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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경남 창령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7. 11. 00:15

경남 창녕의 창녕박물관 앞 교동 고분군. 고분 앞으로 삘기 꽃이 하얗게 피어났다. 비사벌 가야의 땅이었던 창녕에는 곳곳에 가야시대의 고분들이 펼쳐져 있다. 모두 150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온 것들이다.


경남 창녕. 고대국가 비사벌 가야 땅이었던 그곳의 고분군에서 발굴되었고, 그 죽음을 되살려 복원한 한 소녀가 있습니다. 자그마치 15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가야시대의 열여섯 살 소녀 ‘송현이’입니다. 박물관에서 이쪽을 향해 손을 내민 자그마한 체구의 가야 소녀를 만났습니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된 저편의 시간을 만나러 가는 길. 창녕에서 만난 가야의 고분이 그랬고, 관룡산 기슭 반야용선의 바위 뱃머리에 앉은 돌부처도 그랬습니다. 고즈넉한 고분군, 그리고 새소리로 가득한 산기슭에는 오래된 시간 위로 다시 평화로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 1500년 만에 환생 가야소녀를 만나다

▲ 창녕 송현동 고분의 순장 무덤에서 출토된 인골을 실물 크기로 복원한 열여섯 살 가야 소녀 ‘송현이’. 창녕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경주에서 발굴된 신라 여성 유골의 얼굴 모습이 복원됐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다. 1500여 년 전에 이 땅에서 살았던 신라 여성. 그가 아득한 시간 저편에서 이쪽으로 건너와 생전의 갸름한 얼굴로 재현된 것이었다. 부서진 뼛조각을 복원하고 컴퓨터단층촬영(CT)을 이용해 3차원 스캔작업으로 되살려낸 신라의 얼굴은 과학기술에 대한 경탄에 앞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는 누구였고, 어떤 삶을 살다가 갔을까.

신라에는 유독 미인이 많았다. 당 태종이 모란꽃으로 비유했던 선덕여왕이 그렇고, 노인이 절벽에 핀 꽃을 꺾어다 바친 수로부인도 그랬으며, 유부녀였음에도 화랑 설원랑과 염문을 뿌렸던 미실도 지금으로 치자면 미스코리아 뺨치는 미모였으리라. 이름 없이 살다 간 신라 여성의 되살려낸 얼굴 위로 선덕여왕과 수로부인, 미실의 얼굴을 포개본다.

경주의 신라 여성 얼굴 복원 소식에 경남 창녕으로 향했던 건, 거기에 이번에 복원된 신라 여성의 ‘언니’격인 가야의 ‘송현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이는 열여섯. 키는 153.5㎝. 허리는 21.5인치. 창녕박물관의 전시실 유리 안쪽에서 목이 긴 미인형의 팔등신 송현이가 이쪽으로 오른손을 내밀고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송현이는 이번에 얼굴이 복원된 신라 여성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거나 혹은 그보다 앞서 살았던 가야의 소녀다.

창녕박물관의 송현이는 고고학과 법의학, 유전학, 해부학 등 첨단과학 연구기법을 총동원해 복제 뼈에다 근육, 피부를 복원하고 머리카락과 눈썹을 심어 전신상으로 재현해낸 소녀다. 사람의 실물 크기로 재현된 송현이는 컴퓨터로 만들어낸 신라 여성의 이미지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강렬하다. 그 앞에서 가장 놀라웠던 건 1500년이란 시간의 이쪽과 저쪽이 너무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동그란 얼굴의 송현이는 지금 당장 눈을 깜빡거리며 전시장 밖으로 걸어나온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또래 여고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 1500년 전 고분서 세상을 내려다보다

가야 소녀 송현이가 발견된 건 창녕박물관 뒤쪽 목마산 아래 송현동 고분이었다. 송현이란 이름도 40여 기의 고분이 있는 동네 이름인 송현동에서 따온 것이다. 송현이는 함께 순장된 다른 세 명의 유골과 함께 15호 고분에서 발견됐다. 순장이란 집단의 지배계급이 죽었을 때 그를 따르던 이들을 죽여 함께 묻는 풍습을 말한다. 지체 높은 이들은 죽어서도 자신을 섬길 몸종이며 시중들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송현이는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얌전히 누워 있었다. 독극물을 먹거나 질식사한 뒤 그곳으로 옮겨져 순장됐을 것이었다.

