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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原 땅 한가운데 칠층탑 하나, 석양에 침묵한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1. 15. 22:54
 中原 땅 한가운데 칠층탑 하나, 석양에 침묵한다
  • : 2016.01.13 10:39

[충주 역사 순례와 '기와 검사' 유창종]

입석마을에 서 있던 옛 비석, 국내 유일 고구려비로 밝혀져
역사 애호가인 검사 유창종… 답사모임 만들어 비석 발견해
"역사에서 배운다" 평생 수집한 기와 1873점 국립박물관에 전부 기증

박종인의 땅의 歷史 로고 이미지

입석마을 이야기

"금의환향하겠다"고 고향을 떠났던 김재문은 1967년 12년 만에 귀향했다. 고향 입석마을은 가난하고 구질구질하게 산다고 천대받던 마을이었다.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에 있다. 쌀 대신 고추를 심고 외상으로 모래땅 사서 하우스 농사 지어서 팔았다. 올빼미처럼 밤에도 일했다. 1969년 가을 고추 800근을 팔았더니 쌀 100가마보다 소출이 좋았다. 땅값도 갚고 집도 잘살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김재문을 이장으로 뽑았다. 아이들은 꽃밭을 가꾸고, 여자들은 모래와 자갈을 나르고, 남자들은 시멘트 먼지를 뒤집어쓰고 다리를 세우고 하수구를 만들었다. 1972년 8월 15일 광복절 날, 입석마을이 새마을운동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나흘 뒤 단군 이래 최악의 홍수가 남한강 유역을 덮쳤다. 쉰한 집 가운데 스물한 집이 물에 잠겼다. 갓 세운 다리 두 개와 하수구, 농로도 사라졌다. 논과 밭 80%가 떠내려갔다. 고난 극복 이야기는 생략하자. 4년 뒤인 1976년 3월 마을은 재건됐다. 다리와 하수구와 농로와 논밭은 복구됐다.

입석마을 기적은 마을 사람들이 만든 기적이었다. 기적을 만든 사람들은 큰 비석에 '七顚八起(칠전팔기)의 마을'이라 새긴 뒤 정체불명의 고비(古碑)가 서 있는 입구에 세웠다. '입석(立石)'이라는 마을 이름은 이 고비에서 유래했다. 그날 마을 여자 정순택이 고비 위에 백설기를 얹고서 고사를 지냈다. 기적은 쉽게 찾아오지 않지만 쉽게 끝나지도 않았다.

충주 고구려비를 발견한 유금와당박물관장 유창종과 고구려 귀면기와 사진 

 

충주 고구려비를 발견한 유금와당박물관장 유창종. 왼쪽은 고구려 귀면기와.

 

3년이 갔다. 서른네 살 먹은 청주지방검찰청 충주지청 검사 유창종이 동료들과 함께 마을을 찾았다. 1979년 2월 24일 석양 무렵이었다. 사흘 전 정순택이 고사를 지내고 간 백설기가 고비 위에 하얗게 얹혀 있었다. 사각(斜角)으로 비치는 햇빛 속 비석을 살펴보다가 일행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글자다!" 지금은 충주 고구려비라 개칭된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기적처럼 발견된 순간이었다.

아주 복잡했던 먼 옛날 중원 땅


남한강변 충주 일대를 통칭 중원(中原)이라 한다. 한강 뱃길과 육로와 기름진 평야와 철광산을 차지하려고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살벌한 전쟁을 벌였다. 중원 전쟁사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어야 한다.

371년 평양으로 진군한 백제 근초고왕이 고국원왕을 죽였다. 396년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 한성에 쳐들어가 아신왕을 무릎 꿇렸다. 백제와 임나가야, 왜 연합군이 고구려와 신라에 복수전을 펼치자 광개토왕은 연합군을 패퇴시키고 내친김에 신라와 임나가야까지 쳐들어갔다. 475년 장수왕이 한성에서 백제 개로왕을 죽였다. 한강 유역은 고구려 땅이 되었다. 481년 장수왕은 신라 북쪽을 차지한 뒤 중원에 국원성을 설치했다.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합동복수전을 벌여 백제는 한강 하류를, 신라는 죽령 이북을 차지했다. 고구려 장수 온달은 죽령 이북을 수복하겠다고 이를 갈다가 590년 단양에서 신라군 화살에 죽었다. 진흥왕은 단양에 적성비를 세웠다. 내용은 "협조하면 상을 준다"였다. 진흥왕은 곧바로 칼을 백제로 돌려서 한강 하류를 빼앗고 북한산에 순수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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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중앙탑면 탑평리에 있는 국보 제6호 7층 석탑. 석양 내린 석탑에 두 스님이 경배를 한다. 중원 땅이라 부르는 충주 일대는 고구려비 발견으로 그 수수께끼가 조금씩 풀려나갔다. /박종인 기자

