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세 避世와 정주 定住, 그 공간적 의미
나호열
1.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공간에 예속되기 보다는 시간과의 싸움에 익숙해져 있다. 삶터와 일터가 지척이었던 농경사회에서는 정주 定住에서 빚어지는 환경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받으면서 정서적 기반을 스스로 닦아낼 수 있었던 반면에 획일성, 평준화, 익명성 등의 특징을 지닌 도시의 공간은 정서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없는 삶을 노동으로 소비하는 장소로 탈색해버린 형국이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는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의 이야기는 자연에 기대어 사는 삶을 전제로 할 때 제한적으로 타당한 것일 뿐, 오늘날에 이르러서의 자연은 경제적 산출과 위락의 장소로 대상화되어 있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사회로의 이행은 경이롭다. KTX는 서울에서 3시간이면 우리를 해운대 바닷가로 데려다 주고 거실에 걸려 있는 대형 TV는 인터넷과 연결되어 미국 워싱턴의 국립 미술관 소장품을 보여준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상현실 (VR, 假想現實)은 더 이상 우리를 현장과 사실의 구분이 무용함을 일깨워줌으로서 노마드의 삶은 더욱 견고해지고 신념화된다. 그런 까닭에 시인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도시 공간을 창작의 영감을 주는 모태母胎로 인식한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2.
무학대사와 이성계가 도봉 능선을 따라 북악에 이르러 새로운 도읍지를 정한 이후 육백년 동안 서울은 내사산 內四山( 북악, 낙산, 남산, 안산)의 안쪽으로 한정되었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산업화로 말미암은 도시의 확장은 한강을 경계로 강남과 강북으로 광역화되었고 오늘날의 강북지역은 한강 이북의 행정구역 상 여러 구 區를 통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강북지역을 종로를 기점으로 북한산 등뼈의 오른쪽, 남북으로 길게 뻗은 북한산 능선이 의정부에 이르는 지역으로 한정하고자 한다. - 북한산 서쪽 지역인 서대문, 은평지역은 별도의 공간으로 간주한다 -
사대문을 벗어나면 곧 전원의 풍경이 펼쳐졌던 이 지역은 빠르게 집단 주거의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일제에 항거하며 심우장에 칩거했던 만해 한용운의 성북동은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1969)에 드러난 바와 같이 급격한 도시 확장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주거지의 이동이 빈번한 오늘날의 세태에 비추어, 시와 시인과의 관계를 공간의 의미망으로 묶는 것은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산업화와 천박한 자본주의에 몰락해가는 농촌의 아픔을 시「농무」를 통해 그려내었던 신경림, 동양사상 특히 노자와 장자의 생각들을 사물화하는데 힘을 쏟은 박제천, 짧은 사행시와 삼행시를 기반으로 몸과 정신의 긴장을 유니크하게 실험하던 강우식, 사물과 인간의 존재양식을 세밀하게 묘파한 김기택, 해체되는 이성과 여성성의 의미를 현실과 환상을 버무려 세상에 던진 김혜순 등 각기 다른 시적 편향과 성취를 이룬 시인들이 함께 살고 있는 이 공간을 하나의 에꼴로 묶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3.
따라서 시와 시인에게 주어지는 공간은, 그 공간이 시적인 모티브가 되거나 영감을 주는 매개체가 되거나 아니면 그 공간 속에서 오래 정주하며 물아일체의 경지에 닿으려는 성과를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시와 시인의 공간을 정주定住의 의미로 좁혀 들어가게 되면 곧 우리 문단에 큰 족적을 남기거나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가고 있는 몇몇의 시인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반 세기 가까운 시간을 북한산록에 거주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인들인데 이생진, 임보(본명 강홍기), 홍해리 시인이 바로 그들이다. 재작년에 작고한 박희진, 올해 봄에 영면에 든 황금찬 시인도 이 지역에 오래 머물면서 뚜렷한 개성으로 우리 시단을 빛낸 분들이다.
1918년 8월 10일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난 황금찬 시인은 1953년 시 「경주를 지나며」를 발표하며 시단에 나온 이래 2017년 4월 8일 향년 98세로 작고하기 전까지 시를 사랑하고 시의 열정을 사그러뜨리지 않은 우리나라 최장수 시인으로 기독교 신앙과 고귀한 사랑을 일깨우는 인간의 염원을 시화 詩化하였다. 계간 「문학사계」 2017년 여름호 추모 대담에서 최은하 시인은 '구겨지지 않는 삶과 신앙을 지키면서 시를 쓴 사람'이라고 회고한 바 있듯이 그의 휴머니즘은 사변에 치우치지 않고 현장의 건강성을 진솔하게 담아내는데 있다고 보여진다.