유골에 남아있는 의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이뤄진 조사에서 송현이는 정강이와 종아리뼈가 닳아있어 줄곧 무릎을 꿇는 생활을 했음이 드러났다. 아마도 송현이는 거대한 무덤의 주인공이 거느리던 몸종이었고, 주인이 죽자 살해돼 함께 묻힌 것이리라. 그런데 특이한 건 한쪽 귀에 금귀걸이가 걸려있었다는 것이었다. 몸종이라면 살아서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을 터이니 결국 원치 않는 죽임을 당한 뒤에야 금귀걸이를 거는 호사를 누렸던 셈이었다.

창녕박물관에서 송현이를 만났다면, 그가 나온 고분을 찾아가는 게 순서겠다. 옛 비사벌의 가야 땅이던 창녕에는 모두 세 개의 가야시대 고분군이 있다. 그 중 두 개가 창녕박물관을 끼고 있다. 박물관 앞쪽은 교동 고분이, 뒤쪽에는 송현이가 발굴된 송현동 고분군이 있다. 송현이가 나온 15호 고분은 박물관 뒤쪽 목마산 기슭에 있다. 절집 창화사를 끼고 목마산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가면 송현동 고분까지는 금방이다. 여러 고분 중에서 맨 뒤쪽의 산자락과 만나는 지점쯤에 가장 높이 솟아있는 무덤이 바로 송현이가 나온 고분이다. 그 고분 앞에 서면 창녕읍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여기야말로 가늠할 수 없는 깊이의 시간과 그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 그리고 지금 흘려보내는 시간이 서로 덧대지면서 갖가지 상념을 만들어내는 자리다.

창녕 일대 고분의 발굴에서는 수많은 유물들이 나왔다. 첫 발굴은 일제강점기이던 1918년 무렵에 이뤄졌다. 기록으로 보면 당시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이 마차 스무 대를 채우고, 기차 화차 두 대를 더 채웠는데 그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밀반출됐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오구라(小倉) 컬렉션’의 금동신발과 금동관모, 수레바퀴 모양 토기, 말 모양 토기 등이 모두 창녕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진다. 오구라 컬렉션이란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조선 최대의 전기회사를 운영하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한반도에서 수집한 1000여 점에 이르는 고고·미술 공예품을 말한다.

창녕 관룡산 기슭의 용선대. 수직 벼랑의 바위 위에 부처님이 앉아있다. 진리를 깨닫는 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배, 즉 불가에서 말하는 ‘반야용선’을 상징하는 형상이다.


# 극락정토로 가는 배가 관룡산에 있다

가야 소녀 송현이가 살았던 1500여 년 전. 그때의 자취가 창녕읍의 만옥정 공원에도 있다. 공원 한쪽의 비각 안에 어른 키 높이만 한 비석이 하나 서있다. 신라가 창녕지역의 비사벌 가야를 무너뜨리고 병합한 뒤 진흥왕이 일대를 들러봤던 561년 무렵에 세워진 진흥왕 척경비다. 비석에는 진흥왕의 업적과 함께 왕의 창녕 방문에 수행했던 신하 마흔 명의 이름을 새겨 두었다. 무디고 단단한 이 비석이 새삼 실감나게 느껴지는 건, 가야 소녀 송현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야 소녀의 죽음과 그 죽음을 되살려놓은 밀랍인형 앞에서 비석은 역사책 속의 딱딱한 연표가 아니라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으로 생생하게 읽히기 때문이다.

창녕 땅에서 압도적인 경관과 함께 묵은 시간을 볼 수 있는 또 한 곳이 바로 관룡산 아래 용선대에 있다. 관룡산 아래 짙은 숲속에 들어선 절집 관룡사에서 20분쯤 산을 오르면 수십 길 낭떠러지의 바위벼랑인 용선대가 있고, 그 바위 위에 1.8m 높이의 돌로 지은 불상이 홀로 앉아있다. 뒤로 물러서 보자면 마치 바위로 지은 배의 뱃머리에 부처님이 앉아 있는 형상이다. 용선대가 보여주는 건 불가의 법화 신앙에서 고통의 세상을 건너 극락정토로 항해한다는 ‘반야용선(般若龍船)’의 모습에 다름아니다. 용선대의 석불과 까마득한 벼랑 아래 마을들과 어우러져 펼쳐지는 풍경은, 장엄한 느낌에 절로 옷깃이 여며질 정도로 극적이다.