 

신라는 훗날 국원성을 중원경으로 개칭했다. 고려 때는 예성이라고도 했다. 신라는 강변에 절도 지었고 귀족들 공동묘지도 만들었다. 절은 사라졌지만 절에 있던 칠층석탑은 위풍당당하게 남한강을 굽어본다. 전설에 따르면 통일신라 경덕왕이 걸음 속도가 똑같은 사내 둘을 신라 땅 남과 북에서 중앙으로 걷게 해 그들이 만난 곳에 탑을 세웠다. 그래서 탑 이름이 '중앙탑'이라고 했다. 국보 제6호인 탑 주변은 훌륭한 산책 코스다.

탑에서 자동차로 남쪽 10분 거리에 신라 귀족들 무덤, 누암리 고분군이 있다. 북쪽으로 10분을 가면 입석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는 고구려비전시관이 있다.

검사와 답사 모임 예성동호회


1945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난 유창종은 지금 아내 금기숙과 함께 서울 부암동 '유금와당박물관' 공동관장인데, 그 전에는 검사였고 어릴 적에는 교과서를 철석같이 믿는 모범생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4·19 학생혁명이 터졌다. "선거로 뽑은 대통령을 물러가라고 데모하는 대학생 형들을 왜 착하다고 하는가?" 담임이던 수학교사 박수철이 이 당돌한 아이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도시락을 두 개씩 싸와라." 선생은 방과 후 아이에게 역사를 가르쳤다.

새벽 두시에 일어나 바늘로 허벅지를 찌르며 공부한 끝에 대전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더니 5·16 군사쿠데타가 터졌다. 4·19보다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생들에게 또 질문했지만 "공부나 해서 성공하라"며 혼쭐만 냈다. '성공? 데모 잘하는 고려대를 가려 했는데 육사를 가야 하나?' 답을 주지 않으니 스스로 찾겠다고 작정했다.

시내 고교생들을 모아 철학 서클을 만들었다. 이름은 '한다발 철학'. "남녀 간 우정이 존재하나"라는 유치한 질문부터 우주의 근원까지 자문하고 자답했다. 인생 진로도 자문자답했는데, 서클 회원들은 유창종 인생 진로를 서울대 법대로 정해줬다. 유창종이 말했다. "어린 마음에 모두 좋은 세상을 위해서는 먼저 깨인 사람들이 희생하고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원들이 정해준 대로 서울 법대에 들어가서도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다. 검사가 된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1978년 2월 청주지검 충주지청으로 발령이 났다. 그해 식목일 아내 금기숙과 함께 부여에 있는 골동품상에 들러서 민화를 구입하고 기와 두 점을 개평으로 받았다.

어릴 적부터 역사에 관심이 있던 터라, 삼국이 쟁패했던 중원 땅에 발령나니 그 역사가 궁금했다. 그래서 역사 답사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해 8월 5일 중앙탑 앞에서 주운 와당 한 조각에 그만 이상한 인생길이 활짝 열렸다.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 특성이 와당 하나에 조합돼 있는 게 아닌가. 청자며 백자는 언감생심인데 개평으로도 주는 와당에 이렇게 역사가 적혀 있으니, 얄팍한 평검사 봉급에 수집품으로는 딱이었다. 유창종은 "검사 직업에 충실하게, 역사를 추리하면서 답사를 다녔다"고 했다. 답사지 선정도 범죄집단 훑듯이 충주를 열두 지역으로 나눠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9월 초 답사를 마치고 어느 음식점에 들렀더니 큼직한 식당 댓돌에 연꽃이 새겨져 있었다. 돌은 기록에만 전해오던 예성(蘂城) 성돌로 밝혀졌고,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얼떨결에 답사 모임은 '예성동호회'로, 회장은 유창종으로 결정돼 버렸다. 이후 유창종은 기와검사로 불리게 되었다. 유창종과 충주북여중 국사 교사 장준식, 중원군 문화공보실장 김예식이 주축 멤버였다. 바로 이 예성동호회가 고구려비를 발견한 것이다.

중원 땅 역사 밝혀준 고구려비

충주 고구려비 실물 사진
충주 고구려비 실물.

 

1979년 2월 24일 예성동호회는 의정부로 발령난 유창종의 송별 답사를 떠났다. 유창종이 말했다. "중원 땅이니 만큼 틀림없이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웠으리라 생각했다. 우리는 순수비 찾는 데 혈안이 돼 있었다." 그날 동호회는 "입석마을이라고 있는데, 그 어귀에 고비가 하나 있다"는 회원 김예식의 말을 따라 입석마을로 갔다.

