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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영양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 24. 23:52

눈 내리는 날에 경북 영양의 산해리오층모전석탑 앞에 섰다. 비어진 공간과 붉은 기운이 도는 청회색의 탑. 그리고 느티나무 고목이 한데 어우러져 그윽한 미감을 빚어낸다. 석탑은 상주∼영덕 고속도로 동청송·영양나들목으로 나가 차로 20분 거리에 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튿날. 경북 상주에서 영덕까지 동서를 잇는 고속도로가 개통됐습니다. 경북 내륙을 단숨에 가로지르는 고속도로입니다. 도로가 새로 나면서 2시간 20분이 걸리던 상주에서 영덕까지의 거리가 1시간으로 좁혀졌습니다.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영덕까지의 거리도 1시간 이상 단축됐습니다. 해마다 4000억 원꼴. 7년 동안 2조7000억 원을 들여 150개의 터널과 교량으로 지은 고속도로가 당겨놓은 건 영덕뿐만이 아닙니다. 좁고 굽은 국도 탓에 ‘교통오지’로 일컬어지던 경북 청송이나 영양 가는 길도 한결 가까워진 것이지요. 그 길을 따라 겨울 여행지를 엮어 봤습니다. 빠르고 곧은 길이 늘 옳았던 건 아니지만, 그 길은 경북 내륙의 험한 길을 가야 만날 수 있는 오지를 우리 곁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가까워져서 새삼스러운 그곳을, 고속도로를 들고 나면서 차근차근 둘러 봤습니다.

# 길 하나가 여러 길로 이어지다

▲ 경북 울진 영덕읍 창포리의 창포말등대를 배경으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상주∼영덕 고속도로는 경북 상주와 영덕을 잇는다. 상주에서 출발해 경북 의성, 안동, 청송, 영양을 거쳐 영덕까지. 길은 순서가 있지만, 여기서는 그 순서를 따르지 않기로 한다. 길은 끝에서 끝만 잇는 건 아니다. 중간에서 들어서기도 하고, 나가기도 한다. 그 길이 들러 가는 곳 하나하나가 저마다 목적지가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하나의 도로가 새로 난다는 건, 그 길이 거쳐 가는 곳마다 수많은 길이 새로 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길은 하나가 났지만, 행로는 여럿이 되는 까닭이 그렇다.

상주에서 영덕까지 달리는 고속도로에는 7개의 나들목이 있다. 안동으로, 의성으로, 그리고 청송과 영양으로도 나갈 수 있다. 그중 새삼스러운 곳이 영양과 청송이다. 영양과 청송은 경북 내륙의 오지로 꼽혀온 곳. 영양이나 청송은 멀기도 하거니와 굽은 길을 따라 에둘러 가는 탓에 ‘교통의 섬’으로 불리어 왔다. 사실 고속도로가 좁힌 영양과 청송까지의 물리적인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청송과 영양을 가깝게 만든 건 그곳이 목적지가 아니어도 고속도로만 나가면 오지의 명소를 언제든 만날 수 있게 됐다는 점 때문이다. 고속도로가 바짝 당겨놓은 건 다름 아닌 ‘심리적 거리’인 셈이다.

새로 놓인 고속도로를 따라가는 이번 여정은 길의 순서가 아니라 ‘감흥의 순서’로 정한다. 가까워져서 반가운 곳들, 그리고 겨울에 가장 빼어나다고 생각되는 곳을 골라 앞에 세워놓았다는 뜻이다. 순서대로 적어두면 아무래도 매혹적인 경관들이 도드라지지 않아 그랬지만, 사실 여행자들도 볼 것 다 봐가며 길을 순서대로 차근차근 밟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 눈 내리는 풍경에 서 있는 석탑 하나

상주∼영덕 고속도로로 영양을 거쳐 간다면 여기만큼은 빼놓을 수 없다. 영양의 낙동강 상류인 반변천의 물길이 굽어 흐르는 곳에 서 있는 ‘산해리오층모전석탑’. 겨울 들판의 쓸쓸한 적막을 기단으로 삼고 서 있는 탑이다. 석탑은 영양의 유일한 국보다. 국보로 삼은 뜻은 짐작건대 독특한 건축양식 때문이겠지만, 탑이 빚어내는 공간의 미감도 ‘나라의 보물’로 삼는 데 모자람이 없다.

