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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문즉시수벽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2. 28. 21:27
 
 
케이옥션 2월 경매에서 5200만원에 낙찰된 추사 김정희의 ‘폐문즉시수벽산’, 종이에 먹, 18×156㎝, 19세기 중엽 [사진 케이옥션]

케이옥션 2월 경매에서 5200만원에 낙찰된 추사 김정희의 ‘폐문즉시수벽산’, 종이에 먹, 18×156㎝, 19세기 중엽 [사진 케이옥션]

 

중화굴기(中華堀起)로 콧대 높은 줄 모르는 중국인들이 일관해 존경하는 조선 학예인이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다. 2006년 추사 탄생 220년, 서거 150년을 맞아 중국 최고 서예 잡지 ‘중국서법’이 펴낸 기념특집호는 김정희를 시와 문장의 대가, 고증학·금석학의 으뜸 선생인 종사(宗師)와 글씨의 성인이란 뜻의 서성(書聖)으로 기렸다. 추사체를 창안해 입고출신(入古出新, 옛것에서 새로움이 나온다)의 새 경지를 보여준 그의 글씨는 청나라 학자와 서예가를 놀라게 했다. 중국인 못지않게 추사의 서예를 흠모했던 일본인은 본격 수집에 나서 작품 값을 올리는 데 일조했다. 추사 학예의 국제성을 입증하는 사례다.
추사 김정희, 사서루, 종이에 먹, 26×73㎝, 19세기 중엽, 개인 소장. [사진 눌와]

추사 김정희, 사서루, 종이에 먹, 26×73㎝, 19세기 중엽, 개인 소장. [사진 눌와]


DA 300


지난 22일 서울 신사동 케이옥션 전시장에서 열린 2월 경매에 추사의 제주 유배시절(1840~48) 초기작으로 추정되는 글씨 한 점이 나왔다. ‘閉門卽是須壁山(폐문즉시수벽산)’, 문을 닫으면 산 속에 있는 것 같다는 뜻이다. 오십대 중반에 들어 험지로 귀양살이를 떠난 추사의 마음을 비추는 글귀다. 강건하면서도 괴(怪)하고 조형미 넘치는 평소 추사체보다는 다소 순하고 부드러우면서 자유분방한 느낌의 서체가 정감 있다. 글씨에서 맑은 소리가 들리는 듯 정갈한 기운이 흘러넘친다. 좋은 작품은 알아보는 눈이 많은 법이다. ‘폐문즉시수벽산’은 여러 응찰자가 수차례 경합한 끝에 낮은 추정가 2500만원을 2배 이상 뛰어넘는 5200만원에 새 주인을 찾았다. 이날 경매장은 추사의 글씨 덕에 고미술 부문이 골고루 조명받으며 낙찰률 84%를 기록했다. 김영복 케이옥션 고문은 “추사 작품이 팔린다는 건 그간 침체됐던 고미술 시장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밝은 조짐”이라고 평가했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는 최근 펴낸 『안목(眼目)』(눌와)에서 추사의 장인정신을 기리며 그가 절친인 권돈인(1783~1859)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을 소개했다. “제 글씨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저는 일흔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1000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습니다.” 유 교수가 책에 소개한 개인 소장의 ‘賜書樓(사서루)’는 이런 치열한 수련으로 일군 절정의 조형미를 보여준다. 일찌감치 추사 글씨의 요체를 알아본 박규수(1807~77)의 안목이 정곡을 찌른다.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을 이루었으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정재숙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