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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8. 1. 20:21

윤동주에 밀리고 무덤도 없는 '서촌의 아들'

오마이뉴스 | 입력 2014.08.01 14:57

 
[오마이뉴스 김정봉 기자]

'대은암 도화동 이름난 이곳 북악을 등지고 솟아난 이 집...'

서울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교가는 이렇게 시작된다. 겸재는 이곳, 경복고 부지 어딘가에서 태어났다. 양가(良家)에서 태어났지만 형편이 좋지 않아 '솟아난 집'은 아니었다.

겸재는 현령·현감으로 고향을 등진 10여년을 빼고 70평생을 이곳에서 지냈다. 그야말로 서촌이 낳은 서촌의 아들이다. 스승 삼연 김창흡과 평생지기 사천 이병연은 아랫마을 궁정동에 살았고, 평생을 같이한 관아재 조영석은 건넛마을 옥인동에 살았다. 겸재는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인복을 타고났다.



▲ 겸재가 태어난 경복고등학교와 백악산 정경겸재는 1676년 북악을 등지고 솟은 경복고 어딘가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지명으로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이다

ⓒ 김정봉

경복고 교정 잔디밭에 세워진 석물 하나, 겸재를 기리며 그의 태생을 알리고 있다. 겸재의 < 독서여가(讀書餘暇) > 가 새겨져 있다. 툇마루에 비스듬히 앉아 모란꽃 화분을 감상하며 세상 남부럽지 않게 평안히 노년을 보내는 선비, 겸재 자신을 그렸다.



▲ 겸재를 기리는 석물툇마루에 비스듬히 앉아 평온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자신을 그린 < 독서여가 > 가 새겨져 있다. 500년 넘은 느티나무가 곁에 있어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겸재집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김정봉

70년을 품었다 낳은 < 인왕제색도 >

겸재는 앞산 인왕을 지겹도록 보고 자랐다. 경복고 운동장 관중석에 앉으면 인왕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교과서에서 보았던 < 인왕제색도 > 가 스친다. 그렇다하여 이 그림을 여기서 보고 그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리얼리즘에 의해 사물을 빠짐없이 보고 그리는 것은 하수(下手)나 하는 일이다.

진경산수라 하여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자연의 정신, 기운, 본질을 나타내야 진경산수다. 눈으로 보고 머리로 지우는 긴 여정이 필요하다. 겸재는 그의 나이 76세 돼서야 < 인왕제색도 > 를 세상에 내놓았다.



▲ 경복고운동장 관중석에서 본 인왕산인왕제색도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여기서 그렸다고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다. 재미삼아 비교해 보는 것으로 만족할일이다

ⓒ 김정봉



▲ 겸재의 < 인왕제색도 >위의 사진과 그림은 많이 다르다. 보이지 않는 자연의 기운, 정신이 담겨서 그럴게다 (겸재박물관에서 촬영)

ⓒ 겸재기념관

삼청동 정독도서관 쪽에서 보고 그렸다는 말도 있고, 절친 이병연을 추념하여 궁정동에서 그렸다는 말도 있다.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미 평생을 보아온 인왕. 겸재는 머리와 가슴에 인왕을 품었을 터다. 청하현감으로 가있던 59세 때 역작 < 금강전도 > 를 그렸듯 언제, 어디에서든 '인왕'을 그릴 수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그림은 그림 이상의 경지다. 이를 우리는 화학(畵學)이라 부른다. 예술을 넘어 철학의 경지를 건드리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음양의 조화와 대비, 남성다움과 여성스러움, 강함과 약함, 골과 육, 뾰족함과 무딤, 흑과 백 등이 담겨 있다. 정치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지 않고 평안한 생애를 마감한 겸재의 인생철학이 스민 듯하다.

겸재마을 뒷동산은 '윤동주의 언덕'이 되고

겸재마을 뒷문 같은 창의문에서(겸재의 < 창의문 > 은 전편에 실음) 산성(山城)을 따라 인왕 쪽으로 가면 전망 좋은 언덕이 있다. 겸재가 아닌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라 불린다. 뒷동산처럼 드나들던 겸재가 알면 꽤나 섭섭하다 하겠지만 후대의 평가가 이런 걸 어찌하겠는가?



▲ 윤동주시인의 언덕에서 내려다본 '장안풍경'매연에다 윤동주시인의 시비에 가려 시야가 좁아졌다

ⓒ 김정봉

겸재는 봄날 여기서 내려다본 장안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 장안연우(長安煙雨) > 다. 연우는 안개비라는 뜻, 안개비 내리는 장안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남산, 멀리 관악산까지 넣었는데 지금은 뿌연 매연에다 윤동주 시인의 커다란 시비가 '한몫' 더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 겸재의 < 장안연우 >안개비 내리는 장안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남산, 멀리 관악산까지 그렸다(윤동주시인의 언덕 안내판에서 촬영)

ⓒ 김정봉

뭉개진 청풍계(淸風溪)는 그림으로만 전하고

청운초등학교 오른쪽, 인왕산 동쪽 기슭으로 오르는 오르막길은 예전에 청풍계라 불리었다. 청단풍, 버드나무, 잣나무, 노송, 바위와 숲이 어우러져 그윽한 곳으로 정조도 절경으로 꼽았다. 이런 곳을 겸재가 그냥 놔둘 리 없다. 여러 폭의 < 청풍계도 > 를 남겼다.



