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석 한국전통문화대 교수(오른쪽)와 최영재 천양P&B 대표가 지난달 5일 전북 완주군 천양P&B의 한지 제조장에서 물에 푼 닥섬유를 만지며 전통 한지 복원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완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3대째 한지를 만들어 온 최영재 천양P&B 대표(50)가 종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직접 만들면서도 ‘한지가 좋다’는 말을 쉽게 할 수가 없었어요. 보푸라기 때문에 붓이 제대로 나가지도 않고 인쇄기에 넣을 수도 없는 무거운 종이였는데… 이제는 알겠어요. 옛날부터 고려지 조선지를 왜들 그렇게 찾았는지….”
닥섬유를 방망이로 두드려 편 뒤(사진[1]) 황촉규 뿌리 진액을 함께 넣어 닥물로 풀어내고 발로 떠내는 과정(사진[2])을 거쳐야 1차로 종이가 만들어진다. 이후에도 종이를 자연 건조하고(사진[3]) 풀을 먹이며 두드리는 도침 과정(사진[4])을 거쳐야 최상급의 한지가 완성된다.
지난달 5일 전북 완주군의 한지 제조업체 천양P&B를 찾은 이유는 2015년 말 행정자치부의 발표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맥이 끊긴 민족 정통성 있는 한지 재현.’ 행자부는 재현에 성공한 전통 한지를 앞으로 훈장용지에 쓰겠다고 밝혔다. 주변의 문구점에만 가도 한지가 쌓여 있는데 무엇을 재현했다는 것일까.
재현 작업의 중심에 섰던 김호석 한국전통문화대 교수(59)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우리가 써왔던 한지는 상당수가 가짜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통째로 일본식 한지로 바뀌었는데 무엇이 진짜 한지인지를 몰랐던 거죠. 진짜 한지는 어떻게 만드는 건지 보실래요?”
전통 한지는 1년생 닥나무의 껍질로 만든다.
이 백피를 말린 뒤에 천연잿물에 삶는다. 그리고 흐르는 물로 씻어내면서 일광(日光) 표백을 하고 티를 골라낸다. 하얀색 닥섬유가 만들어지면 돌 위에 올려놓고 나무 방망이로 수없이 두드려야 한다. 고해라고 부르는 작업이다. 장인들이 “골병든다”고 하는 고된 일이다. 고해를 마친 섬유를 물에 잘 풀어서 발로 떠내면 한지가 된다.
물론 섬유가 물에 그냥 풀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떠낼 수도 없다. ‘닥풀’이라고도 불리는 황촉규 뿌리를 짓이겨 얻은 진액을 분산제로 넣는다. 섬유질이 잘 풀어지도록 하는 역할이다. 이 닥풀이 영하의 날씨에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한지는 겨울에 만든다.
발로 종이를 뜨는 작업은 온전히 한지 장인의 몫이다. 섬유가 풀려 있는 닥물을 넓은 발 위에서 앞뒤 좌우로 흘려내면서 떠내면 습지가 된다. 섬유가 남고 물기가 빠져나간 상태다. 이 습지를 여러 장 겹친 뒤에 말리면 한지가 1차 완성된다.
아직 삶지 않은 닥나무를 보여준 뒤 나무 방망이로 퍽퍽퍽 닥나무 섬유를 두드려 보이던 최 대표가 발을 잡고 닥물을 흘려내며 종이를 떴다. 두 차례 습지를 떠내 맞붙인 최 대표는 “견본으로 떴지만 그래도 이건 진짜 한지”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 사라진 ‘진짜 한지’
이렇게 천연 재료만 써서 장인의 손으로 한 장 한 장 떠온 한지는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다른 전통 문화처럼 그 명맥이 끊겼다. 김 교수는 “조선총독부의 공식 문서 등을 통해서 전통 한지 제조 방식이 조선식에서 일본식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일본이 닥나무를 칼비터라는 일종의 믹서로 자르고 또 펄프를 섞어 쓰라는 등의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일본과 달리 한국의 닥나무는 길고 질긴 섬유가 특성이고 장점이다. 그래서 힘이 들어도 나무 방망이로 닥나무를 때려서 섬유를 풀고 한지를 떠냈다. 이 닥나무 섬유를 잘라버리면 닥나무를 쓰는 의미가 사라진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제작 방식을 바꿔서라도 자신들이 써온 화지(和紙)처럼 잘 번지는 종이를 만들어 내길 원했다.
새로운 기술이 들어오면서 백피 삶는 방식도 바뀌었다. 메밀대 콩대 고춧대 등을 태워서 만든 천연잿물로 백피를 풀어내던 전통 방식에 양잿물이 끼어들었다. 만들기 어려운 천연잿물 대신 양잿물을 쓰면 작업은 훨씬 편해진다.
