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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착오’는 무의식적 자기방어…유리한 내용만 기억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6. 1. 00:30

 

‘기억 착오’는 무의식적 자기방어…유리한 내용만 기억

[중앙선데이] 입력 2020.05.30 00:21

러브에이징

신록(新祿)이 세상을 희망으로 물들이는 5월의 마지막 월요일인 지난 25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1928년생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생중계 기자회견은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역사적 평가를 넘어 고령사회 대한민국에 초고령 노인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보여준 희망의 메시지였다.

이용수 할머니 과거사 생생히 기억
말 바꾼 윤미향 “기억 착오” 주장

인간은 이기심 충족 위해 기억 활용
정신적 충격 클 때 심인성 기억상실
기억 장애·거짓말 서로 혼동하기도

“…92년 6월 25일 신고할 적에…(중략)…29일에 모임이 있다고 해서 갔다…(중략)…한국 나이 16세, 만 나이로는 14살 때 밤중에 끌려가…”

이 할머니는 생생한 육성으로 참혹했던 위안부 생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의기억연대의 문제점 등을 논리정연하게 조목조목 나열했고 특정 일자도 명확하게 적시했다. ‘92세 노인은 기억이 흐릿하고 판단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세간의 편견을 일시에 불식시키는 순간이었다.

노년기 떨어진 기억력, 통찰력으로 보충

사실 77억이 넘는 인구를 성별·연령·학력·인종·국적 등으로 그룹을 나눠 특징을 서술하고 일반화하는 일은 누구나 범하기 쉬운 오류다. 그나마 신체적·외형적 측면은 단순 분류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체격과 체력은 남성이 강하고 유연성은 여성이 좋다는 식이다. 물론 남자보다 체격이 크고 체력도 강한 여성, 여성보다 유연한 남성도 드물지 않다.

성격과 능력을 포함한 내적·정신적인 측면은 1000억개의 신경세포가 수 십년간 개개인의 유전적·환경적 요인과 상호 작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다 보니 몇 가지 기준으로 사람을 분류하고 평가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일례로 흔히 연령에 따라 인지 능력을 추정하는 일도 보편성을 갖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 나이 들수록 기억력은 감소하지만, 인생 경험과 학습을 통해 통찰력은 향상되기 때문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실제로 평생 뇌 기능 활성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은 노년기에도 떨어진 기억력을 강화된 통찰력으로 보충하면서 젊은 사람을 능가하는 인지 능력을 발휘한다. 82세 때 대작 ‘파우스트’를 탈고했던 괴테, 90세에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하이팅크, 95세에도 매일 6시간씩 첼로 연습을 통해 실력을 향상했다는 카살스 등이 대표적인 예다.

기억력만 보더라도 타고난 능력과 학습 정도에 따라 개인차는 매우 크다. 기억력이 뛰어난 노인은 자신의 젊은 시절보다는 못하지만 웬만한 청장년들보다 우수한 기억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용수 할머니도 자신의 크고 작은 경험담을 날짜까지 세세하게 언급하며 설명하지 않았는가. 반면 이 할머니보다 36년 젊은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당선인은 8년 전 자신이 구입한 아파트 대금에 관한 설명조차 사실과 달랐고 이후 말을 번복하면서 “오래된 일이라 ‘기억 착오’였다”라고 주장했다. 윤 당선인의 말 바꾸기가 기억 착오 때문인지, 태연스레 거짓말을 하는 인격 문제인지는 본인만 알 일이다.

정신의학적으로 ‘기억’은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과 정보를 뇌의 특정 부위에 기록한 뒤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적절히 꺼내서 사용하는 능력이다. 인류는 다른 생명체보다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위기 상황에서도 현명하게 행동해 지구촌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경험도 좋은 일, 나쁜 일이 있으며 감정이 실리는 상황도 있고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인간의 뇌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면서 고통스러운 감정에서도 벗어나는 방향으로 기억을 활용한다.

예컨대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게 되면 상황 그 자체는 뇌에 기록도 되고 저장도 된다. 하지만 괴로운 상황을 기억하기 싫은 마음이 너무 커지다 보면 일정 기간 그 사건을 회상하는 기능이 마비된다. ‘심인성 기억 상실’이 발생하는 이유인데 어느 순간 모든 기억이 전부 되살아난다.

윤 당선인이 주장한 기억 착오는 심리적 고통 없이 자신의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거짓된 내용을 기억하는 상태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꾸며서 메우는 작화증(作話症, confabulation),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만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회상성 조작(retrospective falsification) 등이 있다.

기억은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하고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통상 신나는 기억이나 슬픈 기억은 뇌에 쉽게 기록되고 저장도 잘돼 오랜 세월이 흘러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고통의 순간을 잊으려고 노력해도 끊임없이 떠올라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 이유다.

우울할 때보다 즐거울 때 기억 더 잘 돼

기억을 회상하는 과정에도 감정이 관여하는데, 통상 우울할 때보다는 즐거울 때 기억을 떠올리기가 쉽다. 기억력을 극대화해 학습 능력을 높이고 싶다면 연령과 상관없이 항상 즐거운 상태를 유지하는 게 유리한 셈이다.

일상에서 접하는 가장 흔한 기억력 문제는 의식적으로 진실을 부정하는 거짓말이다. 진실을 인정하고 본인의 치부가 드러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이기심의 발로다. 때론 거짓말을 하는 당사자가 자신의 주장이 기억 장애 탓인지 거짓말인지를 혼동하기도 한다.

이번에 제기된 정의기억연대의 불투명한 후원금 사용에 관한 의혹은 누가, 어떤 종류의 기억 장애를 일으킨 상황인지, 그 진실을 밝혀줄 신속하고 정확한 검찰 수사를 기대해 본다.

황세희 국립중앙의료원 건강증진예방센터장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서울대병원에서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미국 MIT에서 연수했다. 1994년부터 16년간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황세희 박사에게 물어보세요’ ‘황세희의 남자 읽기’ 등 칼럼을 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