용선대에 석불이 조성된 건 9세기 초반 무렵이다. 한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당시에 저 무거운 석불을 어찌 사람의 손만으로 이 높은 산자락의 바위 위에 올려두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석불의 돌은 화강암이지만 관룡산 바위 재질과 다르다. 여기서 새긴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새겨서 가져온 것이란 얘기다. 용선대 아래 절집 관룡사에서 만난 주지 스님은 ‘석불을 산 위까지 끌고 오르게 한 건 믿음이 아니라 노역’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가야 땅을 점령한 신라는 왕실의 위엄과 통치를 위해 용선대 위에 석불을 조성하는 대공사를 벌였을 것이고, 일대의 주민들이 이 석불을 산 위로 옮기는 고된 노동에 동원됐을 것이란 얘기였다. 등산로가 놓인 지금에도 제 한 몸 가누기 힘든 산길을, 저 무거운 석불을 끌고 밀고 올라갔을 고된 노역의 풍경 위로 죽임을 당하고 무덤에 순장된 송현이의 얼굴이 겹쳐졌다.

# 삼대(三代) 지나도 잊어지지 않은 선행

창녕읍 한복판에는 용선대 석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술정리 동(東)삼층석탑이 있다. 술정리에 탑이 두 개 있는데, 그 중에서 동쪽에 있는 탑이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석탑은 번잡한 시장 아래쪽의 민가 주변에 서 있지만, 이래 봬도 국보다. 용선대 석불이 보물인데, 가치로 치자면 이 탑이 한 수 위인 셈이다.

탑은 비례가 탁월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형태인데, 윗부분은 사라지고 없지만 처마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간 날렵한 지붕돌이 그려내는 선이 압권이다. 이 석탑은 낮보다는 밤에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마침 달빛 은은한 날 밤이라면 금상첨화겠다. 조명은 석탑의 선과 전체적인 윤곽이 한층 도드라지게 만든다. 어둠을 밝히는 은은한 조명 속에서 탑신이 하얗게 떠오르는 모습이라니….

술정리에 동탑이 있으니 서탑도 있다. 술정리 서삼층석탑이다. 서탑은 동탑과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위세와 아름다움에 비하면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그럼에도 서탑을 동탑과 함께 보아야 하는 까닭은, 탑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외관으로 보면 서탑과 비슷해 보이는 동탑의 기품과 아름다움이 과연 어디서 나오는지를 비교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대지면 용소리의 마을안쪽 길 앞에 세워진 ‘진만석 영세불망비’까지 가보자. 이 비석은 300년 전쯤 자헌대부 벼슬을 지낸 진만석의 송덕비다. 대개 송덕비는 그 취지와는 다르게 백성의 뜻과 관계없이 벼슬아치들이 제 스스로 세운 이른바 ‘관제(官製)’가 보통인데, 이 송덕비는 백성들이 스스로 세운 자선비다.

진만석은 개간사업으로 창녕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는데, 조선 경종 때 흉년이 들자 굶주린 이들에게 곡식을 나눠주었고, 관가에서 곡식을 빌렸으나 갚을 길이 막연한 농민의 딱한 사정에 돈으로 대납해주기도 했다. 집안에서 세금을 못내 노비가 된 처녀를 위해서는 세금을 대신 내주고 평민으로 돌아가게 하기도 했다. 이런 내력이 알려지자 영조 때 자헌대부라는 벼슬을 받았고, 주민들은 공덕비를 세웠다. 그러나 송덕비가 화재로 불타자 80년이 지난 뒤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거둬 자리를 옮겨 세운 것이었다. 기록을 뒤져보면 당시 창녕읍의 마을 주민 4983호에서 공덕비를 옮기기 위해 갹출한 돈이 149냥 4전 9푼이었다. 얼마나 고마운 마음이었으면 거의 3대(代)가 지난 뒤에도 마을 주민들이 손수 돈을 거둬 비를 옮겨 세웠을까. 옮겨 세운 비석은 소박하고 허름하지만, 그 앞에서 가진 이의 배려와 그 배려를 잊지 않았던 백성들의 마음을 읽는다.

창녕은 다른 지역보다 모내기가 늦다. 논에 양파를 심어 거둔 뒤에야 벼를 심기 때문이다. 지금 창녕의 너른 들에는 양파수확이 한창이다. 논마다 쌓여있는 양파망의 붉은색이 독특한 느낌을 준다.


