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족은 한민족의 조상인가.'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 내에 있었나.'
고대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뜨겁다. 조선일보는 우리 고대사의 연구 현황을 소개하는 시민강좌를 열고 있는 한국고대사학회(회장 이강래 전남대 교수)와 함께 핵심 쟁점을 짚어보는 공동기획을 마련했다. 강좌는 지난 9일부터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서울 올림픽공원 내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개최된다. (02)2152-5800
동이(東夷)는 고대 중국에서 동방의 이민족을 낮춰 부르던 호칭이다. 초기에는 서이(西夷), 남이(南夷) 등의 호칭도 있다가 한나라 이후에는 동이, 서융(西戎), 북적(北狄), 남만(南蠻)으로 방위에 따라 구분하게 되었다. '이(夷)'는 상나라 갑골문에서부터 '尸'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尸·夷)의 뜻에 대해선 '죽은 사람' '키 작은 사람' '꿇어앉은 사람' 등 설이 다양하지만 기본적으로 주변 이민족을 낮춰보는 중화주의가 내포되어 있다.
상(商)나라와 주(周)나라는 그 동방인 중국 산동반도와 강소성 북부에 분포하던 우이(嵎夷), 래이(萊夷), 회이(淮夷) 등의 이민족을 묶어 동이라고 통칭하였다. 동이를 포용했던 상과 달리, 주는 동이를 대대적으로 공략하였는데, 주가 제(齊)와 노(魯)의 제후를 세운 것도 동이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동이가 제의 영역에 편입된 것은 전국시대였지만 그 정체성은 전국 말까지 이어졌다.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 시황제가 제를 정복해 중국이 통일된 후 산동 지역은 동이 지역으로 인식되지 않게 되었다. 산동의 동이는 중국의 민호(民戶)가 되었고, 대신 가장 동쪽의 중국 군현인 요동군 동쪽의 세력이 동이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부여·고구려·예·옥저·읍루·삼한·왜인 등이 바로 새로운 동이였다. 우리 민족이 동이와 관련되어 언급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중국 역사서에서 우리 민족이 동이의 범주에서 서술된 것은 '한서(漢書)'부터였다. '동이 예의 군장 남려(東夷濊君南閭)'가 위만조선 우거왕을 배반하고 한의 요동군에 투항했다(기원전 128년)는 것이다. 예는 예맥(濊貊)이라고도 표기되었는데 고조선의 근간이 된 종족이었다. '사기(史記)'에서 위만조선을 가리켜 '예주(濊州)'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조선의 예맥족은 삼한의 한족(韓族)과 함께 우리 민족의 근간이 되었다.
기원전 2000년대 후반 산동반도의 진주문(珍珠門) 문화는 악석(岳石) 문화를 계승한 대표적인 청동기 문화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 요동반도의 청동기문화인 쌍타자(雙駝子) 문화와 비교해 보면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보인다. 산동에서는 민무늬의 다리가 셋 달린 토기가 주종이며, 요동에서는 지(之)자 무늬나 줄무늬가 있는 바닥이 평평한 토기가 주종이다. 산동에서는 지하에 구덩이를 판 움무덤이, 요동에서는 고인돌과 돌널무덤 등 돌무덤이 주로 만들어졌다. 이들 돌무덤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은 중국식 동검과 전혀 다른 형태여서 '요령식 동검'이라고도 불린다. 이런 차이는 두 지역의 주민이 동일 계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선진(先秦) 시기의 동이는 산동 지역의 여러 이민족에 대한 통칭이며 특정 종족에 대한 지칭이 아니었다. '삼국지'의 동이는 예맥족뿐 아니라 삼한의 한족, 읍루, 왜인까지 포괄한 개념이었다. 부여·고구려·예·옥저가 말이 통한 것과 달리 읍루는 말이 달랐다. 일본 열도의 왜인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처럼 동이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 투영된 주관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이며 시기에 따라 그 대상이 바뀌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충주고구려비에서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라고 불렀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신라는 또 다른 동이였던 것이다.
박대재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