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화 시집 『꽃의 배꼽』
주술의 언어, 욕망의 파편들
나호열
시 쓰기의 통념으로 마땅히 받아들이고 있는 ‘낯설게 하기’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다수의 시인들이 전통적 서정이나 현장성이 강한 리얼리즘의 시들을 쏟아내고 있을 때 다른 편에서는 저 멀리 프로이드로부터 시작된 무의식의 세계와 그 무의식의 자각과 중첩되면서 밀려오기 시작한 포스트모던의 세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균열되고 부조리하며 불안한 캐오스 caos의 실체를 드러내는 일이 단순히 기법 상의 ‘낯설게 하기’가 아니라 세계 자체가 원래 낯선 세계였음을 증명하는 일이기에 그 자체가 난해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축자적 언어의 의미망을 무화하는 작업은 새로움의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다수의 시인들이 그 대열에 합류하므로서 그들의 시가 몰개성의 한 집단으로 묻혀버리는 일이 많았다. - 이 문제는 아마도 더 깊은 논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정승화의 시집 『꽃의 배꼽』또한 이른바 난해시의 전형을 보여주면서 그 의미망을 포착하기에 어려운 심층 深層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시집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툭툭 부러지는 시어들이 온 몸 구석구석을 떠돌아다니며 말을 걸었을 때 는 이미 늦었다’(「자서」 부분)는 언어에 대한 진술에 있다. 정승화에게 있어서 이 세계와 관련된 어떤 사태도, 사물도 언어로는 도저히 그 본질을 포착할 수 없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시인의 추방을 주장했을 때의 관점은 존재하는 사물을 단순 모방한다는, 말하자면 복사 複寫의 개념이었기에 관념을 담는 언어에 대한 깊은 성찰이 부족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시에 있어서의 묘사는 재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의식을 통과하고 난 후의 인상을 재구성하는 작업이 ‘낯설게 하기’의 또 다른 국면이 재현인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승화는 언어 - 여기서는 한 단어나 한 문장 단위로서-가 내포를 지니지 않은 외연 자체라는 인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상기하면서 사유의 대상과 접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막이 녹아내린 30°C , 상영이 금지된 눈이 내린다 모두가 내다버린 입술이 눈이 되었다 쳐다본 눈마다 경계를 구분할 수 없어 서로 다른 길로 떠났다 두꺼워진 얼굴을 싣고 바퀴는 뒤뚱거리며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의 정류장을 지났고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날 볼에 입맞춤하고 손 흔들던 아침, 고단한 손가락은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 「30°C에서 내리는 눈」1 연
위의 예문에 드러난 바와 같이 단어 하나하나에 주어진 축자적 언어의 의미를 무화시키고 문장의 어긋남을 강조하는 작업은 정승화만이 가진 특유의 시법이 아니다. 부조리한 세계를 표출하는 한 방편으로 언어의 구심력을 무화시키는 일은 더 이상 낯 선, 초유의 창작물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정승화의 기술 記述을 눈여겨보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시편들의 부조리함이 주술 呪術의 언어에 의탁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술이 무엇인가? 사전에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힘을 빌어 재앙을 물러가게 하거나 앞으로 다가올 일을 점치는 행위’라고 적시되고 있거니와 정승화의 시편은 부조리하고 혼돈한 세계를 드러내는 일을 넘어서서 평화와 안락이 구현된 세계를 갈구하는 신을 부르는 단말마의 외침이라는 사실이다. 파괴와 소멸로 진입해가는 세계의 구렁텅이 속에서 ‘그 때 해 하나 숨기고 달이나 낳아볼까요 자막이 치마를 돌돌 말아 올리고 있었다’(「30°C에서 내리는 눈」마지막 부분)는 희망을, 소멸 속에서 생명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푹푹 빠진 발을 묶어두고 깊게 간섭한다 벚꽃과 나비 발목이 오래 한 몸으로 잠드는 걸 지켜보며 태몽을 꾼다 말랑한 눈동자끼리 뒹굴자 풀섶 강물은 4분의 3박자로 흐르고 나비 발목은 밤낮으로 끊임없이 튼튼해졌다
- 「키스」 2 연
정승화의 산문형 시편들은 문장 단위가 단절되지 않은 채로 전혀 상이한 사태들이 접촉하면서 등가 等價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 세계가 분절 分節할 수 있는 단위로 이루어진 집합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있는 세계이기에 혼돈 caos은 불행이 아니라 축복일지 모른다는 의식을 포착하는 것이 정승화의 시편을 읽는 즐거움의 하나라는 점을 기억하자. ‘벚꽃과 나비 발목이 오래 한 몸으로 잠드는 걸 보며 태몽을 꾼다’는 환상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그 꿈은, 그 환상은 나만의 것이 아니며 이성과 본능으로 구분되지 않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허문 사물들 간의 격렬하나 그만큼 포근한 키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구스타프의 클림트의 ‘키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다’라는 시인의 고백은 모든 사물의 연대가 사슬이 아니라 자유를 향해가는 징표를 포착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아닐까?