보릿고개 / 황금찬
보릿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소년은 죽은 동생의 마지막 눈물을 생각한다.
에베레스트는 아시아의 산이다./ 몽블랑은 유럽,/ 와스카란은,/ 아메리카의 것,
아프리카엔 킬리만자로가있다.
이 산들은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도 뼈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코리아의
보릿고개는 높다./ 한없이 높아서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갔다./ …굶으며 넘었다.
얼마나한 사람은 죽어서 못 넘었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에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섬의 시인으로 불리는 이생진 시인 또한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1929년 10월 1일생) 매달 시낭송퍼포먼스를 개최하고 끊임없이 자유를 염원하는 낭만적 시풍을 견지하며 왕성한 시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동반자
늙으면 다 그렇고 그렇다
점심 먹으러 온 노인복지회관
내가 뽑은 식권 번호가 456 이고
뒤에 줄이 남았으니 500은 되겠다
노인들만 모이니 정말 무섭다
오늘은 왜 이리 많지
아 말복이지
점심 메뉴에 닭다리가 하나씩 들어가는 날이다
그러면 그렇지
식권을 받아들고 살금살금 지하로 내려간다
지팡이도 따라온다
나도 말이 없고 지팡이도 말이 없다
지팡이도 따라다니며 많이 닮았다
친구들도 하나씩 가고
아내도 먼저 갔다
내가 간 뒤의 지팡이는
나보다 더 혼자다
혼자 식당에 오지 못한다
내가 남았을 때보다 더 쓸쓸하겠다
시도 못 쓰고
그런 생각을 하며
밥을 기다린다
지팡이도 기다린다 (2017.8.11)
- 이생진 시인의 홈페이지에서 옮겨옴
시인 임보(1940 ~)는 1959년 현대문학을 통하여 등단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시집, 시론집, 시교육서 등을 펴내면서 시의 보급에 힘써왔다. 풍자를 바탕으로 한 재미있는 시를 역설하는 한편 새로운 시법을 찾는 실험정신을 잊지 않으려는 자세는 후배시인들에게 전범 典範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바보 이력서 / 임보
친구들은 명예와 돈을 미리 내다보고
법과대학에 들어가려 혈안일 때에
나는 영원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어리석게 문과대학을 지원했다
남들은 명문세가를 좇아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현모양처를 구했다
이웃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강을 넘어
남으로 갔을 때
나는 산을 떨치지 못해 추운 북녘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임보 시인과 더불어 홍해리 시인도 1969년 시집 《투망도(投網圖)》로 문단에 등장한 이후 노익장을 과시하며 삶의 애환과 기쁨을 아우르는 인생파적 시풍으로 자신만의 시세계를 구축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는 시인이다. 20여 권의 시집을 상재한 그는 고운야학 孤雲野鶴의 정신으로 동양적 사유를 현재의 삶으로 치환하는데 성취를 이루고 있다.
구멍 / 홍해리
호수가 꽝꽝 얼어붙어도
한 옆엔 얼지 않는 구멍이 있다
물고기들 숨 막힐까 봐
발딱발딱 숨쉬는 구멍이 있다
박희진 (1931 ~ 2015)시인은 1955년 『문학예술』지에 시「무제」를 발표하며 시단에 나와 작고할 때까지 한국인의 심적인 원형을 찾는 일에 집중했다.
시를 쓰는 생활이란, 고려 말의 목은 이 색이 말한 “종신지락 終身至樂”입니다. 아시다시피 종신지락은 하루아침의 낙이 아니고, 부귀영화가 아닙니다. 나는 예술친화적 삶을 적극적으로 누리고 싶고, 詩作을 할 때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詩作은 그래서 일종의 종교 같습니다. 나는 “각자覺者의 기쁨”을 말하는 불교를 믿습니다. 그러나 불교 하나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른 세계 어떤 종교도 다 받아들일 수 있다고 봅니다. 정상을 향해 가는 등산로는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죠. 모두 하나의 정상을 향해 나가고자하는 정신, 거기에 무한한 희열을 느낍니다.
한국엔 원래 고유의 종교가 있었다고 봅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우고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분명 우리 고유의 종교가 있었고, 그것이 <풍류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 cafe.daum.net/urisi에서 발췌 인용
이미 시의 공간 <동두천, 연천> 편에서 언급한 까닭에 더 이상의 설명은 거두기로 하고 시인이 1979년, 구상 시인, 성찬경 시인과 함께 만든 것이 [공간시낭송회]이며, 생전에 시낭송에 깊은 열정과 관심을 가졌다는 것만을 기록해 두고자 한다.