하지만 양잿물을 쓰면 닥나무 섬유는 잔털이 다 녹아내린다. 거칠고 딱딱해져 종이의 밀도가 떨어진다. 닥나무를 칼로 다 잘라버리고 양잿물까지 쓴 것은 한지의 질긴 특성을 빼앗은 주원인으로 드러났다.
김 교수는 “칼비터를 쓰거나 양잿물을 쓰는 순간 한지는 더이상 한지가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종이를 뜨기 전에 섬유를 풀어내는 해리 작업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황촉규 닥풀을 쓰던 방식이 팜유 등을 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바뀐 제조 방식은 한지의 개념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 전통 한지 제조법의 맥이 끊기면서 ‘무엇이 전통 한지냐’는 개념마저 사라진 것이다. 재현 작업에 나서면서 국내 한지업체의 현황을 살펴봤을 때의 상황은 이런 문제를 잘 보여준다.
한지의 재료인 닥나무에서부터 지역별 특성이 사라졌고 외국산이 국산처럼 쓰이기도 했다. 닥을 삶을 때는 화학잿물과 천연잿물을 쓰는 경우가 섞여 있었고 힘든 두드림(고해) 작업 대신 닥섬유를 잘라 작업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두드림 작업 뒤에 유수 표백을 하는 곳도 찾기 힘들었다. 종이를 떠내는 작업 역시 닥물을 전후좌우로 흘리는 ‘외발뜨기’ 대신 닥물을 가둬놓은 채 편하게 진행하는 ‘가둠뜨기’가 대부분이었다. 모두 한지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요인들이었다.
정조의 친필 편지 오려내 만든 ‘한지의 기준’
행자부와 김 교수가 지난해 6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복원 작업은 전통 한지의 개념을 새로 세우고 한지 제조의 기준을 표준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각자 알고 있는 전통 방식을 사용해 한지를 제작하는 몇몇 장인(匠人)의 노하우와 기억을 서로 짜 맞추고 옛 문헌까지 참고해 온전한 전통 한지 제작의 비법을 복원했다. 한지 장인 인터뷰와 업체별 제조 기법 발표회 등이 함께 진행됐다.
복원의 시작은 ‘기준 잡기’였다. 어떤 수준의 한지를 목표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고민 끝에 최종적으로 선정된 표본은 김 교수가 소장하고 있던 정조(正祖)의 편지였다. 세자 시절 스승 채제공에게 보낸 어찰. 조선의 부흥기에 왕이 사용한 종이야말로 최상급의 한지로 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문화재급 유물이었지만 글씨가 쓰여 있지 않은 여백의 일부를 오려내고 내절강도 등을 측정한 뒤 복원했다. 이 종이의 내절강도는 3525회. 3500회가량 접었다 펴야 종이가 끊어진다는 뜻이다. 기존에 쓰던 훈장용지의 내절강도(약 300회)에 비해 10배 이상의 강도를 가진 종이였던 것이다.
문헌 조사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천연잿물과 함께 생석회를 널리 사용했다는 사실과 두드림 과정에서 닥섬유가 달라붙지 않는 고욤나무 방망이를 이용했다는 세세한 사실이 드러났다. 한지를 뜨는 발 역시 대나무발이 아니라 억새, 띠 등으로 만든 촉새발이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닥섬유를 흐르는 물에 일광 표백할 때 닥섬유 사이의 수소결합이 촉진돼 전통 한지 고유의 흰색이 만들어지는 과학적인 원리도 규명됐다.
전통 방식 복구하고 새 도침 기법 완성
국산 닥나무만 사용할 것. 백피는 천연잿물로 삶을 것. 닥섬유를 칼로 자르지 말고 나무 방망이로 두드릴 것. 닥섬유를 흐르는 물에 일광 표백할 것. 황촉규 같은 식물성 분산제를 사용할 것. 가둠뜨기가 아닌 외발뜨기로 종이를 뜰 것….
어떻게 만들어야 진짜 전통 한지인지에 대한 자세한 기준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세워졌다. 한지 장인들이 쓰던 방법도 있고 알지만 쓰지 못하던 방법도 있었다. 그 누구도 방법과 의미를 몰랐던 것도 있었다. 이 방법을 서로 공유한 업체 12곳이 ‘훈장용지 업체 선정’에 도전했다. 합격점을 받은 곳은 천양P&B를 비롯한 5곳. 김 교수는 “안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고 말했다. 나무 방망이로 두드리는 고해 작업은 뻔히 알면서도 포기하고 싶은 힘든 작업이고 외발뜨기는 장인의 솜씨가 집약돼야 가능하다.