‘모전(模塼)’이란 ‘전탑을 모방했다’는 뜻. ‘전탑’이란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하는데 이 탑은 흙으로 구운 게 아니라 돌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 지었으니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돌을 쌓아 만든 탑은 기교 없이 소박하다. 다보탑처럼 귀족적인 것도 아니고, 석가탑처럼 섬세한 아름다움을 뽐내지도 않는다. 탑은 그저 무심하게 쓸쓸할 뿐이다.

석탑의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하는 건 8할이 주변 경관이다. 탑 앞으로는 넓게 공간이 비워져 있고 탑 옆에는 가지를 뒤튼 늙은 느티나무가 있다. 그 뒤로 반변천의 물길이 깎아낸 갈모산 석벽이 우람하다. 석탑과 배경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건 깊은 공간감이다. 탑은 다른 계절에도 좋지만 그중 으뜸이 겨울이다. 시간의 뼈대가 드러나는 겨울철에 흑회색 석탑의 색감이 도드라지고 고즈넉하고 쓸쓸한 느낌이 더 강렬하다.

상주∼영덕 고속도로 동청송·영양 나들목으로 나올 때 성글었던 눈발이 어느새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당당하게 늙은 석탑 주위로 날리는 눈발이 왜 아득한 시간 너머에서 건너온 은하수 별빛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퍼붓는 눈발 속에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공간 앞에서 시간을 잊었다. 겨울날에 이 탑 앞에서 눈을 만나게 된다면 누구도 그럴 것이었다.

경북 청송의 주왕산 용추폭포로 드는 길. 주왕산은 근육질의 암산이라 겨울의 풍경이 다른 계절 못지않다. 상주∼영덕 고속도로 청송나들목에서 주왕산 들머리인 대전사까지 차로 20분이 걸린다.


# 주님이 함께했던 자리를 찾아가다

상주∼영덕 고속도로는 의성의 북쪽과 안동 남쪽을 딛고 지나간다. 안동의 내로라하는 관광 명소는 대부분 안동 북쪽에 있다. 안동의 명소에 가려면 중앙고속도로 서안동 IC를 이용하는 편이 더 가깝다. 상주∼영덕 고속도로 개통으로 접근성이 나아진 게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까워진 곳이 딱 한 곳이 있으니 거기가 바로 안동 남쪽의 ‘권정생 동화나라’와 고 권정생 생가다. 동화작가 권정생. 평생을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글을 쓴 그는 생전에 교회 종지기로 낮은 삶을 살면서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따스하게 보듬었다.

그의 글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하나같이 힘없고 약한 것들이었다. 청각장애인, 바보, 거지, 외로운 노인, 시궁창에 떨어져 썩어가는 똘배, 풀밭의 강아지 똥…. 버림받고 소외된 것들의 예수 그리스도적인 삶이, 그의 글에 짙게 배어 있다.

권정생의 동화나라는 폐교를 고쳐서 문학관으로 다듬어놓은 곳. 평생 고통스럽게 지고 살았던 병마에 대한 이야기부터 그의 삶을 관통하는 기독교적인 정신, 그리고 생전에 남긴 따스한 글로 그를 추억하는 공간이다. 교실 두 칸을 헐어 만든 전시실은 소박하지만 그가 고통 속에서 남기고 간 진솔한 글들을 읽다 보면 ‘그의 글’이 곧 ‘그의 삶’이었음을 알게 된다. 젊은 시절 늑막염과 결핵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권정생은 한때 거지로 떠돌기도 했다. 노숙하며 떠돌던 시절에 그가 쓴 시 한 줄. “사람의 손이 만든/ 콩크리트 다리 밑/ 오늘 밤은 거기를/ 빌어 들었습니다/ 주님/ 어쩌면 이런 자리에/ 누추하게 함께/ 주무실런지요.”

그는 조탑동 마을의 교회 종지기를 하면서 빌뱅이 언덕 아래 거처를 마련했다. 거기서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글을 썼다. 10년 전 주인은 떠났지만 오두막집에는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누군가 놓고 간 꽃다발이 툇마루에 놓여 있다. 한겨울 삭풍만 드나드는 주인 없는 빈집에서 거기 살던 이가 남기고 간 정신의 자취를 더듬는다.