앞에서 시의 공간의 정의를 장시간의 정주를 통해 그 공간의 의미를 확장하거나 공간 자체를 모티브로 삼는 일련의 창작 행위라고 할 때, 이에서 언급한 시인들은 북한산 자락에 오래 거주하면서 무위자연 無爲自然의 이치를 터득해가는 즐거움을 표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끈끈한 연대는 1986년에 결성된 <우이시 牛耳詩> 동인의 결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007년 사단법인으로 전환되면서 전국적 동인 <우리시>로 개편되었고, 매달 시낭독회와 월간 『우리시』를 발간하므로서 면모를 일신하고 있지만 그 주축은 여전히 자연을 벗삼는 <우이시>의 정신에 있음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자연(自然)과 시(詩)의 선언(宣言)
자연(自然)은 생명(生命)의 모태(母胎)요 삶의 터전이다. 모든 생명체는 어머니인 자연의 품속에서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천부(天賦)의 권리를 부여받았 다. 반면에 만유(萬有)가 공유(共有)할 수 있는 자연을 성스럽게 보전해야 할 의무도 또한 지고 있다. 그런데 지상의 영장임을 자처하는 간악한 인간의 무리들은 문명(文明)과 개발(開發)이라는 미명(美名) 아래 흐르는 강을 막고 푸른 산을 헐며, 무쇠로 수레와 배를 만들어 수륙(水陸)을 넘나들고 강철로 날개를 지어 창공을 가르면서, 어머니 자연의 가슴을 물고 뜯어 만신창이(滿身瘡痍)를 만들고 말았다. 그리하여 생명의 근원인 물과 공기는 썩어 가고 대지와 초목군생(草木群生)들은 병들어 시들고 있지 않는가. 무너지는 자연과 함께 인간의 종말이 머지않았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인데, 아직도 그 위기를 깨닫지 못한 몰지각(沒知覺)한 인간들은 눈앞의 사소한 이익에만 사로잡혀 서로 자연훼손(自然毁損)의 경쟁을 벌이고 있으니 아, 통탄할 일이로다. 이제 인간들은 지상의 영장(靈長)이 아니라 그들의 모체(母體)를 허무는 패륜아(悖倫兒)요, 신(神)의 뜻을 거역하는 범법자(犯法者)로 전락하고 말았다. 아니 대지를 갉아먹는 좀벌레요, 죽음의 덫을 쌓아 가는 무지한 도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암담한 인류의 미래를 내다보며 전율을 느끼는 우이동(牛耳洞) 시인(詩人)들 이 오늘 북한산 자연의 품속에 안겨 외치노니, 몽매한 인간들이여, 네 생명의 젖줄인 자연을 섬겨라. 자연을 보는 네 눈이 아직도 닫혀 있다면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저 산야(山野)의 눈부신 단풍들을 보라. 신의 뜻 생명의 외경(畏敬)이 여기 넘치나니 그대가 지은 어떤 마천루(摩天樓)의 모래성도 한 이파리 저 단풍의 신비를 따를 수는 없으리라. 단풍은 자연이 만든 아름다운 시(詩)다. 이 시가 막힌 네 가슴을 열지니 돌아와 무릎을 꿇고 자연 앞에 경배(敬拜)하라.
아, 무엇이 이 세상을 이처럼 황폐하게 만들었는가. 인간 심성(心性)의 각박함 이로다. 이기적(利己的)인 탐욕에 눈이 멀어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시의 마음을 잃은 탓이로다. 각박한 인간들이여, 그대들의 가슴속에 깊이 잠들어 있는 시의 불씨를 깨우라. 시의 불씨가 타오르면 겨울 들판처럼 얼어붙은 그대들의 가슴에 해동(解凍)의 물결이 일렁이고, 머지않아 백화(百花)가 난만(爛漫)한 따스한 봄 동산을 얻으리라. 시는 인간의 아름답고 순수한 심성(心性)이 빚어낸 꽃이요, 이 지상에 평화를 심는 사랑이다. 시로 쓰인 연두교서(年頭敎書), 시로 된 법전(法典), 시로 이루어진 신문기사(新聞記事), 시로 외치는 행상인(行商人)의 목소리―그러한 시인공화국(詩人共和國)은 없는가. 그러한 세상은 자연과 인간과 만휘군상(萬彙群像)이 한데 어울려 뒹구는 평화의 낙원(樂園)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여, 자연을 사랑하는 시의 마음을 어서 일깨우라. 그대의 아름다운 심성이 암담한 절망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리라. 단풍은 자연이 빚은 아름다운 시요, 시는 사람들이 피운 아름다운 단풍잎이다.