▲ 겸재의 < 청풍계도 > 세부그림의 정경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상처투성이인 바위위에 대저택들이 들어서 있다('화인열전1' P267에서 세부 촬영)

ⓒ 역사비평사

백악산, 인왕산 계곡이 많이 뭉개졌지만 이곳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도 없다. 누가 이렇게 뭉개버렸을까? 일제강점기에 미쯔이(三井)회사가 들어와 망가트렸다 하는데 한 번 망가지면 걷잡을 수 없다. 지금은 대저택들이 상처투성이인 계곡바위를 타고 앉아 있다.



▲ 청풍계의 오늘계곡은 길이 됐고 바위는 저택의 축대나 담이 되었다. 노송, 버드나무 대신 길들여진 향나무가 집안에 갇혀있다. 백세청풍바위는 사진 속 거울 바로 옆에 있다

ⓒ 김정봉

'백세청풍(百世淸風)'이 새겨진 바위덩어리만 홀로 남아 청풍계를 지키고 있다. 백세청풍바위 언저리에 겸재의 그림 속 주인공, 김상용집이 있었다 하는데 현재 대저택의 축대를 예전 바위로 여기고 상상하면 얼추 비슷하기도 하다. 골목 곳곳에 성과 같은 축대와 담들이 있다. 계곡의 수려함이 어떠했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

평안한 말년

겸재는 50대에 접어들자, 생활형편이 좀 나아졌는지 북악에서 인왕산기슭 옥인동으로 이사한다. 건넛마을 관아재 조영식 집 수십 보 옆으로 온 것이다. 청운동에서 통인동으로 넘어가는 언덕, 지금 군인아파트 자리다. 기념물이 군인아파트 놀이터 한쪽에 만들어졌다. 여기서 10여년을 보내고 난 뒤 자신의 집, <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 > 를 그렸다.



▲ 겸재의 < 인곡유거도 > 세부어릴 적 뒷산이었던 백악이 이제 앞산이 되었다. 책을 펴놓고 눈은 백악을 향하고 있다. 어려웠던 백악시절을 떠올린 게다 ('화인열전1', P271에서 세부촬영)

ⓒ 역사비평사

인왕산 자락, 운치 있는 외딴 집에서 평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자신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방안에 앉아있는 겸재는 책을 펴놓긴 했는데 딴청을 피우고 있다. 눈은 다른 데 가있다. 인왕으로 왔으니 이제 인왕은 뒷산이고 백악이 앞산이 되었다. 눈이 가는 곳은 백악이다. 자신이 보낸 어릴 적 백악시절을 떠올리고 있다.

수성동계곡은 겸재의 그림대로 다시 태어나

인왕산 서남쪽 기슭,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한 계곡이 있다. 물소리가 좋다하여 수성동계곡이라 불린다. 예전부터 시인묵객이 즐겨 찾은 곳이다. 토박이 겸재가 이곳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이 계곡을 인왕과 함께 한 폭 산수화로 남겼다. < 수성동 > 이다.

수성동계곡이 겸재의 그림처럼 현실로 드러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계곡을 가리던 옥인아파트가 철거되자 계곡이 드러났다. 겸재그림대로 계곡을 복원하여 수성동을 그런대로 살려놓았다.



▲ 수성동계곡 정경복원된 지 얼마 안 되어 좀 어색하긴 해도 계곡과 다리, 인왕산은 그대로다

ⓒ 김정봉

몇 번을 찾아가도 아름다운 물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하였다. 희미하게 들리는 물소리는 옥인아파트 철거할 때 주민들의 하소연 마냥 구슬프게 들린다. 옮겨 심은 소나무는 아직 주변의 산세와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노는 것 같긴 한데 속 깊은 계곡과 계곡을 잇는 기린교는 예전 그대로다.

서촌의 아들, 서촌에 뿌리내리지 못했네

후대의 겸재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지 않지만 그를 기리고 생각할 공간, 그의 묘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아쉬움이 남는다. 더군다나 생전에 남부럽지 않게 살다 간 그는 고향 서촌에서는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은 더욱 크다.

뒷동산은 윤동주의 영혼의 터로 윤동주에게 내주었고 기념관 또한 양천현령으로 근무한 연고로 강서구에 내주었다. 고향에 기념관은 말할 것도 없이 공적으로 세워진 기념비 하나 없다.

관념을 거부하고 조선의 산하를 직접 다니며 진경을 그린 진경산수의 거장, 겸재. 진경산수의 대가답게 그의 자취는 서촌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서촌을 세 번 정도 간 끝에 겨우 겸재의 일부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발걸음을 뒤쫓는 '겸재의 길'을 만들어 그를 기린다면 그보다 더 좋은 대접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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