백설기를 머리에 인 비석에 석양이 비치고, 눈과 손으로 희미한 한자를 확인해가며 회원들 온몸은 조금씩 소름으로 뒤덮였다. 유창종이 말했다. "우리는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국내에 단 하나밖에 없는 고구려비를 우리가 찾아낸 게 아닌가."

학계 연구 결과 고구려가 신라를 '아우' 혹은 '동이(東夷)'라고 불렀고 의복을 '하사'했으며 신라 '영토(國)'가 아닌 '땅(土)'에서 고구려 관리가 주민들을 '소집'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고구려가 중원 땅을 차지했다는 기록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였으니, 고대사의 수수께끼 하나가 마침내 풀린 것이다. 며칠 뒤 찾아온 학자들 앞에서 정순택이 마지막으로 비석에 고사를 지내고 비석은 마을 창고로 옮겨졌다. 비석은 2012년 마을 앞 충주고구려비전시관으로 안전하게 옮겨져 전시 중이다.

역사에서 배운다


신라 진흥왕은 가야로부터 항복을 받고서 가야 유민들을 중원으로 몰아냈는데, 그중 한 명이 악성 우륵이었다. 우륵은 지금 충주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타고 곡을 짓곤 했다. 남한강과 달천을 굽어보는 탄금대 또한 훌륭한 산책 코스며 답사 코스다. 임진왜란 때 장군 신립은 "훈련 안 된 우리 조선군은 배수진을 쳐야 죽기 살기로 싸울 수 있다"며 천혜의 요새 문경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문경새재에 당도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텅 빈 새재 앞에서 당황했다. "아무도 없다"는 보고를 거듭 듣고 나서야 고니시는 "하늘이 도왔다"며 진군했다. 신립 부대는 전멸했고, 신립은 탄금대에서 투신자살했다. 군사학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전술이었다. 죽을 각오만으로 전쟁을 치를 수는 없다는 사실을 탄금대에서 배운다.

유창종은 마약검사로 이름을 날리다 2002년 국립중앙박물관에 평생 모은 와당 1873점을 기증하고 이듬해 퇴직했다. 2005년 일본 와당 수집가 이우치가 소장한 조선 와당 컬렉션을 전 재산을 털어 환수해왔다. 2008년 서울 부암동에 유금와당박물관을 열었다. 환갑인 2005년부터 중국어와 일본어를 공부해 중국과 일본 대학교에서 대학생들에게 강의 중이다. "좋은 옷, 비싼 음식 탐내지 말고 옛 문화 속에서 지혜를 배우며 20년, 30년 뒤를 설계하고 그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 지혜를 탄금대에서 배운다. 선인(先人)의 흔적을 보듬어낸 입석마을 어른들에게 배운다. 그게 중원 땅이다.

충주 여행지도

[충주 여행수첩]

〈볼거리〉

1. 중앙탑공원
통일신라 때 세운 칠층석탑은 국보 제6호다. 남한강변에 공원이 잘 조성돼 있다. 가끔 훈련 중인 전투기와 백로가 탑 위로 교차 비행하는 신기한 풍경도 볼 수 있다. 2. 누암리 고분군 이정표에는 '루암리 고분군'으로 돼 있다. 신라시대 고분들이 집단으로 서 있다. 3. 탄금대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고 가야금 다섯 곡을 완성했다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신립 장군과 부대를 기리는 탑도 서 있다. 풍광을 구경하며 산책하기 좋은 장소.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

중앙탑면 용전리. 입구에 있는 '칠전팔기의 마을' 비도 눈여겨 봐둘 것. 문화해설사 2명의 설명을 반드시 듣도록 한다. 대한민국에 보기 드문 고구려 문화와 역사를 엿볼 수 있다. 고구려비 실물을 대면하는 감동. 월요일 휴관.

〈맛집〉

1. 중앙탑초가집
중앙탑공원에서 충주 쪽으로 5분 거리. 징거미라는 민물새우를 양껏 넣은 새우매운탕 강력 추천. 칼칼하고 푸짐하다. 3만원. 징거미가 떨어지면 맛이 덜한 보리새우를 넣는다. 중앙탑면 루암리 148-6, (043)845-6789 2. 무학자유시장 순대골목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을 내는 순대와 김치/고기만두. '왕순대 오공주 왕만두'집 추천. 순대 1인분 7000원, 김치만두 2000원. 국밥을 시키면 순대 서비스.

〈유금와당박물관〉

변호사로 개업한 유창종과 아내 금기숙 교수가 만든 와당 박물관. 수, 토 일반 관람, 화~금 예약 관람, 월·일·공휴일 휴관. 5000원. yoogeum.org, 창의문로 11가길 41, (02)394-3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