- 우리시 홈페이지에 옮김
4.
오랫동안 북한산 자락에 살면서 자연과 인공의 충돌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를 시로 구현하고자 하는 시인으로 강만수와 나호열을 들 수 있다.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나호열은 상계동 연작(시집 『칼과 집』 1993)을 통해서 농경적 공동체 사회가 어떻게 천박한 자본과 상업주의에 무너지는지, 그 실상을 생생히 보여준 바 있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변방으로 내몰리는 소시민의 삶을 서정적 필치로 위무하는 시업에 열중하고 있다.
사막에 살다
- 상계동 ․ 2
아파트가 들어서고
술집이 들어서고
디스코테크가 들어서고
여관 옆에
교회가 들어서고
유치원이 들어서고
병원이 들어서고
병원보다 먼저
영안실이 설치되고
학교와 은행이,
마지막으로 세무서와
경찰서가 입성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길은 언제쯤 개통될까
강만수는 1992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한 이후 맹렬한 기세로 11권의 시집을 상재하면서 물신화 되어가는 이성의 함몰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내고 있다. 필자는 그의 시세계를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평한 바 있다.
십 칠년의 긴 침묵 후에 강만수는 밥 먹듯 시를 쓴다. 아니 시를 밥으로 여기며 시 아닌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이 카오스이며 카오스가 곧 코스모스임을 안다. 온갖 전쟁과 질병의 악몽 속에서 인류가 오백만년 동안 멸종되지 않은 이유를 진화와 발전의 그럴듯한 이성의 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소쉬르를, 에릭슨을, 라깡을 믿지 않는다. 천국과 지옥의 공간과 頓悟와 頓修의 시간을 거부한다. 그 대신 화이트 아웃 white- out의 문을 열고 사차원의 세계를 향해 온몸을 던진다. 축자적 언어의 의미를 벗어던지고 몸의 오관이 감촉하는 우주의 메시지를 받아 적으려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white- out』은 물리학이 깨달은 사차원의 세계도 아니고, 성인들이 깨달은 道의 세계도 아닌, 인간이 즉물화되는 순간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환상이나 무의식에 대한 탐구로 강만수의 시를 읽는 것은 광대한 우주의 끝을 상정하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평온한 순간 / 강만수
네 마리 개들이 그 중 다른 한 마리 개에게 달려들어 개를 물어뜯고 있다
살점이 뜯긴 측은한 몰골의 시붉은 살갗이 그대로 드러난 검정 닥스훈트
공격을 당하고 있는 개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왕왕 그러다 낑낑 깨깨 깽
제대로 피하지도 못한 채 길바닥에 피를 질질 흘리며 마구 물어뜯기고 있다
어느 날 길가에서 본 몇 마리 비둘기가 다른 한 마리를 부리로 마구 쫘댄다
봄볕을 쪼고 있는 걸까 처음엔 가느다란 봄 햇살을 톡톡 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피가 튀었다 눈가와 부리에 시붉은 피 피 피 피 햇살이 마구 튀고 있다
떼로 몰려들어 한 마리 검정 비둘기를 무차별 공격 하고 있는 멈추지 않는 행위
피투성이 된 저 모습은 뭘까 적자생존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뭔가가 있는 걸까
경찰순찰차가 지나가는 걸 바라보며 레오나르도 카페 의자에 앉아 평온해진 순간
생을 조롱하다 결코 친절하지 않은 긴 공포를 빼닮은 시간 앞에서 무력한 나를 봤다
5. 결어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삶에 있어서 공간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어디에 살던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무한이동하는 시간이 유효한 존재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책무는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의 획일성을 무너뜨리고 그 공간 속에 자연을 다시 호명하는 것, 아날로그적 시간의 무늬를 아로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 계간 시와 산문 2017년 가을호에 게재
'내가 쓴 시인론·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일용 시집 『흔들릴 때가 가장 아름답다』/ 유쾌한 슬픔을 생生에 각인하는 시 (0) | 2017.09.26 |
---|---|
정승화 시집 『꽃의 배꼽』/ 주술의 언어, 욕망의 파편들 (0) | 2017.09.04 |
자연으로 돌아가라! (0) | 2017.06.13 |
누란樓蘭으로 가는 요양원의 낙타 / 강동수 시집 『기억의 유적지』 (0) | 2017.06.04 |
장문영 시집 『소금의 눈』: 관물 觀物의 세계와 정화淨化의 시 (0) | 2017.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