# 우포늪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만나는…

역사와 시간을 찾아 나서는 바람에 뒤로 밀리긴 했지만, 창녕이라면 첫손으로 꼽히는 곳이 바로 우포늪이다. 우포늪의 생성은 가깝게는 6000년 전, 멀게는 1억400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감히 인간의 계산으로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저편의 일이다. 우포늪은 해수면이 상승하고 낙동강이 범람하면서 만들어졌다. 강의 범람이 없는 지금도 우포늪이 마르지 않는 건 토평천 물줄기가 습지에 끊임없이 물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포늪은 풍부하고 다양한 생명이 깃들어 사는 생태적 가치로 인정받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빼어난 경관자원을 품고 있는 곳이다. 관광객들은 대개 원시림을 이룬 수변의 왕버드나무 숲과 너른 늪지를 가득 메운 수생식물들, 그리고 철마다 날아드는 철새들이 보여주는 경관을 기대하고 우포늪을 찾는다. 관광객들에게는 우포늪은 아직까지 생태자원이라기보다는, 경관자원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한데 묶어서 불리고 있지만, 사실 우포늪이란 우포와 목포·사지포·쪽지벌 등 4개의 늪을 한데 이르는 말이다. 네 개의 습지로 이뤄진 우포늪은 다른 관광지와는 달리 표지판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진면목을 만날 수 없다. 우포를 다녀와서 실망했다면 십중팔구 이렇게 관광지 안내판만 보고 찾아간 경우가 대부분이다. 습지체험 프로그램을 신청해 안내를 받거나 충분한 시간을 두고 4개 코스로 이어지는 우포늪 둘레길을 걷는 것이 우포를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만한 시간 여유가 없다면 차량 내비게이터에 ‘이방면 옥천리 541번지’를 입력하고 찾아가 보자. 차가 데려다 주는 곳이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일출 사진을 찍기 위해서 찾아가는 자리다. 길 옆의 공간에 차를 세우고 언덕을 잠깐 오르면 우포늪 일대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가 있다. 되도록 이른 아침에 이 자리에 서면 왕버드나무와 사초군락, 그리고 습지식물의 초록 융단으로 뒤덮이기 시작하는 우포 일대의 모습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운이 좋다면 물안개가 피어나는 몽환적인 풍경을 만날 수도 있다. 차를 세워둔 자리 바로 앞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면 키보다 훨씬 큰 사초군락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이른 아침 이 길을 걸으면 사초 이파리에 맺힌 싱그러운 이슬로 온몸이 흠뻑 젖는다.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 여주갈림목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창녕나들목으로 나간다. 창녕IC사거리에서 창녕 방면으로 좌회전해 오리정사거리에서 직진, 다시 송현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가야 소녀 ‘송현이’가 전시돼 있는 창녕박물관이다. 박물관 앞쪽으로 교동고분군이, 뒤쪽으로는 송현동 고분군이 펼쳐져 있다. 창녕박물관에서 절집 관룡사까지는 직선거리로는 5㎞ 남짓이지만, 구현산과 화왕산의 기슭으로 돌아 들어가야 하는 까닭에 차로 30분 정도 걸린다. 관룡사에서 용선대까지는 등산로를 따라 걸어 오르는데 600m가 채 안 되는 거리라 20분이면 넉넉하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창녕읍내에는 이렇다 할 숙소가 없다. 한 식당 주인은 숙소를 묻는 질문에 ‘70년대식 여관’임을 감수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다. 창녕군에서 운영하는 화왕산자연휴양림(055-533-2332)이나 우포늪 인근의 우포생태촌 유스호스텔(055-532-5500)을 추천한다. 휴양림은 4인실이 비수기 5만 원, 성수기 및 주말이 7만5000원이다. 유스호스텔은 3인실이 주중·주말 관계없이 5만 원을 받는다. 부곡온천에는 온천욕을 겸할 수 있는 호텔들이 여럿 있다. 창녕읍에는 이렇다 할 맛집도 없다. 현지 주민들은 너나없이 창녕의 명물로 수구레국밥을 꼽지만, 소 껍질가죽 안쪽에서 떼어낸 수구레의 질깃한 식감과 냄새를 없애려 넣은 카레 향 때문에 외지사람이라면 열에 여덟쯤은 입맛에 맞지 않는다. 창녕시외버스터미널 뒤쪽의 ‘부생 밀면 고기집’(055-533-0392)의 밀면이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창녕 = 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6년 6월 15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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