# 영덕의 대게, 그리고 오징어 풍어

▲ 경북 영덕의 강구항에서 새벽 경매를 위해 오징어 배가 정박했다. 강구항의 대게는 흉어지만 오징어는 요즘 그물이 찢어질 만큼 올라오고 있다.
상주∼영덕 고속도로 종착점인 영덕 얘기를 뒤로 미뤄둔 건, 따로 말해주지 않아도 고속도로에 오르면 어찌 됐든지 영덕까지는 가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영덕에는 대게가 있다. 크다고 해서 대게가 아니라 다릿마디가 대나무 같다고 해서 ‘대게’라고 부른다는 것도 다 아는 얘기. 12월 중순쯤부터 대게 철은 시작됐지만, 이제부터가 살이 차고 단단해지는 때다. 대게 명성의 출발은 누가 뭐래도 영덕이다. 대게의 주도권이 울진이나 포항 쪽으로 넘어간 건 기차역은커녕 고속도로도 없던 영덕의 아무래도 불편한 교통 탓이 컸다.

그러던 것이 상주∼영덕 고속도로가 놓이면서 영덕에는 제철 영덕 대게를 맛보러 오는 관광객들이 크게 늘었다. 영덕 나들목에서 대게 식당이 늘어선 강구항까지 차로 10분 거리가, 고속도로 개통 후 주말에는 30분 이상 걸린다. 하지만 아쉽게도 최근 대게 어획량이 격감했다. 하루 경매량이 반 토막이 났고 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최상품인 ‘박달대게’ 한 마리가 지난 주말에는 15만 원쯤 했다.

영덕은 대게로 이름났지만, 대게가 영덕의 전부는 아니다. 먹을거리만 해도 그렇다. 과메기의 집산지는 포항. 그러나 꽁치가 아닌 청어로 만든 ‘진짜 과메기’는 영덕에 있다. 강구항에서 북쪽으로 해안도로를 달리다 만나는 창포리 일대가 청어과메기로 이름난 곳이다. 해안도로 곳곳에 번들번들 기름이 나는 청어과메기가 말라가고 있다. 강구항의 오징어 배도 요즘 만선이다. 이른 새벽에 강구항에서 경매가 끝나면 상인들이 오징어를 삽으로 퍼내 리어카로 실어 나른다.

대게나 홍게 경매는 오징어 경매가 끝난 오전 8시 30분쯤 시작된다. 대게는 귀하지만 홍게는 바닥에 한가득이다. 강구항에서 매일 아침 벌어지는 경매는 일부러라도 찾아가 볼 만하다. 펄떡펄떡 뛰는 싱싱한 수산물을 구경하는 재미도 재미지만, 겨울 추위쯤은 아랑곳하지 않는 열띤 경매 현장에서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역동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 영덕서 만나는 ‘푸른 바다’와 고래

영덕의 해안을 따라가는 7번 국도를 가다 보면 한편으로 낯설고, 한편으로는 낯익은 이정표와 만나게 된다. 다른 지방이라면 ‘해안도로’쯤으로 적어둬야 할 이정표에다 ‘푸른 바다’를 적어놓은 것이다. 보통명사를 고유명사처럼 쓰는 것은 낯설지만, 표지판에서 직관적으로 연상케 하는 바다는 익숙하다.

영덕이 바다를 푸른 바다로 쓰고 있는 건 필시 해안 경관이 자랑스러워서인 듯하다. 영덕의 바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라면 강구항에서 북쪽으로 창포말등대, 경정해변, 축산항, 죽도산을 거쳐 고래불해수욕장까지 연결되는 20번 지방도로 구간이다. 푸른 바다에 딱 붙은 국도 옆으로는 영덕의 해안 도보길 ‘블루 로드’가 지나간다. 블루 로드의 하이라이트 구간은 축산면 경정리 차유마을에서 축산항의 죽도봉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거리는 3㎞쯤 되는데, 편도 1시간쯤 잡으면 넉넉하다.