공유한 제조 방식 중에는 한지 업체 모두가 반긴 마지막 비결도 있었다. ‘도침’이라고 부르는 마무리 작업이다. 도침은 다 만들어진 한지에 풀을 먹이고 디딜방아로 찧어서 표면을 매끄럽게 하고 밀도를 높이는 과정이다. 달군 금속을 두드려 강하게 만드는 단조 공정과 비슷하다.
질기고 두껍지만 보풀이 많이 일어 서화용이나 인쇄용으로 사용하기 힘든 한지는 이 과정을 거쳐서 비로소 최고의 종이로 완성된다. 이날 겨울바람에 말라가고 있던 한지도 풀을 얇게 바른 뒤 두 차례 찧어서 도침질까지 마친 종이였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제대로 된 방법이 전하지 않던 도침은 김 교수가 전통장판지 등에 풀을 먹여 밀도를 높였던 기술을 응용해 재현에 성공했다. 동양화가이면서 복원 작업을 이끈 김 교수는 동양화 작업을 할 종이를 30년 넘게 직접 만들어 썼다. 도침 역시 스스로 장인들의 작업 과정을 채록해 자신의 종이에 활용해 왔다.
김 교수는 “문헌을 보면 한지 제조 인력과 같은 수의 인력이 디딜방아로 도침질을 한 것으로 나올 정도로 핵심 기술”이라고 얘기했다. 최 대표도 “전통 한지를 어떻게 만드는지는 알고 있지만 제대로 만드는 것에 도전하지 못한 것은 도침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품질 좋은 한지에 아교나 전분을 바르거나 화학약품으로 코팅하는 시도를 해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보풀을 잡지 못하면 아무리 질긴 한지를 만들어도 쓸모가 없다.
“최고급 서화용지 복원용지로 우뚝 설 것”
이렇게 복원한 전통 한지는 올해부터 정부의 훈장용지로 쓰인다. 훈장은 한지 복원의 출발점이었다. 김 교수는 “왜 정부가 국가유공자에게 준 훈장이 몇십 년도 가지 못해 색깔이 변하는지가 이번 복원의 단초가 됐다”고 설명했다. 복원이 행자부 주관으로 진행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힘들게 복원하고 기술을 표준화한 한지가 훈장용지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최고급 서화용지와 복원용지로의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중국에서는 과거의 ‘고려지’를, 유럽에서는 예술 작업용 ‘파인아트지’를 꾸준히 찾고 있지만 그 정도 수준의 한지를 공급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며 “이번에 만든 한지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보풀을 잡고 인쇄기에 넣을 수 있는 한지를 만드는 길이 열린 덕택이다. 한지는 특유의 보존성 때문에 오래된 문서를 복원할 때 쓰이는 복원용지 영역에서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아직 남은 과제도 있다. 한지의 기준을 만들었지만 이것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나무 방망이로 닥섬유를 때려가면서 천연 재료로만 한지를 만드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 더 쉬운 길로 빠지려는 유혹을 계속 이겨내야 한다. 지금 한지를 뜨는 대나무발을 촉새발로 교체하는 일은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촉새발 제작 기술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겨울바람 맞고 바스락거리며 마르고 있는 한지를 어루만지며 김 교수가 말했다. “자연을 손으로만 다듬어서 만든 종이예요. 수천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삶을 담아내다가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이 종이를 다시 살려내는 데 꼬박 70년이 걸렸네요.”
▼“고려의 종이는 銀처럼 빛나네”… 中 문인들 감탄▼
‘동아시아 최고의 종이’로 꼽힌 고려지-조선지
중국 명나라 말기 서화가로 이름 높은 동기창(董其昌)의 명작 ‘강산추제도(江山秋霽圖)’ 한쪽에는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다. 그림 속의 산세가 잦아들고 강 자락이 넓어지는 자리에 찍힌 도장은 이 종이가 조선 왕실이 중국 황실에 보낸 종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종이는 중국의 발명품이었지만 동아시아 최고의 종이는 고려지, 조선지로 불리던 한지였다. 중국 사람들은 한지를 ‘금령지(金齡紙)’라고 부르기도 했다. ‘황금과 같이 변하지 않고 오래가는 종이’라는 뜻이다.
동기창뿐 아니라 소동파와 황정견 등 당대의 시인 묵객 상당수가 한지를 애호하고 예찬했다. ‘강산추제도’에 “고려의 표지가 은처럼 빛난다(高麗表紙光如銀)”는 발문이 달리기도 한 것처럼 특유의 매끄러움과 부드러운 먹 번짐이 장점이었다.
이와 더불어 한지의 가장 돋보이는 강점은 보존성이다. 8세기 초중반 간행된 것으로 알려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호)이 증명하는 것처럼 한지는 1000년 이상의 보존성을 자랑한다. 화학 처리 없이 천연 재료만을 가공해 만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완주=김도형 기자 dod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