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순교성지는 서울과 의주를 잇던 조선의 제1로(路) 의주로와, 시청과 충정로를 잇는 서소문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의주로 길 건너편에는 중앙일보·JTBC 사옥이 있다. 근방에 건물이 켜켜이 들어서고, 기차가 다니고,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진 사이 서소문 성지는 한동안 역사 속에 묻혀 있었다. 교황의 방한 전까지만 해도 이 곳이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1999년에야 형틀 3개를 형상화한 대형 현양탑이 세워졌고, 2010년부터 매주 금요일 오전 순교자를 기억하는 성지 미사가 봉헌되기 시작했다.
이 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대부분 한양에 살고 있었거나 또는 한양에서 붙잡힌 평신도들이었다. 근처 칠패 시장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으니, 서소문 순교성지 일대는 가톨릭을 믿으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알리기에도 적합한 위치였다. 명절 즈음엔 시장 상인들이 처형을 중단해달라며 형조에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대목에 손님 발길이 끊긴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순교 성지 앞에는 생선과 채소를 파는 중림시장이 있다. 아침 일찍 문을 열고 점심 전에 닫는, 낡고 작은 가게들이 모여있다. 성지 북쪽으로는 경찰청이 있다. 200여년 전에도 형조와 의금부가 이 근방에 있었다고 하니 지금과도 풍경이 꽤 닮았을 법하다.
낮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목에서 평범한 순교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곳. 서소문 순교성지는 여전히 이 일대에서 가장 낮은 지대다. ‘늘 낮은 곳으로 향한다’는 말대로, 프란치스코 교황 또한 이 곳에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사진은 지난 22일 오전 인근 브라운스톤 아파트 8층 옥상정원에서 바라본 성지 전경이다. 현양탑 앞에서 약현성당 주관으로 성지 미사가 열리고 있다.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글=유재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