영덕의 해수욕장이라면 단연 대진항 북쪽의 고래불 해변이다. 백사장 길이만 8㎞에 달하니 ‘고래’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고래불 해변의 압도적인 경관은 대진항 뒤편 영해 괴시리의 해발 183m 상대산 정상의 정자 관어대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 ‘볼 관(觀)’ 자에 ‘물고기 어(魚)’ 자를 편액으로 걸었는데, 고려말 학자이자 문신 목은 이색이 ‘바다에서 노는 고기를 볼 수 있는 곳’이란 의미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내친김에 상주∼영덕 고속도로가 지나는 명소 중에서 이즈음 찾아가면 좋을 곳들을 몇 곳 더 추려보자. 상주∼영덕 고속도로가 만나는 중앙고속도로 안동갈림목과 상주∼영덕 고속도로 종점인 울진 사이 딱 중간쯤에 청송나들목이 있다. 청송의 명소라면 두말할 것 없이 주왕산이다. 청송나들목에서 주왕산까지는 차로 20분 남짓이니 멀지 않다. 다른 산을 다 두고 엄동의 겨울에 청송의 주왕산을 추천하는 건 산 전체가 기기묘묘한 암봉으로 이뤄져 겨울 풍경이 다른 계절에 비해 전혀 못할 게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왕산 최고의 비경이 펼쳐지는 용추폭포가 오르막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평탄한 길 끝에 있다. 한겨울에도 구두를 신거나 유모차를 끌고서도 쉽게 다녀올 수 있을 만큼 길이 좋다. 알싸한 박하 향이 풍기는 평탄한 겨울 숲을 거닐며 웅장한 바위봉우리와 산세를 감상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더불어 송소고택을 비롯해 송정고택, 창실고택 등 고옥들이 늘어서 있는 청송의 덕천마을도 겨울철의 정취가 썩 훌륭한 곳이다.

의성의 고운사도 빼놓을 수 없다. 신라 말의 학자이자 문장가 최치원의 호를 절집의 이름으로 삼고 있는 고운사는 계곡에 나무기둥을 놓아 세운 이층누각 가운루의 정취도, 말갛게 단청이 지워진 유교식 건물 연수전의 품격도, 큰 소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절집 들머리의 정취도 훌륭하다. 의성에 고운사가 있다면 상주에는 남장사가 있다. 노음산 자락의 남장사 일대는 가을이 최고지만 겨울에도 산사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영양 땅에는 산해리오층모전석탑 말고도 모전탑 2기가 더 있다. 우리 땅에 남아 있는 모전탑이 모두 10기라는데, 그중 3기의 탑이 영양에 있는 셈이다. 산해리오층모전석탑에 이어 꼽을 수 있는 것이 삼지리모전삼층석탑이다. 산자락의 중턱쯤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탑은 암반 위에 굴러내린 큰 바위를 석탑 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석탑을 절묘하게 지어 올렸다. 현리에도 현이동모전오층석탑이 있다.

주왕산과 가까운 청송군 부동면 하의리의 청송주왕산관광지에는 ‘민예촌’이 있다. 전통방식의 한옥을 새로 지어 숙박을 제공하는 곳이다. 대감댁, 정승댁, 영감댁, 훈장댁 등 기와 한옥과 참봉댁, 생원댁 등 초가 한옥이 들어서 있다. 2인실 기준 1박 5만 원부터. 한옥이라 웃풍은 있지만 방바닥은 뜨끈하다. 민예촌 부근에는 청송·영양축협에서 운영하는 한우식당 ‘청하누’가 있다. 육질 좋은 한우를 비교적 싼값에 맛볼 수 있다.

울진의 대게 집산지는 강구항이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식당들이 빼곡한데 하나같이 ‘대게 전문’임을 내세우는 식당이다. 상차림이나 가격은 다 거기서 거기라 추천은 의미 없다. 대게는 가격이 말해준다. ‘10마리에 5만 원’이라며 호객하는 곳들도 있지만 그런 것들은 살이 차지 않은 것들이라 실망하기 십상이다. 살이 차고 맛있는 건 비싸다. 겉모양만 봐서는 모르지만, 식당 주인들은 귀신같이 알아낸다. 울진에서 대게만 찾지 말자. 대구갈비 강구직영점(054-733-9200)을 비롯해 수준급의 갈비를 내는 식당들이 강구항 인근에 여럿 있다.


상주·안동·의성·청송·울진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7년 1월 18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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