하게 섬의 상공을 나는 갈매기·솔개의 모습 등이 보일 듯 말 듯 한 회색톤 인화지에 잡혔다. 순전히 새에만 포커스를 맞춘 사진이 아니라 자연과 조응하면서 투영된 작가의 울적하고 고독한 감흥까지 드러나는 이미지들이다. 고군산군도 연작은 군산에 온 그가 장소성에 맞춰 처음 내놓는 역작이 될 터다. 이 연작을 완결 짓기 위해 그가 꿈꾸는 것은 섬에 펑펑 눈이 내리는 것. 웬만한 뷰 포인트는 눈으로 찍어두고 기억해뒀다. 이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말한 결정적 순간을 자연이 하사하며 도와주는 때를 기다린다. “눈발이 막 휘날리고 신시도의 병풍바위 위에 희끗한 색감이 입혀지는 그 순간을 지켜볼 그때를 상상하면 미치는 거죠. 눈으로는 포착할 풍경을 다 쟁여놨어요. 오직 내 눈으로 지켜볼 그날을 상상하고 또 상상하면서….” 군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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