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3.09 04:00
[노은주·임형남의 골목 발견] 서울 '수송동'
대한불교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는 서울 수송동에 있다. 그곳에는 언제나 사람으로 그득해서 한적함을 뜻하는 '절간 같다'는 표현이 여기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여러 가지 행사와 기도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데 그 사람들을 조계사 대웅전에 높다랗게 앉아있는 거구의 부처가 굽어보고 또한 대웅전보다 키가 더 큰 나무 두 그루가 굽어본다. 조계사 마당 한가운데에는 450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불길처럼 활개를 펴고 있는 회화나무와 500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게 훤칠하고 활달한 느낌의 백송이 있다. 나는 그곳이 조계종의 총본산이므로 당연히 유서 깊은 사찰일 것이며 오래된 나무들 역시 이 절과 역사를 같이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조계사는 그렇게 오래된 절이 아니다.
이곳에 있던 보성학원이 1937년에 혜화동으로 이전하며 조계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니 따져보면 올해로 80년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보성학원 터는 1906년 김교헌이라는 사람에게서 보성학원의 설립자이며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구한말 관리 이용익이 인수한 것이다.
이곳에 있던 보성학원이 1937년에 혜화동으로 이전하며 조계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니 따져보면 올해로 80년째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보성학원 터는 1906년 김교헌이라는 사람에게서 보성학원의 설립자이며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구한말 관리 이용익이 인수한 것이다.
김교헌은 나라가 일본에 의해 없어지게 되자 300칸이 넘는 대저택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고 자신도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고 한다. 그 집은 김교헌의 7대조 김주신이 왕에게 하사받은 집안의 재산이었다.
또한 이용익은 보성학원을 만들어 나라를 구할 인재를 양성하고 보성인쇄소를 만들어 기미독립선언문을 인쇄했다고 하니, 사람으로 그득한 조계사에 갈 때에는 꼭 김교헌과 이용익, 두 분의 이름과 그들이 가졌던 염원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수송동은 애매한 경계를 가지고 있다. 그 동네의 경계는 남쪽으로는 종로구청까지이고 서쪽으로는 미국대사관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의 끄트머리를 물고 있다. 좀 이상한 부분은 동쪽인데 조계사 경내를 가로지르며 수송동과 견지동이 조계사를 반씩 나누고 있다.
조계사의 주요 전각인 극락전과 대웅전은 수송동에 속하고 입구의 문루와 부속건물이 있는 자리는 견지동에 속한다. 물론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이 일제강점기에 얼토당토않게 합쳐지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수송동이라는 이름은 수진방(壽進坊)의 수자와 송현(松峴)의 송자를 합친 이름이라 한다. 강압적인 창씨개명도 그렇고,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은 이름을 빼앗는 것을 가장 효과적인 정복의 수단으로 인식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 글자씩이라도 남아 어렴풋한 기억을 담고 있던 동네의 이름마저 도로명으로 개편된 요즘 주소에서는 없어지려 하고 있으니 참 안타까울 따름이다.
서울의 동네들이 대부분 그렇듯 수송동에도 이곳만의 기억이 잠겨 있다. 씨줄과 날줄처럼 역사의 기억들이 층위를 달리하며 엇갈리며 지나가는데, 멀게는 조선 초기, 삼봉 정도전의 기억부터 시작된다. 그는 이성계와 더불어 조선이라는, 500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한 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그는 나라를 세우고 궁과 아주 가까운 곳에 집을 지었는데 그 자리는 태평로의 바로 뒤편 지금의 종로구청 자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권력 다툼에서 밀려 죽게 되면서 그의 집은 여러 토막으로 나누어진다. 살림채는 제용감이라는 관청의 자리가 되고, 서당 자리는 교육기관인 중학이 되었으며, 마구간 자리는 궁중의 말과 수레 등의 탈것을 관장하는 사복시로 나뉘었다니 집이 얼마나 컸었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난 후 근대에 그 자리에는 수송국민학교가 들어서 있다가 1977년 폐교되고 지금은 종로구청이 들어서 있다. 종로구청의 건물 일부는 수송국민학교의 교사인데 그나마 건물이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무척 대단한 일이라 생각하며 드나들고 있다. 수송국민학교는 어릴 때 몇 번 가 본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을지로1가 수하동에 있었던 청계국민학교를 다녔는데 그 학교는 1969년 폐교되었고 그 자리에 거대한 오피스 빌딩이 들어섰다. 그에 비한다면 용도는 바뀌었지만 건물과 자리가 남아있는 수송국민학교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기억할 수 있는 한 조각이라도 남아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도시 유목민의 운명 아니겠는가.
수송국민학교의 기억처럼 수송동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기억의 층위는 사실 이곳에 있었던 학교들이다. 수진측량전문학교, 수송전기공업고등학교, 숙명학교, 중동학교, 신흥전문학원, 그리고 보성학교 등이 모두 수송동에 있었다.
수진측량전문학교는 유길준이 수송국민학교가 생기기 전, 지금의 종로구청 자리에 설립한 측량 전문 인력을 양성하던 곳이었고, 숙명학교는 1906년 양정고등학교, 진명학교를 만들었던 고종의 귀비인 엄비가 지원해서 만든 여성교육의 선구적인 학교였다. 숙명학교나 중동학교 모두 무척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있었지만 1980년과 1984년 강남으로 이전하고 지금은 학교가 있었던 수송공원 안에 검은 돌로 된 표지석만 남아있다.
신흥전문학원은 우리에게는 무척 생소한 학교이다. 이 학교 역시 수송공원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던 신흥무관학교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고자 성재 이시영이 세운 학교이다. 1949년에 정식으로 대학 인가를 받았으나 학교의 운영 주체가 바뀌며 1955년 회기동으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1960년에는 학교 이름을 경희대학교로 변경한다. 지금은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인 신흥대학에 대해 알고 있거나 기억하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그러나 몇 년 전 뜻있는 경희대학 동문이 수송공원 안에 신흥전문대학 표지석이라는 기억 한 조각을 세웠다.
지난 1일 아침 수송동을 거닐었다. 이 길을 걸으며 숙명을 다녔던 박완서와 보성을 다녔던 이상에 대해 써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유난히 눈에 들어오던 표지석과 골목 안의 흔적들로 이야기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흘러갔다. 의식하지는 않았으나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그렇게 이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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