그래서 다수의 시편들의 화자는 ‘나’가 아닌 숨겨진 그 무엇이다. ‘나’는 주관적인 편향성을 지니고 있지만 발화 發話하는 그 무엇은 쉽게 절망하지도 않고 쉽게 기뻐하지도 않는 자연 그 자체인 것이다. 자연은 또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잉태하고 생산한다. 잉태하고 생산하는 그 때 자연은 여성성을 지니게 되고 그 존재는 붉은 여자로 등장한다.
허물을 벗고 양면거울을 들여다보는 물오른 여자, 비늘 하나에 별 하나씩 감추고 반짝이는 여자, 물렁한 뼈를 움직이며 물칸나 옆에 누워 흐른다 연한 눈동자를 오래 들여다보며 잠깐 꽃치마를 입었었던 붉은 여자
- 「붉은 여자」 마지막 연
꽃이 피는 순간 순간을 스케치하고 있는 듯한 「붉은 여자」는 ‘옷은 입지 않았어요 / 중지에 힘을 주고 엄지와 검지 사이에 4B연필을 쥔 남자를 향해 다리를 꼬고 앉았어’도 선정적 煽情的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염을 넘어서는 성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하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여성성의 상징인 것이다. 분명히 정승화가 바라보는 세계는 일그러지고 왜곡된 비뚤어진 도시이다. 깨끗한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기다려도 ‘매일 매일 십자가에서 살아 내려오는’ 구제 불능의 도시가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곳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아기를 낳지 못하는 나무’, 그러나 ‘낙타는 상처 입은 새를 보살피’는 생명에 대한 염원이 가득한 곳 또한 우리가 사는 비뚤어진 도시인 것이다. 정승화의 난해하고 불투명한 시들은 주술의 언어로 쓰여진 욕망의 파편일지 모른다. 그 욕망은 비뚤어진 도시에서 기다리는 ‘깨끗한 손’이며 모태에서 영원히 분리되어버린 배꼽을 바라보며 생명의 원천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모천회귀의 욕망이다. 그래서 정승화의 페미니즘은 투쟁이 아닌 평화를, 긴 인내 끝에 태어나는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물었지
목덜미의 푸른 점에 대해서
사실 그것은 점이 아니야
이를테면 나비가 뺨을 통과하다 들킨
붓꽃의 비밀장소 같은거야
또 한 때 붉은 기타 몸뚱이를 몰래 빠져나온
못된 악보의 푸른 상처지
가끔 그 비밀장소에서 푸른 상처와 입을 맞추곤 해
그리고 자물쇠를 채운 뒤 바다에 던져버려
...중략 ...
드디어 맥박소리 비밀장소를 빠져나갈 때
그 때 흔적이라고 말해주겠어
흔적은 마음을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거든
뾰족한 겨울에 찔려 눈雪내리는 것처럼
- 「푸른 점」 이연, 육연, 마지막 연
『꽃의 배꼽』은 한국대표시인선 99(시와산문사)로 2015년에 발간된 시집이다. 독특하고 깊은 심층을 지닌 시집임에도 그에 걸맞는 조명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정승화 시인의 시세계를 탐색해 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말미에 붙은 해설은 정승화 시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기에 몇 마디를 붙여본다
시인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가. 시는 설득이나 선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일상의 어떤 과정을 보여줄 뿐이다. 시는 때때로 거의 해독이 불가능한 비의로 가득하기도 하다. 그러나 행마다 아찔하고 아름답고 간결한 운율로 그 모든 일체를 단숨에 닿는다
- 이충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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